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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소름 끼치는 너의 이름은 언니

잘 가.... 우아한 친구들아

by 머니페니 Mar 28. 2025

언니, 친근한 사이에서 통용되는 이름이다. 혈육관계 아닌 이상, 언니라 부를 때는 나의 손윗사람이며 그녀를 존칭 하는 의미이자, 나 와의 친근함을 나타내기 위한 척도로서 부르는 마법의 이름이다. 


앞서 민혜라, 그리고  나, 허세영이나 자인이나 관심, 한소리 등 나름의 관계들이 친한 친구로 둔갑은 하고 있지만 우린 서로를 언니 동생으로 불리며 지내고 있다. 

내가 모임에서  애들이랑 대화를 느낄 때 아주 가끔 이질감을 느낄 때가 있다. 그 이질감은 바로  "애가 날 맥이는 말인 건가, 아니면 걱정해서 하는 말인데 그저 아줌마스러운 주책인 걸까"라는 그 경계이다. 


 친구로 탈을 쓰고는 앞에서는 미소를 지으면서 속 마음을 다 이야기하면서도 마지막 말은 “언니니까” 로 끝나면 설령 기분 나쁜 말 일지언정 다 넘어가야 할까?


 민혜라는 자기가 나 보다 나이가 어린 걸 내세워 은근 외모로 나를 깔아뭉갠다. 그러면서 “언니”라고 부르며 나도 언니처럼 관리해야지 이런다. 앞에서는 날 외모로 깔아뭉개곤, 나처럼 관리해야지? 이건 뭔 뜻일까. 할 말 다하고는 언니만 붙이면, 이미 했던 부정의 표현조차도 긍정으로 자동 변환하는 마법의 단어라도 된단 말인가?     

또, 언니라는 말 때문에 타의 모범의 되어야 하는 상황도 생긴다. 

 가령 모임에서 언니이니 이번처럼 미국에 다녀오면서 빈손으로 오기 민망한 마음에 생색내기용 선물이라도 준비해야 하는 이 불편한 관계, 심지어 민혜라는 자기 안 챙겨 줬다면서 웃기게도 내가 애들에게 선물했던 바디샴푸를 (미국 마트에서만 판다) 공구하자며 단톡에 의견을 제시한 바가 있다. (대체 그 물건을 자기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대놓고 모임에 나오지 않은 자기를 안 챙겨 줬다며 나를 꼽준 거 아닌가 "언니 우리 공구하자"라는 말로 말이다.) 


이렇게 나는 성의로 베풀었는데, 자기가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면 나를 양아치 “언니”로 둔갑을 시켜버린다. 이렇다 보니 나는 별로  내키지도 않은 뭔가를 동생들을 위해 내가 해야 한다는 그 의무감이 시도 때도 없이 이 모임을 유지할 때마다 화가 불쑥불쑥 차오른다.  

    

내가 언니라 불리고 싶지 않은 이유가 바로 이거다.


그래서 나는 자인 이를 처음 만났을 때 친구 하자 했다. 언니라 불리고 싶지 않았다. 이미 재수생 시절, 나 보다 한 학년 낮은 친구들과 함께 입학경쟁을 치러야 했던 쓰라린 기억이 남은 만큼, 그 당시 나는 “언니”라는 이름에서 정말 많은 손해를 감내해야 했다. 

     

“언니” 니까      


근데 이건 사회에서 느끼는 이질감 보다, 가족들에게서도 비슷하게 느낄 것이다. 내가 장녀라서 기대하는 기대치, 혹은 손 윗사람이니까 당연히 해야 한다는 의무감, 그러면서 그런 호구 하나 앞세우고 서로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언니, 언니 아무 의미 없이 남발하며 주변의 나의 손아랫것들은 나를 호구로 만들어 가고 있던 건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나는 어느 날 이 우아한 친구들 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더 이상 내가 호구가 되고 싶지 않고, 그들을 위해 선의로 베푼 내 마음을 난도질당하기가 싫었다. 물론 나 역시 마냥 쿨내 나고 착한 건 아니었다.  맘 좁게 친구를 질투하기도 했고 험담을 하기도 했다. 괜찮다 나는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결론 적으로,  겉으로만 친구인척 정작에 속이 썩어 들어가는 내 마음을 이해는커녕 공감조차 못하는 18년 지기 우정은 사실 쓰레기 같았다. 

그중 가장 나쁜 게 뭔지 아나? 바로 내 동년배 한소리 년이다.      

한 소리는 나랑 동년배로 같은 “언니” 입장에서 애들 사이에서 “언니”라는 입장은 늘 고수해 왔고 심지어 나랑 이번에 한 바탕했던 자인이 조차도 늘 “언니”라는 말을 하게 끔 만들어 놓고는 정작 언니로서 나서서 중재해야 할 일에서는 뒤로 쏙 빠진 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방관자적인 시선에서 모르쇠로 일관한다는 거 진짜 더럽게 얄밉다. 


 자인이 와의 불화가 생긴 뒤로 우리의 대화 소재는 연예인 이야기나 소소한 일상 이야기로 다시 전환은 되었지만, 뭔가 모를 어색한 공기가 늘 흐르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들 모두의 대화의 주제는 누군가를 뒷담 화하기 위해 빌드업을 해왔던 대화들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우리 모두의 주 먹이거리가 사라진 지금, 타깃 대상도 없는 이 단체톡이 어느 날은 너무 무의미하다 싶을 정도로 조용하기도 했다.      


 나는, 이 글을 빌어 다인이에게 사과를 하고 싶다.  '마음으로'


 ""자인이 나는 늘 네가 질투의 대상이었다. 뭐든 잘 해내는 네가 너무 부러웠고, 그냥 가만히 있어도 품위가 있는 네가 늘 부러웠다. 나보다 더 좋은 대학을 나온 것도 부러웠고, 네가 학위를 받을 때도 부러웠다. 나 와 비슷한 연령임에도 불구하고 결혼 대신 너의 인생을 선택한 게 부러웠고, 그것을 후회하지 않는 모습 역시 부러웠다.  그래서 계속 18년을 질투를 해왔다. 나의 질투감이 나의 허세를 만들었고,  나는 그것을 무기로 삼아 너를 계속 공격을 하고 싶어 했던 거 같다.  그래야 내가 덜 초라해 보일 거 같아서 그랬나 보다.      

내 성격상 너에게 미안하다 말은 직접적으로 못 하겠다. 하지만 언제든지 네가 나와 대화를 이어가 준다면 전처럼 편하게 너와 대화 나누고 싶다. 이런 가면 속의 삶을 지켜가며 친구랍 시고 어울리는 이 무리들 속에서 그나마 넌 한결같았던 거 같아서 그래서 그게 얄미웠나 보다. 이제 우리는 각자의 갈길 가도록 하자. 그동안 질투해서 미안하다. ""

  

끝으로 나는 내 18년 지기들의 우아한 모임 채팅에서  “나가기”를 눌렀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18년을 지내온 세월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채팅방에서 나왔음에도 어느 누구 하나  

“무슨 일이냐” 며 말을 걸어오는 친구가 단 한 명도 없었다.      

허송세월 속의 18년을 나는 우정이라 여겼나 보다. 

험담으로 시작한 우정은 우정이 아니라 그저 공통점에 지나지 않았나 싶었다.      

허무하지만 한 편으로는 이제 가면은 안 써도 된다는 것 그게 나는 해방이 된 거 같았다. 

오늘부터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나하나 써가면서 나의 행복을 찾아가야겠다.      

일단 우정은 아닌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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