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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새월 Oct 02. 2023

울려다 웃은 표정은 괜히 자연스럽다

심리상담 우여곡절 


내가 심리상담을 받은 건 살면서 딱 한 번, 총 8 회차였다. 작년 이맘때, 여러 일로 바쁘고 지쳐서 서울시 청년마당에서 주관하는 프로그램에 신청했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서 그런 것은 아니고,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가 없어서 신청했다. 부모님께 말씀드리기도 싫었던 나는 일반적인 대학생답게 상담에 쓸 돈은 없었다. 


예전에는 있는 줄도 몰랐던 동네 상담센터를 전전하면서 무료 상담 같은 건 없다는 걸 몸소 확인했다. 그렇게 그분들 입장에서는 당연한 사실을 확인받고 다시 거리를 보니, 헬스장과 음악학원이 있는 상가 2층은 병원처럼 느껴졌고, 다른 상담센터 아래층에 있던 피부과는 병원으로 보이지 않았다. 자력으로 나눌 수 있는 대화는 정답이 아니었다. 여러 번 참여한 술자리의 인원수와 상대가 바뀌어도 결국 내가 원하는 종류의 대화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다음 날 오후쯤 정산되는 몇 만 원은 확실히 그냥 술값이었다. 그렇게 동냥질 비슷하게 동네 상담센터를 돌다가 국가에서 무료로 해주는 상담 프로그램을 알게 됐고, 생각보다 절차가 간단해서 바로 지원했다. 


내가 그 8회 동안 약물 치료를 처방받은 것도 아니고, 정밀 검사를 받은 것도 아니라서 우울증에 관해 몇 마디 얹고 싶은 건 아니다. 막말로 우울증을 겪었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부류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냥 그 약 세 달 동안 우스운 일들이 좀 있었으니 그 얘기를 좀 하고 싶을 뿐이다. 돌이켜보면 그런 우스운 일들 덕분에 되려 더 편했던 것 같다. 


청년무료심리 상담을 신청할 때, 몇 가지 온라인 검사를 해야 했다. 무슨 적성 검사랑 무슨 우울증 지수 검사였는데, 정확한 명칭은 기억도 안 나고 딱히 찾아볼 필요성을 못 느끼겠다. 휴대폰으로 할 수 있는 가벼운 것들도 있었지만, 30분 넘게 걸리는 본격적인 것도 있었다. 내가 그 큼지막한 우울증 검사를 하다가 집중력과 정신력의 한계를 느껴 중간에 관두고 누워버렸는데, 마저 하려 다시 노트북을 여니 시간이 초과됐다고 처음부터 다시 하란 지령이 떨어졌다. 


대학 공부로 갈고닦은 미루는 습관이 이렇게 돌아올 줄은 몰랐다. 이 간단한 작업도 제대로 수행을 못한 게 내 우울을 가짜로 만들어 모든 핑계를 비웃고 있는지, 진짜로 만들어 내 달성 실패를 예찬하는지 헷갈렸다. 공개된 공간이라 마음에는 좀 걸렸지만 카페에 가서 작정하고 하기로 했다. 누가 내 화면을 볼 수도 있다고 인지하고 나니 술술 속도가 났다. 그렇게 절반쯤 끝냈을 무렵 어떤 인상 좋은 아저씨가 내게 말을 걸었다. 


7~8명 넘게 모인 혼성 중년들이었다. 그 나이대에 그 정도 인원으로 만날 수 있다는 건 분명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근데 그 인상 좋은 아저씨가 내게 자기들 사진 좀 찍어줄 수 없냐고 부탁한 것이다. 그때 인생의 대선배들께 품었던 존경심이 살짝 흔들렸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웃으라는 말과 숫자 세 개를 명량하게 내뱉는 것뿐이었다. 그분들은 젊은이를 대하는 따뜻한 시선에 전자기기도 잘 다룬다는 막연한 칭찬을 담았다. 나는 아무리 사진을 거지같이 찍어도 값진 유쾌함으로 만족하는 그분들을 생각하며 그래도 제대로 찍은 게 맞나 잠깐 속으로 따졌다. 이때 만약 내가 중요한 걸 하고 있다며 거절했으면 어땠을까? 아예 노트북 화면을 보여주며, 저 아픈지도 몰라요! 하고 유난을 떨었으면 그 우울증 검사 결과가 조금은 달라졌을까.


어쨌든 결과는 무사히 다 마쳤고, 상담사분과 연결이 되어 일정 조율을 하게 됐다. 굉장히 인상 깊었던 게, 그 상담사분은 카카오톡에서 설정한 자기 이름 옆에 괄호로 전화번호를 적어놨었다. 별거 아닌 일이었지만, 대단한 직업의식이 느껴졌다. 되게 다양한 배려가 눈에 띄었다고 해야 하나? 또래 친구들이 대부분인 내 연락망에서 그런 이름 설정은 긍정적으로 생소했다. 


근데 그게 내 눈에만 띈 게 아니었다. 그때가 막 스크린 골프장 알바를 시작했을 즘인데, 카운터에서 쉬고 있을 때 그 상담사분과 연락하는 화면을 같이 알바하는 형이 얼떨결에 봐 버렸다. 언제 만날까요? 이 건물로 오시면 됩니다! 같은 말들은 이성과의 만남으로 오해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 형은 내게 어떻게 만났고, 몇 살이냐고 물어보며 즐거운 내색을 숨기지 않았다. 내가 대충 넘기며 으스대니 그 형은 질문을 멈춰줬는데, 그럼에도 질문공세가 끊이지 않았다면 없는 여성을 만들어 이야기를 풀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랬다면 수치심으로 잠을 못 이뤘을 거다. 오이밭에서 신발끈을 묶다가 농장 직원으로 오해받은 기분이었다. 관광객 신분인 나를 농장 주인이 막 소리를 치는 거다. 일 안 하고 뭐 하냐고. 


그 밖에도 우스운 일은 주변에 무조건 한 명은 있는 짜증 나는 사람처럼 계속 얼굴을 비췄다. 상담을 받는 동네에 사는 친구한테 만나자고 했는데, 여긴 어쩐 일이냐며 물었을 때 이 악물고 말 안 하다가 결국 일정이 안 맞아 상담 안 받는 날에 동네로 가 그 녀석을 만났다거나. 내가 작성한 문장완성검사를 가지고 상담사분이랑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엄청난 일을 겪었다고 서두를 열며 완성한 문장을 설명했는데 별일 아니었다고 일축을 당했다거나. 당황한 나는 그때 엄청 덩치 큰 짐승이 호수에 빠져 긴 털로 덮고 있던 앙상한 몸매가 드러난 것 같다고 했고, 상담사님은 좋은 비유라며 마음 편하게 먹으라고 하셨다. 그때는 너무 당황스럽고 민망해서 식은땀이 났고, 순발력 있게 뱉은 그 비유처럼 등 쪽에 축축함을 느꼈다.   


그 상담 프로그램은 8회 차를 기본으로 했고, 내담자와 상담사가 합의해 한 두 회 더 진행할 수 있었는데, 상담사님은 8 회차날 종결을 권유하셨다. 처음 봤을 때랑 비교해 보니 내 머릿속을 지배하던 복잡한 것들이 많이 사라졌다고, 좋아 보인다고 하셨다. 상담사님은 지구 궤도를 도는 우주 쓰레기 같은 그것들을 굳이 언어로 명쾌히 규명하지 않고, 그냥 "뭐가 많다."라고 표현하셨다. 새삼스레 고마운 일인 것 같다. 매 상담마다 일찍 도착해 긴장을 풀기 위해 줄담배를 피웠다. 상담을 종결지은 날 지하철을 타면서 그렇게 피운 담배들을 다 모으면 상담 한 회치 금액 정도는 나오지 않을까 하고 어림짐작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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