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로를 입으면 아무도 함부로 못하지
폴로가 뭐길래
“폴로를 입었는데, 아무도 함부로 못하지.”
귀를 의심했다. “폴로요?” 하고 되물었더니,
“그래요. 폴로. 나는 얘네들 꼭 폴로만 입혀 내보냈어.”
그 말을 할 때 원장님의 얼굴은 의외로 근엄했다. 확신과 자부심, 심지어 약간의 비장함까지. 그 표정을 랄프로렌 본사가 보면 감동해서 광고 모델로 쓰자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염색을 하러 들른 미용실이었다. 머리가 완성되기 전까지, 원장님의 손주 자랑을 도망갈 수 없다는 점만 빼면 편안한 공간이었다.
그날도 1시간 가까이 듣게 된 이야기는 예상보다 재미있었다. 고2, 고3 연년생 손주 형제가 모 외고에서 전교 1, 2등을 나란히 다툰다던가. 첫째는 UN 사무총장을, 둘째는 의사를 꿈꾸고, 담임선생님은 “서울대는 문제없다”는 말을 밥 먹듯이 한다고 했다.
“흠, 대단하군요.” 나도 모르게 그렇게 대답했지만, 사실 남의 자랑은 늘 약간 시큰둥한 법이다.
그러다 원장님이 꺼낸 영상 하나가, 내 자세를 바르게 만들었다.
형제는 교회 행사에서 기타를 치며 ‘별 보러 가자’를 불렀다. 박보검의 환생이 있다면, 아마 이런 모습일 것이다. 귀티 나는 이목구비, 주먹만 한 얼굴, 길고 반듯한 팔다리, 맑은 목소리.
그 모습에 내가 다 울컥할 지경이었으니, 외할머니는 오죽할까.
영상 속 관객석 어딘가에서 “와, 씨X, 쟤네 뭐야?”라는 고등학생의 음성이 들어있었다. 감탄이 과하면 욕으로도 표현된다는 걸, 나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형제는 이미 ‘고등학생’이라는 분야에서 만렙을 찍은 듯했다.
그리고 그 만렙의 갑옷이 ‘폴로’였다.
“난 꼭 폴로만 입혔어요. 폴로를 입었는데 누가 함부로 하겠어요.”
폴로가 그렇게까지 위엄 있는 브랜드였던가. 샤넬도 아니고.
미용실을 나오면서, 나는 ‘폴로’라는 옷에 담긴 의미를 곱씹게 되었다. 그리고 문득 떠오른 기억 하나.
7~8년 전쯤, 이제 세 살이 된 아이를 데리고 남편과 함께 부산 여행을 갔을 때였다. 남편 지인의 집에 초대받았고, 그 집 아이들이 입던 옷을 물려주신다며 박스를 꺼내주셨다.
“다 폴로예요. 저는 아무거나 입어도 애들 옷은 꼭 폴로로 입혀요. 그래서 이렇게 해외까지 나가서 돈 버는 거예요.”
“애들 폴로 입히려고 돈 버신다고요?”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얼굴에서도 이상할 만큼의 진심과 비장함이 느껴졌다. 나는 그 말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다. 그가 전하고 싶던 건 아마도, ‘내 아이는 이만큼 귀한 대접을 받는다’는 메시지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수단이 ‘폴로’였던 거다. 그 이후로 폴로 옷을 입은 아이들을 볼 때마다, 나는 J씨의 자부심을 떠올렸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폴로 얘기가 나온 김에 한 사람 더 떠오른다. 대학교 3학년 때, 나는 학교 프로젝트에 참여했다가 교직원 B와 친해졌다. 나이 차도 얼마 안 나고 허물없이 지낼 수 있는 분위기였다. B는 키가 작고 마른 체형이었다. 피부는 창백할 정도로 하얗고, 어딘가 병약한 분위기를 풍겼다. 드라큘라 백작을 떠올릴 정도로. 가끔 영화도 보고, 밥도 먹고, 그렇게 몇 번 만나는 사이였는데, 그는 약속할 때마다 옷을 사러 들렀다. 장소는 늘 압구정 폴로 매장.
세 번째쯤 되어서야 나는 눈치챘다. 그는 폴로 셔츠만 입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 시절 브랜드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폴로든 구찌든 다 똑같아 보였던 스물두 살. 그래서 그의 ‘폴로 고집’도 그저 독특한 취향쯤으로 여겼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는 나에게 ‘자기가 무엇을 입는 사람인지’ 보여주고 싶었던 거라고.
작고 왜소했던 몸 위에, 누군가의 눈에는 멋진 갑옷처럼 보이기를 바란 건 아닐까. 아무도 함부로 못 하도록, 스스로에게 걸친 신념 같은 것.
폴로는 클래식하면서도 올드하지 않고, 빈티지하면서도 세련됐고, 정장을 입은 듯 차려입은 느낌을 주면서도 스포티하다. 모델 김원중이 세상에 하나의 옷만 남겨야 한다면 폴로를 택하겠다고 말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미용실 원장님, J씨, 그리고 B에게 폴로는 그런 이미지 이상의 것이었다. 단순한 옷이 아니라, ‘나를 보호해주는 갑옷’이자 ‘내 아이를 대변하는 언어’였다.
물론 그 믿음은 조금 순진하다. 셔츠 하나 입는다고 세상이 나를 다르게 대할까.
그러나 또 생각해 보면 나도 폴로셔츠 입은 남자는 괜히 멋있어 보이고, 최근 월간지에 쓸 프로필 사진을 고르면서 결국 내가 보낸 사진도 폴로셔츠를 입은 사진이었으니...
모쪼록 폴로와 폴로를 입은 모든 이들의 건투를 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