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장으로서 존재감 발현 하기

흔한 빌런 상사의 탄생의 기원

by 머니페니

우리 회사에는 매일같이 “영업 25년 차!”라는 구호로 하루를 여는 인물이 있다. 자기소개를 부탁하면 이름보다 먼저 경력을 말하는 사람. 마치 군인들이 “충성!”을 외치듯, 그녀의 입에서는 언제나 “영업 25년 차!”가 튀어나온다. 25년이라니, 어쩌면 회사 지하 창고 한구석에는 그녀의 낡은 영업수첩이 유물처럼 보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직급은 부장, 나이 마흔여섯. 보통 직장인이라면 ‘이제 좀 편해져야겠다’는 시기를 맞을 나이지만, 그녀는 반대로 날이 갈수록 더욱 불타올랐다. 부장이 된 게 마치 회사의 CEO라도 된 듯, 어깨는 늘 15도가량 위로 솟아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이제 이 회사는 내가 지배한다.”

1. 슈퍼 일개미의 탄생

사실 그녀는 일을 잘한다. 아니, 일을 잘 “한다기보다” 일을 미친 듯이 “많이 한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몸이 닳도록 업무를 갈아 넣는다. 결과적으로 성과는 좋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는 어느 누구도 칭찬, 그리고 직원들로부터의 인정 따윈 없이 그저, 연말에 그녀 자리에 놓이는 싸늘한 종이 한 장 짜리 우수사원상과 금일 봉만이 그녀를 반길 뿐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겨우 그 상장과 트로피가 그녀를 위로해 주는 유일한 존재였다. 회사 동료들은 그녀를 향해 박수도, 칭찬도 보내지 않았다.

“부장인데 그 정도는 해야지.”
“인센티브 받잖아. 우리가 뭐 따로 고마워해야 하나?”

심지어 임원 한 명은 노골적으로 말했다.
“우리가 다 돈 주는데, 못하면 잘라야지. 잘한다고 손뼉 쳐줄 필요 있나?”

이쯤 되면, 그녀는 회사에서 가장 불쌍한 ‘슈퍼 일개미’였다. 회사는 그녀에게 부장이라는 직함과 약간의 직책수당을 줬을 뿐, 그 이상은 없었다.

2. 일요일에도 출근하는 마음

차장, 과장들은 대체로 눈치껏 ‘적당히’ 일했다. 낮에는 컴퓨터 앞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척하고, 저녁이면 치맥을 마시며 인생을 즐겼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일요일 아침, 단톡방을 울리는 메시지.
“다음 주에 고객분 계약 예정인데 매물 확인 좀...”

월요일 새벽, 고요한 사무실을 깨우는 첫 카톡 알람.
“주말에 골프장에서 연락 와서 제가 개서료 업데이트했습니다.”
(자기가 업무 처리했음 된 거지 그걸 꼭 단톡에 공지까지 띄울 일?)


사람들은 처음엔 놀랐지만, 곧 무덤덤해졌다.
“아, 또 부장님이 부장님 했구나.”
그녀의 성실함은 ‘감탄’이 아니라 이젠 ‘배경음’이 되어버렸다. 마치 오래된 에어컨 소리처럼, 있으면 시끄럽기만 하고 딱히 시원하지도 않은 우리 회사 사무실 에어컨 말이다. 아 물론 그렇다고 그 시원치 않은 에어컨 마저 없으면 더운 것처럼 필요 하기는 하다.

3. 존재감의 위기

그녀는 꽤나 오래전부터 매년 우수사원상을 받아왔다. 한 해 동안 남들보다 더 열심히 더 치열하게 일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말에 주어지는 작은 트로피와 금일봉만이 그녀가 존재함을 나타날 뿐, 우리 회사 그 어느 누구도 그녀에게 "성과인정"과 "칭찬"을 하지 않았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아무리 그녀가 자신의 일에 본인을 갈아 넣어도, 아무도 반응하지 않는 것, 회사는 그녀에게 보너스 대신 무관심을 준 셈이다. 칭찬 대신,“당연함"이라는 시선, 그녀가 일궈낸 성과보다 더 높은 성과에 대한 흔한 기대치, 이쯤 되면 자기 자신과의 무한 경쟁을 해야 하는 거다. 하지만 아무도 누가 이기는지 관심이 없다면? 어떨까?


인간에게 가장 견디기 힘든 건 고된 노동이 아니다.
나라는 존재감의 부재.

그녀는 어느 순간 깨닫게 된다.
“내가 없어도 이 회사는 돌아가겠구나. 나는 기계처럼 쓰이다가 버려지는 거구나.”

그 공허함은 그녀를 질식하게 했다. 일에 몰두하면서도, 내면 깊은 곳에서 이상한 목마름이 생겨났다. 누군가 자신을 바라봐주길, 인정해 주길, 존재를 확인해 주길.

4. 드디어 찾아낸 마약, 험담

존재감 있는 한 끗이 되기 위해 그녀는 타깃을 정해 수시로 때때로 타깃의 뒷담화를 지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그 해답을 찾았다.


뒷담화.

놀랍게도, 사람들이 가장 빨리 반응하는 것은 그녀의 성과나 매출이 아니었다. 바로 “누구 이야기”였다. 특히 회사 내 특정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열정적인 영업성과에는 무관심하면서, 동료의 사소한 뒷얘기에는 귀를 쫑긋 세웠다.

그녀는 실험을 시작했다.

-타깃의 지각을 과장해 말하기.
-동료의 사소한 실수를 확대해서 전달하기.
-없는 흠도 살짝 지어내기.

효과는 폭발적이었다.
“진짜? 그랬대?”
사람들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손에 깍지를 끼고, 몸을 앞으로 쭈욱 내밀고는 또는 입을 가리며 수군댔다. 그녀는 마침내 깨달았다.


“존재감은 성과가 아니라 자극에서 온다.”


사람들은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소재에만 반응한다. 무던하게 일을 잘하기만 해서는 칭찬이나 리액션을 이끌어 낼 수 없지만 , 그녀가 누군가를 총대매고 험담하는 상황에서는 기꺼이 감상하는 싸구려 취향, 그 삼류 감성이 사람들로 하여금 모이게 한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 이야기를 주도한 본인은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동네 일진 놀이. 방구석 여포놀이 어릴 때나 하던 그런 패거리 향수를 불러일으켜 다 큰 어른이 놀이를 다시 하고 있는 것이다.


5. 빌런의 탄생

그녀는 점점 사내 빌런으로 성장했다. 성실히 일만 하던 과거의 슈퍼 일개미는 사라지고, 이제는 험담의 제왕, 방구석 여포로 변했다. 험담이 시작되면 사람들은 그녀를 중심으로 모여들었고, 그녀는 그 속에서 주인공이 되었다.
그 순간만큼은, 그녀의 25년 차 경력이 빛났다. 아니, 어쩌면 뒷담화의 여왕, 화려한 커리어가 새롭게 시작된 것일지도.
너무나 자신 있게, 사내에서 가장 큰 스피커가 되었다. 너무나 의기양양하여 자신의 뒷배가 굉장히 든든하니 그걸 믿고 그녀는 막말시전을 퍼붓는 과도한 선을 넘다가 그만 그녀는 25년 최대 가장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6. 역설의 결말

부작용은 강력했다. 사무실에서 도를 지나친 스피커짓, 점점 시간이 지나자 그녀 주위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심지어 몇 안 되는 두어 명의 사람들 조치, 그녀의 험담을 즐기다가도, 언젠가는 자신이 다음 희생양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누군가를 험담하던 그녀의 인성은 쓰레기가 되어가고 썩어 문드러지는 고약한 체취를 풍기며 점점 그녀 주위엔 한 명도 사람이 남아나질 않았게 되었다. 그렇게 그녀는 오늘도 나 홀로 고군분투를 하며 또 오늘은 불쌍한 희생양을 만들어 험담을 일삼으며 본인의 자아를 탐험하고 있을 것이다. 결국 그녀는 점점 고립됐다.

회사에서 그녀의 자리는 여전히 존재했지만, 진짜 ‘사람’은 곁에 없었던 것이다.

오늘도 그녀는 새로운 희생양을 찾는다. 존재감을 부지하기 위해, 또 다른 뒷담화를 지어내며. 말이다.

저런 병신이 되어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그녀야 말로 정말 대단한 신념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병신짓이라 볼 수밖에.. 인생 참 짧은데, 자기의 가치 있는 삶을 험악하게 소비하고, 거기에서 자아를 찾으려는 그 헛짓거리에 허무한 모래성에 너무 많은 공을 들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녀는 매우 지쳤을 것이다.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다 타버리고 재가 되어버린 연탄일 수도 있다.


성실이 낳은 괴물, 인정받지 못해 빌런이 된 슈퍼 일개미.

그녀는 오늘도 묵묵히, 아니 시끄럽게, 자신의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다.
마치 회사라는 거대한 생태계 속에서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단, 하나의 암세포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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