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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뮤 Jul 17. 2024

이토록 다정한 기사님이라니

뒷산이 진녹색을 더하는 한여름의 어느 날, 동네 카페에서 동생과 마주 앉았다.

“언니가 이 동네 온 지도 벌써 반년이 돼 가네. 이사 와서 가장 좋았던 때가 언제야?”

어느덧 한 해도 반이 지났다. 돌이켜보니 고요한 산 밑의 생활에서도 반짝이던 순간들이 있었다. 작지만 명징한 행복을 주었던 순간은 모두 남과의 시간 속이었다. 흑백 영화 속 갑자기 등장하는 컬러장면과 같은 순간.


벌써 몇 달 된 일이야. 너무 더운 날인데도 등산을 감행했지. 땀에 흠뻑 젖은 채로 집에 다 왔는데 점심은 가볍게 샌드위치로 먹고 싶어서 빵가게까지 다시 걸어갔어. 너도 알잖아. 산 밑에서 살다 보니 뭐 하나라도 사려면 왕복 3~40분은 걸어야 하는 거.


적응되나 싶다가도 때로는 이게 너무 번거로워. 샌드위치 하나 들고 땡볕 아래를 걷는데 짜증이 나더라고. 그때 한 어린이가 나한테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넸어. 안녕하세요! 어어, 안녕하고 나도 엉겁결에 응수했지. 어디 가냐고 묻더라. 집에 간다고 했더니 안녕히 가세요! 하면서 손을 번쩍 들어 흔들어 주는 거야. 아이의 웃음이 햇살과 함께 정말 눈부셨어. 나도 아이만큼 크게 미소 지으며 너도 잘 가라고 대답했지. 순간, 짜증 가득했던 마음이 단숨에 다 씻겨버렸더라고.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하다는 말 있잖아. 그 말이 정말 실감되더라.



근래에 단골 정육점을 방문했다. 청년 두 명이 운영하는데 젊은 사람들이 웃으며 일하는 모습이 예뻐서 고기 살 일이 있으면 부러 가고는 한다. 불고기감을 고르고 계산을 마치려는 찰나, 카운터 뒤에 있던 사장님이 갑자기 "같이 하실래요?" 말을 건넨다. "네?" 하며 보니 큰 통 안에 뽀얀 젤 같은 것이 가득 들어있고 사장님은 장갑 낀 손으로 그 위를 탁탁 치고 있었다. ‘설렁탕 만드는 건가?’ 정확히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손바닥으로 두드리는 일인 것 같았다. "슬라임 놀이예요. 시간 되시면 해보세요." "아... 제가 지금은 볼 일이 있어서, 다음에 할게요." 가게를 나오자마자 후회했다. 재미있는 체험을 할 기회였는데, 문득 쑥스러운 마음에 도망치고 말았다. 사장님한테 좀 미안한 마음이었지만 나는 미소 짓고 있었다.


기억되는 남이 또 있다. 직업은 에어컨 설치 기사. 이사 온 집에 에어컨을 재설치해야 했는데, 시간을 잡아야 하는 통화부터 조금 남달랐다. 오전 11시로 시간을 잡고 통화를 끝낼 때 그의 인사는 "내일 봐요."였다. ‘내일 봐요라니. 보통 뵙겠습니다라고 하지 않나.’ 마치 옆자리 동료에게 인사하는 듯한 친근함에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다음날, 약속한 시간에 맞춰 입장한 기사님은 'god'의 손호영을 닮은 얼굴이었다. 특유의 활짝 웃는 미소도 비슷했다. 예상대로 나보다 훨씬 어린, 서른 전후반의 청년이었다.


“날씨가 참 좋아요.”

유난히 하늘이 새파란 날이었다.

“하늘 보셨어요? 정말 예뻐요.”

“네? 아, 네. 날씨가 좋더라고요.”

초면에 하늘을 봤냐고 묻는 기사님이라니. 그는 싱긋 웃더니 공구함을 열어 설치를 시작했다. 열심인 모습이 감사해서 간단한 간식과 커피 한잔을 내드렸다. 그는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가벼운 이야기를 건네왔고, 어쩌다 보니 아이들의 게임에 대한 얘기를 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게임을 점점 좋아하게 돼서 걱정이라는 나의 말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가 조절할 능력만 갖추면 그렇게 나쁜 거는 아닌 거 같아요. 행복한 순간은 누구라도 오래 가지고 싶죠. 그 마음을 이해해 주면 좋을 거 같아요."


그러면서 나에게 무엇을 할 때 행복하냐고 물었다. ‘무엇을 할 때 행복한가’ 너무나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인물에게 받은 질문이라 잠시 말문이 막혔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글쓰기였다. 부끄러운 일도 아닌데 글을 쓴다는 게 누군가 앞에서 쉽게 나오는 말은 아니다. '글'을 위대한 세계라고 정의 내리고 나는 한참 멀었다는 자격지심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손호영 님이 마치 '그 어떤 것도 나는 다 이해할 수 있어요'라고 미소를 짓는 바람에  "글 쓰는 시간을 좋아해요."라고 고백하듯 말했다.


그는 "오!" 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좋네요,“라고 미소 지었다. 무슨 글을 쓰느냐, 어디에 쓰느냐 이런 질문도, 뭔지 모를 야릇한 웃음도 짓지 않아서 좋았다. 그렇군요, 인정하는 느낌.


일을 마치고 기사님이 현관문을 나섰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감탄하듯 하늘을 한참 올려다보더니 천천히 길을 걸었다. 자기의 차량으로 가는지까지는 보지 않았지만, 모습은 마치 산책을 나선 것처럼 여유 있는 걸음이었다.

 '저 사람 혹시... 사장 아들인가?'


누군가에게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일상이었을는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꽤 인상적인 시간이었다. 왜 그 순간이 잔잔하게 좋았을까 생각해 보니 누군가가 내가 좋아하는 걸 궁금해하고, 관심 있게 물어봐줘서인 것 같다. 나에게 그런 흔치 않은 기분을 느끼게 해 준 손호영 님은 분명 남다른 매력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인간관계론>에서 데일 카네기는 '자신을 중요한 사람으로 느끼게 만드는 사람이 호감을 받는다'라고 말한다. 중요한 사람으로 느끼게 해주는 포인트는 바로 좋은 질문을 건네는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좋은 질문을 던질 때, 이 사람이 나한테 관심이 있나 생각하면서 하면서 자신도 그 사람에게 호감을 가지게 된다. 그 사람을 궁금해하는 작고 다정한 질문을 건네는 사람, 상대가 얘기를 많이 할 수 있게끔 해주는 사람, 이 사람이랑 더 얘기하고 싶은 마음을 만들어 내는 게 바로 좋은 질문의 힘인 것 같다.




“요즘은 정말 서로에게 인사를 안 하는 시대가 된 것 같아. 필라테스를 두 달 가까이해보니 이제 자주 보게 되는 얼굴들이 있거든. 30센티 옆에 앉아있어도 서로 절대 인사를 안 해.”

동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응수했다.

“맞아, 언니. 내가 다니는 학원도 그래. 서로 눈인사도 안 하지. 말 걸고, 다가가는 게 조심스러운 세상이야.”


하지만 나는 안다. 모두들 표정 없는 얼굴로 새침하게 도사리고 있지만 완벽한 고립을 즐기지는 않는다는 걸. 우리를 온전히 채워주고, 살아가게 만드는 건 누군가의 다정함과 관심이다.

이를테면 누군가로부터 명랑한 인사를 받는 것, 함께 하겠냐는 권유를 받는 것,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같은 질문을 받는 것. 그런 것들로 칠흑처럼 어두웠던 마음에 빛이 스며들고, 굳어지려는 슬픔이 부드러워진다.


남은 한 해 동안 또 누가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해올까, 누가 또 함께 하자고 말해줄까, 누가 또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물어봐줄까. 이름도 모르는 그들의 다정이 나를 또 다른 다정으로 이끌어 줄 것이다. 뜨거운 햇살 속에서 만난 그 아이처럼, 나도 그들에게 먼저 크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건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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