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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의 안진진을 만나면

양귀자 '모순'을 읽고서

by 유니스

책 읽기도 글쓰기도 손을 놓은 지 한참이다. 글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데 책마저도 손에서 놓으면 안 된다는 불안감에 이 책 저 책 손에 들어보지만 진도는 나가지 않았다. 예전 맨투맨 영문법 책 앞부분만 새까맣던 것과 같은 모습이다.

간신히 손에 책을 들었으면서도 몇 장 뒤적거리다 곧 흥미를 잃고 놓아버린다. 내 침대 옆에는 언젠가 제대로 읽어주기를 애절하게 기다리는 책들이 높이 쌓여만 간다.

글쓰기 역시도 의자에 강제로 내 몸을 묶어두지 않고서는 의자에 앉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와 사이가 멀어진 노트북과 책상은 안타깝게도 사소한 물건들을 올려두는 용도로 쓰이고 있었다.

정말 질퍽하게 빠져서 읽고 싶은 책을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나에게 한동안 완독할 책을 만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등대모임에서 추천한 양귀자 님의 '모순'은 소설이라는 장르와 제목에 강한 끌림으로 제발 이 권태의 늪에서 날 끌어올릴 신호탄이 되길 바랐다.


내가 살고 있는 일대의 도서관 모든 곳에서 다 대출이 된 상태였고 난 곧 긴 여행을 떠나야 했다. 이번 여행에서는 책을 읽을 시간이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정해둔 기간 안에 읽으려면 난 일주일 시간 동안 읽기를 끝내야 했다. 기한을 넘긴다고 누가 뭐라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 스스로를 쪼이고 싶었다.

뭐든 매진이 되었다면 기를 써서라도 더 가지고 싶은 인간의 욕구가 생겨나 대출을 대기할 수가 없어 온라인으로 중고책을 당장 주문했다. 책이 도착한 날 책 표지에 손을 얹고 기도했다.

'제발 이 책은 끝까지 읽을 수 있기를.......' 다른 이들이 출판한 지 꽤 시간이 지난 이 책이 지금 인기를 끄는지 이유를 나도 알고 싶었다.

읽기 전 결말이 의외였다는 얘기를 듣고서는 결말이 더 궁금해하며 집중해서 읽은 것 같다.

읽는 동안 가슴의 답답함은 고구마를 먹으면서 읽어서 그러했기도 했겠지만 골치 아픈 일들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변인들에 의해 일어나고 어쩔 수 없이 휘둘려야 한다 것에 답답함도 컸다.




안진진은 나에게 애잔한 사람이다. 가족 구성원들은 마치 일일드라마에 나오는 숨이 턱턱 막히게 만드는 캐릭터들이다. 이런 캐릭터가 하나만 있어도 되련만 여기는 여럿이다. 그래서 속 터지게 만드는 캐릭터 종합선물세트다.

이 길로 가도 저 길로 가도 내가 쉽게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에 막혀 있는 깝깝한 미로에 갇힌 듯한 삶을 살아가는 안타까운 인물이다. 그러면서도 두 남자를 저울질하는 꽤 뻔뻔하고 얄미운 여자이기도 하다.


엄마든 이모든 동생이든 주변인들의 마음을 꽤 뚫고 있으며 그들의 의지나 반응을 알면서도 모른 척 맞춰주거나 넘어가주는 행동들에서는 배려하는 사람 성숙한 사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인간형 )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이모에 대한 배려를 보면서 이모가 왜 안진진에게 의지했는지가 보였고 이모가 자신의 딸이 아닌 조카에게 그런 걸 기대하는 모습에서 결말을 예상되기도 했다.


글을 읽으며 내가 안진진이 되어 본다. 처음엔 두 남자를 다 알아가는 것도 그럴 수 있을 것 같고 영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 시간이 길어지면서 이건 그냥 양다리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울질을 몇 달 이상하는 건 즐기는 것이 아닐까? 그것도 두 남자는 전혀 서로의 존재도 모르고 있고 결혼이야기까지 나오는데도 불구하고 어느 쪽도 정리하지 않는다는 것이 놀라웠다.

나라면 누구를 택했을까? 내가 안진진의 나이였다면 난 당연히 조금이라도 더 끌리는 쪽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의 상황과 나의 상황은 신경도 쓰지 않고 그저 그 사람 하나만 봤을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난 글을 읽는 내내 시뮬레이션이 돌아갔다. 안진진이 나영규를 선택했을 때 일어날 일들의 장단점과 김장우를 선택했을 때의 장단점 먼저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경험자다. 이미 살아봤다.

내가 안진진의 옆에 있었다면

"여태까지 평탄하게 살아보지 못했잖아. 지금까지도 충분히 고생했어. 이제는 순탄한 삶도 맛봐야 하지 않겠어? 그러니 나영규를 택해. 너 김장우랑 결혼하면 뒷감당을 어떻게 할 거야? 그 물러터진 남자랑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헤쳐 나갈 건데. 너네 둘만 바라보고 산다면 몰라도 그의 가족들과 너의 가족들까지 있잖아" 말해주고 싶었다.

역시나 난 아줌마였다. 그리고 다 큰 딸을 가진 엄마였다.

솔직히 두 녀석 다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나는 내가 솔직해질 수 있는 사람을 택하는 게 맞다고 20여 년 전에도 그렇게 생각을 했고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

'나의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보여주어도 문제 삼지 않을 사람' 나영규를 택하라는 이유다.



좀 더 시간이 흐른다면 그때는 안진진의 엄마의 입장으로 책을 읽을 것 같다.

젊었을 땐 절대 이해가 가지 않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납득이 되고 인정하게 된다.

그녀의 한시도 편하지 않던 고달픈 삶을 생각하면 눈물이 고였다. 냅다 버리고 싶었을 텐데. 모른 척 돌아서고도 싶었을 텐데.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씩씩하게 헤쳐나갔고 또 닥쳐올 폭풍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모습에서 안진진에게는 든든한 엄마가 있었구나, 앞장서서 씩씩하게 막아주는 엄마가 있었다는 것이

안진진을 무너지지 않고 버티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의 모순이 보이면 진저리를 치며 싫어하면서도 나는 그러지 않은 척하는 모순적인 삶을 살고있다.

인식하게 될 때는 부끄럽기도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다 모순적일 수 있다. 누구나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한 책이다.

이 책의 장르는 소설이지만 난 읽는 동안 소설이 아닌 에세이처럼 읽혔다.

지금도 어딘가에 안진진이 있을 것 같고 후속 이야기가 나올 것만 같다.

그녀는 이제 순탄하게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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