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님! 차라리 정치를 하세요
김다람은 이제 '회사 지옥'에서 살아남는 것을 넘어, 지옥 자체를 개혁하려는 야망을 품게 되었다. 그녀의 등급은 '현자의 부장'을 넘어 '천하무적 혁명가'로 승급 중이었다. 이번에 그녀를 시험대에 올린 빌런은 다름 아닌 '월급루팡' 이사였다.
그는 명목상 '외부 영업'이 주 업무였지만, 매출이나 거래량 증대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대신 직원들에게 모진 인격 모독과 무시를 일삼았고, 자신의 성향에 맞지 않는 직원의 업무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어떨 때는 '우리 회사 임원인가?' 싶을 정도로 호된 조건과 까다로운 지시만 내리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불편한 상황은 모두 다른 직원에게 떠넘겼다. 덕분에 직원들은 점점 소극적이 되었고, 개인 매출과 회사 매출은 수직 하강을 그렸다.
그러던 어느 날, 김다람이 담당하던 대형 프로젝트에서 문제가 터졌다. 계약 추진을 목전에 두고 최종 점검과 조율을 진행하던 찰나, 이 이사가 일언반구의 상의도 없이 프로젝트를 취소시켜 버린 것이다.
다람의 머리에서 스팀이 뿜어져 나오는 게 느껴졌다. 그녀의 공든 탑을 무심하게 망가뜨린 이사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현타가 온' 정도가 아니라, 이건 분노를 넘어선 경멸에 가까웠다.
다람은 당장이라도 이사에게 쫓아가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냉철한 혁명가였다. 조목조목 따져봐야 "왜 그렇게 프로젝트가 무산되어야 하는 건지 명백한 이유"는 없을 것이고, 결국 이사의 '기분 문제'로 귀결될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신, 다람은 '현실적인 제안 1'을 실행하기로 했다. 그녀는 자신의 팀원들에게, 그리고 다른 팀의 동료들에게 자연스럽게 이 프로젝트가 얼마나 중요했고, 얼마나 공들였는지, 그리고 이사가 어떤 설명도 없이 취소했는지를 알렸다.
"이번에 추진하던 그 대형 프로젝트 말이야… 이사님께서 아무 말씀 없이 취소하셨더라. 이유를 모르겠네. 거의 다 왔었는데."
"어? 그게 취소됐다고요? 그렇게 공들였는데?"
"우리도 황당해. 팀장님도 어리둥절하시고."
다람은 직접적으로 이사를 비난하지 않았다. 그저 '사실을 기반으로 한 팩트 전달'에 주력했다. 힘없는 당사자가 무슨 의견을 게시하더라도 묵살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유 없는 취소'에 대한 의아함은 회사의 여러 곳으로 퍼져나갔다.
밤이 깊었다. 다람은 잠 못 이루고 노트북을 켰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사에게 쏘아붙이고 싶은 말이 메아리쳤다.
"이사님, 외부 업체들에게 좋은 사람 되느라 여기 직원들 피똥 싸는 거 안 보이십니까? 그렇게 하면 저희 회사 매출이 올라갑니까? 저희 거래량이 늘어납니까? 이사님의 그 개인적인 친분 강화라는 그 명분 하에 수많은 직원들의 희생이 따르고 있는 것은 안 보이십니까? 그렇게 외부 업체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으시면요… 차라리 나가서 정치를 하세요! 여기는 회사라고요!"
하지만 다람은 이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런 건 '마음으로만' 하는 것이고, 때로는 '눈빛만으로도 의도는 충분히 전달된다는 것을 직접적인 충돌은 혁명을 방해할 뿐이었다.
그 대신, 다람에게 의외의 곳에서 손을 내밀었다. 바로 연차가 어린 직원들이었다. 프로젝트 취소로 의기소침해 있는 담당 직원에게 그녀는 따뜻한 메시지를 보냈다.
"힘내세요. 이번 프로젝트,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덕분에 저희 모두 많이 배웠어요. 다음엔 꼭 성공시킬 수 있을 거예요. 응원합니다."
다름아닌, 이 일에 가장 많이 애를 쓴 담당직원에게 다람은 그에게 위로의 메세지를 전했다. 다람은 역시 메시지에 큰 위로를 받았다. 다람은 알고 있었다.
"we are the world"는 그냥 되지 않는다는걸. 결국 어느 한쪽이 쥐어 터지고 쟁취해야만 성사가 된다는 것을. 하지만 그 '쟁취'는 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힘내세요', '응원합니다' 같은 작은 위로들이 모여, 침묵하던 직원들의 연대감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 다음 주 임원회의. 프로젝트 취소 건이 다시 수면 위로 올랐다. 다른 임원들은 이사의 눈치를 보며 침묵했다.
'좋게 좋게 하자는 명분하에, 우리 모두는 안이한 생각으로 침묵을 지킨다. 하지만 이는 그저 방관에 지나지 않는다.'
다람은 이 문장을 뼛속 깊이 새기고 있었다. 방관은 죄다. 편하게 살고 싶고, 불편한 상황 만들기 싫은 그 마음 어딘가에 '월급루팡'이 자리하는 것이다.
이사는 여전히 심드렁한 태도로 말했다.
"뭐, 그 프로젝트는 현 시점에서는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재검토가 필요해서 취소한 겁니다."
명백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기분' 문제라는 것을 모두가 알았다.
그때였다. 회의실 문이 벌컥 열렸다. 평소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이는 다름 아닌 김다람이 가장 응원했던 그 담당 직원이었다. 그의 손에는 무언가가 들려 있었다.
"이사님! 잠시 시간 내주십시오!"
담당 직원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강단이 있었다.
"이것은 제가 밤샘 작업해서 수정한 최종 제안서입니다. 이사님께서 말씀하신 '재검토'는 이미 다 이루어졌습니다. 저는 이 프로젝트가 무산되어야 할 명백한 이유를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가 저희 회사에 가져다줄 잠재적 매출액은 이렇습니다!"
그는 제안서를 테이블에 내던지듯 펼쳤고, 그 안에는 상세한 시장 조사와 예상 매출액, 그리고 향후 확장 가능성까지 조목조목 정리되어 있었다. 모든 임원들의 시선이 제안서와 담당 직원에게로 향했다. 이사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다람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녀는 이 담당 직원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고, 뒤에서 필요한 자료와 논리를 정리해 주었다.
'자유를 추구하던 사람들도 투표권을 얻기 위해 투쟁했던 투사들도 목숨을 걸어서 얻어낸 자유와 투표권이다. 그래서 그들은 발언을 하게 되었고 언론에도 힘을 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다람은 직원들의 침묵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들에게 '발언할 힘'을 실어주고 싶었다.
결국 그 프로젝트는 다시 추진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사의 '월급루팡' 행태는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직원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그들의 매출이 오르기 시작하자, 이사의 빈약한 성과는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더 이상 '개인적인 친분 강화'라는 명분으로 직원들의 희생을 강요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천하무적 김다람은 그렇게 직접 나서지 않고도 회사를 위한 혁명을 시작했다. 그녀는 직원들에게 '힘내세요'와 '응원합니다'를 넘어, '발언할 용기'와 '행동할 명분'을 제공했다. 회사는 더 이상 이사의 월급루팡 행태에 휘둘리지 않고, 매출은 다시 상승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오늘도 김다람은 생각한다. '제발 자기 회사에 좀비처럼 다니지 마라.' 그녀는 좀비가 아닌, 살아있는 혁명가였다. 그리고 그녀의 모험은 계속될 것이다. 다음 지옥문은 어디에서 열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