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리의 스텝 바이 스텝
김다람은 이제 '회사 지옥'의 모든 빌런을 길들이고, 조직을 혁신하는 '천하무적 혁명가'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풀기 어려운 숙제가 있었으니, 바로 '주의력이 부족한 직원 키우기'였다. 특히 그녀의 인사과 시절, '무대리'라고 불리던 무경훈 대리가 그 숙제의 중심에 있었다.
무경훈 대리는 늘 활기찼고, 긍정적이었다. 문제는 딱 하나, 주의력 부족이었다.
"야 무대리, 너에게 거는 기대가 커!"
라는 팀장님의 말이 무색할 정도로, 그의 손을 거친 업무는 늘 어딘가 허술했다. 시킨 것도 제대로 못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에 대한 기대감은 곧잘 실망으로 돌아왔고, 그 실망감이 쌓여 이제는 무대리에게 일을 맡기기가 망설여질 정도였다. 이대로 가다가는 그와의 '인연'이 회사라는 '종착지'에서 끝날 판이었다.
인사과 부장으로서 다람은 무대리를 그냥 둘 수 없었다. 그녀는 과거 '열심히만 하는' 다람에서 '일을 잘하는' 다람으로 진화했던 자신의 경험을 떠올렸다. 그리고 무대리에게도 같은 공식을 적용하기로 했다.
다람은 무대리에게 가장 쉬운 업무부터 주기 시작했다. 마치 어린아이에게 블록 쌓기 놀이를 시키듯, 그가 자신감 뿜뿜 할 수 있는 일들을 골랐다.
"무대리님, 이번에 새로 입사하는 신입사원들 사원증 제작 업무인데, 아주 중요하진 않지만 첫인상에 큰 영향을 미치니 꼼꼼하게 부탁해요. 색깔이나 글자 크기 같은 디테일이 중요해요!"
사실 사원증 제작은 실수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 단순 업무였다. 하지만 다람은 '첫인상', '꼼꼼함', '디테일' 같은 단어를 강조하며 무대리에게 이 업무가 마치 대단한 프로젝트인 양 포장했다. 무대리는 평소와 달리 꽤 집중해서 사원증을 만들었고, 실수 없이 완벽하게 해냈다.
"오! 무대리님! 역시! 제가 괜히 무대리님께 부탁한 게 아니네요! 사원증이 너무 예쁘게 잘 나왔어요! 신입사원들이 분명 좋아할 거예요!"
다람은 진심으로 칭찬했다. 무대리의 얼굴에 뿌듯함이 번졌다. 그는 처음으로 '일을 잘한다'는 칭찬을 들은 듯했다.
그 후로도 다람은 무대리에게 소소하지만 '완벽하게 해낼 수 있는' 업무들을 계속 주었다. 우편물 분류, 복사용지 채우기, 회의실 세팅 등. 무대리는 작은 성공들을 쌓아가며 점차 자신감을 얻기 시작했다. 그의 어깨가 펴지고, 표정에도 생기가 돌았다.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은 무대리에게, 다람은 다음 단계를 적용했다. 바로 소속감과 중요성을 심어주는 것이었다.
"무대리님, 사실 우리 팀에서 무대리님 같은 인재가 없으면 안 돼요. 다들 바빠서 놓치는 부분들이 많은데, 무대리님처럼 꼼꼼하게 기초 업무를 받쳐주는 사람이 있어야 팀이 제대로 돌아갑니다. 무대리님 우리 팀에서 정말 중요한 주춧돌이거든요!"
다람의 말에 무대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돌대가리일지도 모르지만'이라는 속마음과는 달리, 다람은 그의 존재 가치를 끊임없이 상기시켜주었다. 그리고 작은 업무 하나에도 디테일 있게 해낼 수 있도록 기회를 자주 주었다.
"이번에 복리후생 규정 개정안인데, 내용은 제가 다 만들었지만, 혹시 오탈자나 애매한 표현은 없는지 무대리님 눈으로 마지막 디테일까지 좀 봐주세요. 무대리님처럼 섬세한 사람이 봐야 실수가 없거든요!"
무대리는 규정집을 받아 들고 마치 국가 기밀문서라도 검토하듯 꼼꼼하게 살폈다. 실제로 몇 군데의 오탈자와 애매한 문구를 찾아냈고, 다람은 그를 크게 칭찬했다.
"역시 무대리님! 대단하다! 이런 디테일까지 찾아내다니! 역시 주춧돌이네요!"
무대리는 자신이 '돌대가리'가 아니라 '섬세한 주춧돌'이라는 착각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착각은 그를 더욱 집중하게 만들었다. 작은 업무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강박에 가까운 책임감이 생겨났다.
앞의 두 단계가 어느 정도 수준에 올랐을 때, 다람은 대망의 3단계, 즉 '스스로 문제 해결 능력'을 길러주는 단계에 돌입했다. 이 단계는 자칫하면 '업무상 하자'를 유발할 수 있어 매우 신중해야 했다.
다람은 일부러
'어 이건 아닌데?'
싶은 허점을 만들어 둔 업무를 무대리에게 주었다. 물론 회사에 큰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였다.
"무대리님, 이번에 연간 교육 계획서 초안인데, 제가 밤늦게 만들어서 혹시 빠진 내용이나 불필요한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무대리님 눈썰미로 한번 쭉 봐주세요."
무대리는 교육 계획서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며칠 뒤, 다람에게 달려왔다. 그의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부장님! 제가 계획서 검토하다가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신입사원 워크숍' 항목에 예산 배정이 안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작년에는 '직무 역량 강화 교육'이 두 번 있었는데, 이번에는 한 번으로 줄었네요.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다람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역시, 눈썰미를 발휘했군!'
그녀는 그에게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머! 무대리님! 제가 그걸 놓쳤네요! 역시 무대리님처럼 꼼꼼한 사람이 아니면 절대 찾아내지 못했을 거예요! 바로 수정해야겠네요! 대단합니다!"
무대리는 마치 위대한 발견이라도 한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자신이 '일을 잘하는 직원'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자신감은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다. 이제 무대리는 새로운 업무를 받아들일 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이 디테일을 찾아내고, 이 문제를 해결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똘똘 뭉쳤다.
몇 년 후, 무경훈 대리는 무경훈 과장으로 승진했다. 그의 자리에는 더 이상 서류 더미가 산을 이루지 않았다. 그의 전화기는 여전히 울렸지만, 이제 그 질문은 "이거 얼마예요?"가 아니라, "이 상황에서 최적의 딜은 무엇일까?"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어느덧 강선배처럼 상황 파악을 빠르게 하고,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 '일을 잘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김다람 부장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무과장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우리 무대리, 이제 그만 정신 차리고 일 좀 제대로 해볼까?'
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까마득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타고나게 일을 잘할 수는 없지만, 올바른 관심과 칭찬, 그리고 단계적인 기회를 통해 누구나 '일을 잘하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오늘도 회사 지옥의 어딘가에서, 김다람은 또 다른 무대리를 찾고 있을 것이다. 그녀의 '천하무적 인재 육성기'는 계속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