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아 작가님이 SNS에 머리를 잘랐다며 사진을 올렸다. 허리까지 닿을 듯했던 긴 머리가 단발로 싹둑 잘려 있었다. 여자가 긴 머리를 자를 때는 어떤 결심이 있기 마련, 무슨 일인가 궁금증이 들었다. 사진 밑에는 이런 문장이 달려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느낌이 드는 밤이 있고 그런 다음날 일어나자마자 문 연 미용실 가서 머리칼 싹둑 자른다. 한 개도 안 아깝고 아주 속 시원혀. “
역시 심경의 변화가 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은 느낌. 나에게 그런 느낌은 삼일에 한 번씩 오는데 그녀에게는 어쩌다 오나 보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 문장보다 ‘일어나자마자 문 연 미용실에 갔다 ‘는 말에 적잖이 놀랐다. 미용실을 그렇게 즉흥적으로 결정하다니! 사람이 이렇게나 다를 수가 있구나. 나는 미용실을 결정하는데 넉 달이 걸렸다.
올리브영 같은 체인점이면 몰라도 사장이 직접 운영하는 가게는 정말 가고 싶은 곳을 골라서 가는 편이다. 작은 공간에서 물건을 고르고 결제하기까지의 과정이 이왕이면 좋은 시간이 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특히 미용실은 더더욱 그렇다. 펌이라도 하게 되면 족히 두세 시간은 있어야 하고, 컷만 해도 이삼십 분은 주인장과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게 된다.
체취가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붙어있어야 하며, 무엇보다 나의 머리통을 온전히 맡겨야 하고, 가장 중요한 건 미용사가 해준 머리로 한동안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낯선 공간에서 멍하니 있는 동안 어떤 영감을 받을 수도 있고, 미용이 끝나면 몸과 마음이 새로 태어날 수도 있다. 이렇게 섬세하고 특별한 작업을 어떻게 아무에게나 맡길 수 있단 말인가.
재작년 겨울, 항암 때문에 머리가 모두 빠지고 작년 여름부터 새로 자라나기 시작했는데 전체적으로 같은 길이로 자라나다 보니 김병지 축구선수 헤어스타일 같은 머리가 되었다. 중간에 한번 다듬어 주어서 그때는 그럭저럭 괜찮았다가 또 몇 달이 넘어가니 이번에는 연예인 덱스 비슷한 헤어 스타일이 되었다. 잘 생긴 그에게는 어울릴지 모르나 달덩이 같은 나에게는 얼굴형을 더욱 부각시키는 스타일. 모근에 힘이 있는 반곱슬인데 머리가 짧으니 더욱 붕 떠서, 자고 일어나면 사자 갈기가 연상된다. 게다가 새치까지 많아져 총체적 난국인 상태.
펌, 염색, 컷 모두가 시급하나 건강에 안 좋은 펌, 염색은 최대한 미루기로 하고 컷만 하기로 한다. 이사 온 동네를 오갈 때마다 갈만한 미용실을 찾아보았다. 일단 미용실 외관부터 본다. 별다른 건 없다. 그냥 ‘느낌’이 오면 일단 합격이다. 그다음 내부를 슬쩍 본다. 이왕이면 정리된 곳이 좋고, 주인장의 인상도 본다. 그것 또한 그저 ‘느낌’이다. 동네 맘카페에서 지역민들이 추천하는 미용실도 알아둔다. 거리와 가격대도 대충은 내 상황에 맞아야 한다. 미용실 하나 정하는데 이렇게 종합적으로 고려하기에 웬만하면 한번 정한 미용실은 바꾸지 않는다.
그렇게 ‘느낌적 느낌’을 찾아 헤매다가 드디어 한 곳에 마음이 갔다. 아무런 홍보문구 없이 하늘하늘한 흰색 커튼만 달려 있는 곳이다. 작고 네모난 흰 간판에는 까만 필기체로 ‘영연하다’라고 쓰여있다.
난 처음에 ‘영연하다’라는 말이 있는데 내가 모르는 말인가 싶어 사전을 찾아보았다. 알고 보니 미용실 원장님 이름이 영연이었다. 짧은 머리의 그녀는 볼 때마다 야구모자를 쓰고 있었다. 옷차림도 긴 팔 셔츠에 청바지. 이런 룩의 미용실 원장은 처음 본다. 그 자체로 신선하고 호기심이 생겼다.
시간이 나는 어느 날, 영연하다에 들어가 보았다. 데스크에 있던 영연 원장님이 벌떡 일어나 반겨주었다. 머리를 자르고 싶다고 했더니 예약이 다 찼다며 네이버 예약 서비스를 권했다. 알았다며 미용실을 나왔는데 벌써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벌떡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벌떡’ 일어나는 자와 일어나지 않는 자 두 부류로 나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맞이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벌떡 일어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만히 앉아있는 사람이 있다. 나는 주로 벌떡 일어나는 편이고, 그런 사람을 좋아한다.
그런데 네이버 예약을 하려고 보니 무려 삼일이나 예약이 꽉 찬 게 아닌가. 그녀의 실력이 검증된 거 같아 더더욱 예감이 좋았다. 며칠 뒤, 드디어 예약날이 되어 기대를 안고 미용실에 입장했다.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벌떡 일어나 내 손에 들고 있던 가방과 짐을 얼른 받아 구석에 잘 놓아준다. 언뜻 어린 사람인 줄 알았는데 가까이서 보니 30대 중후반으로 보였다. 이렇게 미용실 하나를 운영하려면 그 정도 나이는 되어야지 싶다.
어떻게 해드릴까요.
머리는 기르는 중이고요. 지금 묶고 다니는 중인데 풀어도 세련된 느낌이 났으면 좋겠어요.
심사하는 듯한 눈빛으로 내 머리를 한동안 뒤적이던 그녀는 난처한 표정이 되었다.
서너 달 뒤에 오시는 게 낫겠어요. 지금 상태에서 스타일을 내려면 숏 컷을 하는 수밖에 없어요.
으잉? 어떻게 온 미용실인데. 석 달이나 사자로 있기는 싫다.
그럼 매직펌이라도 해주세요. 머리가 너무 붕 떠요.
영연 님은 또 머리를 저었다.
이런 반곱슬 모질이 스타일 내기에 얼마나 좋은데요. 에센스 말고 컬크림을 발라보세요.
그럼 앞머리를 조금 다듬을게요.
아뇨. 그냥 기르는 게 지금 머리스타일에 더 잘 어울려요.
그럼 머리는 자르지 않고 펌을 할게요.
이 상태에서 앞머리만 펌 하면 너무 따로 놀아요.
이것은 창과 방패의 대결인가. 어쩐지 오기가 생겼다.
그럼 전체적으로 다듬기라도 해 주세요.
안 돼요. 더 기른 다음에 컷을 해야 예쁘게 나와요. 이 상태에서 다듬어 준다는 데는 이상한 데에요.
하마터면 ‘돈 낼 테니 아무거나 해주세요!’라고 말할 뻔했다. 스타일이고 뭐고 간에 변화가 필요해요!
그러나 나는 점잖은 사람이므로 이렇게 돌려 말했다.
머리가 너무 답답하고 지저분한 것 같아서요. 뭐라도 했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여전히 웃고 있지만 더더욱 힘주어 말한다.
고객님이 그렇게 느끼는 거지 보기에는 이뻐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지금으로서는 숏 컷 밖에 할 수가 없어요. 그 스타일을 원하시는 건 아니잖아요.
하아… 단호하다. 이렇게 단호할 수가 없다. 어쩔 수 없이 머쓱해진 얼굴로 일어났다. 그녀는 예의 빠릿빠릿한 몸짓으로 내 가방을 건네주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입장하자마자 퇴장이시네요.
놀리는 건지 위로인지 모를 말에 영연 님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아까는 못 봤는데 그녀의 콧잔등에 ‘말괄량이 삐삐’ 같은 주근깨가 쪼르륵 올라와 있다. 그러고 보니 삐삐처럼 꿈과 모험을 사랑할 것만 같은 얼굴이다.
그러네요. 이런 적은 처음이에요.
미용실 고르는데 넉 달이 걸렸는데 오분 만에 퇴장당했다. 이렇게 까지 거절을 내리 당하기도 처음이다. 그런데 어쩐지 기분이 하나도 나쁘지 않았다. 삼 개월 뒤에 기필코 영연 원장님에게 컷을 받으리라, 결의를 다지며 집으로 향했다. 이 동네를 떠날 때까지 미용실을 바꾸지 않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