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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뮤 Jul 10. 2024

48살에 시작한 필라테스 한 달 후기

오늘은 필라테스 초심자 패키지의 마지막 날이다. 1:1과 1:4 수업이 섞인 총 8회의 수업을 소화하는데 꼬박 한 달이 걸렸다. 처음 왔을 때도 그랬지만 여기만 들어오면 마치 엘프계에 온 것만 같다. 다홍빛 은은한 조명에, 살짝 졸린 음악이 천천히 흐르고, 비현실적으로 작은 얼굴에 기다란 팔과 다리를 가진 세 여신이 앉아있다.


엘프와는 한참 거리가 있는, 인간미 넘치는 내가 까치발로 들어가자 길고 검은 머리의 한 여신이 일어난다.

“뮤뮤 회원님,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내 이름. 선생님들은 성 떼고 이름에 '님'자를 붙여서 불러주시는데 이름만 불려도 이렇게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다니.




오늘은 ‘리포머’라는 기구에서 진행하는 수업이다. 몸풀기부터 들어간다. 양팔을 쭉 뻗어 긴 스트레칭봉을 받쳐 들고 왼쪽 오른쪽 허리를 늘려가며 상체를 풀기 시작한다.

“봉을 머리 뒤로 넘겨 팔을 폈다가 굽혀보기를 반복합니다.”

- 리포머


선생님은 팔을 뻗고 구부릴 때마다 뒤통수에 봉이 전혀 닿지를 않는데, 나는 봉이 번번이 뒤통수를 치게 된다. 그 바람에 저절로 목이 앞으로 굽는다. 날개뼈 근육에 집중하라는데 집중이고 뭐고, 자꾸 봉에 치이는 머리통을 가눌 길이 없다. 어김없이 날아오는 선생님의 지적.

"목은 똑바로! 그 자세에서 뒤로 10번 보내주기!"


역도 하듯이 봉을 어깨에 올린 상태에서 뒤로 10번을 보내주는 건데, 양팔에 아무리 힘을 줘봤자 제자리걸음이다. 아니, 이게 되는 동작인가. 의문을 품고 선생님을 보니 같은 자세에서 시원시원하게 봉을 뒤로 반복해서 보낸다.


하, 팔이 저렇게 멀리 뒤로 간다니. 뻣뻣한 내 어깨 탓이다. 2년 넘게 등산에만 집중했더니 아무래도 상체가 많이 굳었다. 그럼 하체는 괜찮고? 다음으로 넘어간 하체 운동에서도 진땀 흘리기는 마찬가지. 리포머에 누워 발끝, 아치, 발뒤꿈치 번갈아가며 풋바에 올리고 다리를 폈다 굽혔다 반복하는데, 초반에는 할만하다가 3세트가 넘어가자 허벅지 안쪽이 아파온다.


이후로도 선생님의 부드럽지만 단호한 지시가 연달아 떨어진다.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있고 안정적이며 목소리에 강약을 줄 때마다 내 근육도 절로 긴장과 이완을 반복한다.


"무릎에 커피잔을 올려놓았다고 생각하고 다리를 펴봅니다."

"아무도 모르게 살짝 올려줍니다."

"목을 경첩처럼 꺾습니다."


선생님의 지도에 충실히 따르지만 쉽지 않다. 바다에 빠져서 살기 위해 허우적거리는데 점점 심해로 빨려드는 기분이다. 그 와중에도 선생님의 동작 지시가 어딘가 시적이라고 생각한다.


커피잔을 올려놓고, 아무도 모르게 살짝, 목을 경첩처럼 꺾고… 응? 경첩처럼 꺾는 건 좀 괴기한데. 내 집중력이 흐트러진 것을 눈치챘는지 선생님이 갑자기 카디건을 벗어던졌다.


검은색의 탑과 핫팬츠를 입은 선생님의 다부진 몸매에 동공이 커진다. 와! 여신이 아니라 여전사였다! 납작하고 단단한 배와 근육이 알차게 붙은 허벅지를 훑느라 힘든 자세를 유지하는 와중에도 내 눈동자는 분주하다. 엉덩이는 완벽한 구를 이루며 탄력 있게 올라붙었다. 동시에 거울 속 내 모습이 비교된다. 머리를 산발한 채 초첨이 흐려진 나의 모습은 허옇고 물렁한 가래떡 같다.

'커피잔을 올려놓은 것처럼 섬세하게 근육을 만드는데, 저런 몸이 될 수밖에.'




"자, 다시 후~ 내뱉고. 엉덩이를 뽑아준다는 느낌으로."

선생님한테 제대로 배우는 스쾃 자세는 집에서 해온 것과 너무 많이 달랐다. 스쾃을 잘못하면 무릎이 망가진다는 얘기를 듣고는 자세에 자신이 없어 그다지 열심히 하지 않았다. 무언가 열심히 하지 않은 자신을 칭찬하기는 처음이다.  


이래서 전문가에게 배워야 하는구나 싶다. 유튜브를 보며 혼자서 최대한 비슷하게 한다 해도 승모근이 올라와 있거나 몸이 틀어져 있는 등의 자세는 누군가 지적을 해줘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다.  또한 엉덩이가 아프려면 어떤 자세를 해야 하는지, 이두와 삼두를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 운동효과를 높이기 위한 바른 자세는 초보자일수록 전문가에게 직접 배우는 것이 좋다는 것을 실감하는 중이다.


무엇보다 홈트레이닝 중에는 근육이 파르르 떨리는 걸 참고 끝까지 버티지를 못하지만, 선생님 앞에서는 이를 악물고라도 어떻게든 하고 만다. 엄마 앞도 아닌데 해내는 모습을 보이고 싶다. “좋아요!”라는 칭찬을 들으면 상 받은 아이처럼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이 얼마 만에 듣는 칭찬인가. 48살의 주부는 어디서도 칭찬받기가 힘들다. 위아래로 볼맨 소리만 듣기 쉬운 나이가 아닌가 싶다.




영원할 거 같은 버티기 시간이 끝나고, 마무리는 스포츠 마사지 시간. 나 같은 초보자들이 근육이 뭉치는 걸 막기 위해 선생님이 직접 근육을 풀어준다. 마사지샵에서 받는 것 같은 나른하고 기분 좋은 마사지를 생각하면 오산이다. 근육 하나하나가 무자비하게 잡아 뜯기는 통에 시원함보다는 고통이 더하다. 이 시간은 엘프가 아닌, 지옥에서 온 악마에게 사지를 뜯기는 느낌.


선생님은 나를 엎드리게 하더니 어깻죽지를 발로 지그시 누른다. 점점 숨이 조여와서 이러다가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손바닥으로 다급하게 바닥을 두드렸다.

"컥컥, 숨을 못 쉬겠어요."

"네. 숨쉬기가 힘들 겁니다."

담담하게 말하는 선생님의 표정, "살려는 드릴게."이다. 별수 없이 맞은편 어깻죽지도 입 다물고 내어드린다.  설마 죽이기야 하겠냐는 믿음까지 필요하다. ‘I trust you…’


이렇게 근육을 '아무도 모르게 ' 조심스럽게 만들고, 대차게 풀어줘야 하는 걸, 그동안 나는 돈 아낀다며 무엇을 한 건가. 3년 전 암 수술 후에 병원에서는 '내가 살 길은 이것뿐'이라는 각오로 근육을 3킬로 만들라고 당부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선생님에게 직접 배워보니 그동안 근육 운동한다고 깨작거린 건, 그저 대충 밀가루 반죽을 치대는 수준과 다를 바 없었으니 진작에 전문가를 찾을 걸, 뒤늦은 후회가 밀려든다.




발가락까지 뜯기고 난 후 엘프들 사이를 빠져나와 씩씩하게 하루를 시작한다. 머릿속에서는 해야 할 들이 리스트 업 되고, 당연히 그 일들을 해낼 수 있을 거라 자신하게 되는, 알 수 없는 그런 힘을 운동 후에는 얻을 수가 있다.


나도 꾸준히 하면 선생님 같은 탄탄한 몸을 갖게 될까. 핸드폰으로 원장님의 계좌에 석 달 치 원비를 송금한다. 현금으로 석 달 치를 결제하면 20% 혜택이 있기 때문. 이제 내 앞에 아름답고도 험준한 3개월의 시간이 놓여있다. 이두와 삼두근이 잘 붙은 팔로 글을 쓰고 있는 내 모습을 떠올려 본다. 딴딴하게 붙은 배가 자랑스러우니 크롭탑을 입어야 할 것이다. 인생에서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최고의 내 모습이다.



커버사진- 필라테스 홈페이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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