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드래곤 볼> 속 오공이 되고 싶다
“지구인들아, 부탁해. 나에게 조금만 기를 나누어 줘.”
만화 <드래곤 볼>의 주인공인 오공이 우주최강의 상대를 물리치기 위해 두 손을 하늘 높이 들었다. 오공의 말에 응답이라도 하듯 곧 여기저기서 그의 손끝을 향해 하얗고 번쩍이는 빛들이 모여들었다. 그러곤 천천히 원이 만들어 지기 시작하는데 처음엔 작은 구슬만 했던 그 원은 점점 커져서 마침내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가진 최강무기, 원기옥이 되었다.
그 뒤 동생과 싸움놀이를 할 때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손을 뻗고 외쳤다.
“부탁해, 얘들아. 기를 나누어 줘.”
동생과 싸움놀이를 즐겨하긴 했지만 사실 어린 시절의 나는 허약하고 비실대던 아이였다. 조금만 차를 타도 멀미를 했고 달리기 시합에선 매번 거꾸로 1,2등을 다투었다. 손가락 또한 유난히 하얗고 가늘어 어른들은 종종 그 손으로 무얼 해 먹겠냐 하며 혀를 찼다. 슬프게도 이런 몸보다 더 약한 게 있었는데, 바로 내 마음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 사소한 일로 시작된 따돌림을 일 년 여간 겪고 난 후 내 안에는 또래 관계, 인간관계에 대한 불안과 긴장, 불신이 생겼다.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스트레스를 받아 죽는다는 개복치처럼 유약하고 나약한 마음으로 여지껏 살아오기 위해 생존을 위해 일련의 과정을 통해 내게 새겨진 나름의 사고방식 덕분이었다.
일단 나보다 다른 이들의 생각과 느낌을 우선시 했다. 나와 의견이 달라도, 그들의 말에 내 감정이 상했어도 나보다 다수가 옳다고 생각했다. 내가 식견이 좁은 탓에 그들과 생각이 다르고 내가 뭔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들이 나를 비난하는 게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라도 해서 다수와 같은 편에 서고 싶은 게 내 바람이었다.
또, 철저히 내 사고와 행동을 검열하였다. 혹시 내가 내뱉은 말이나 한 행동이 돌고 돌아 다른 이의 비난을 받거나 기분을 상하게 하지는 않을지 고민을 하고 난 뒤에야 말을 했다. 그러다보니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속으로 삼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즉, 철저히 ‘눈치 보는 삶’을 살아온 것이다. 원래는 본인 중심적인 사람이 타인, 그것도 불특정 다수의 눈치를 보며 지내오는 동안 겪었던 수많은 스트레스와 갈등은 이루어 말할 수가 없다. 특히 학교를 졸업해 직장이라는 새로운 세계가 등장하자 혼란은 더욱 커져갔다. 연차는 계속해서 쌓여가는 데 나는 여전히 열 살 언저리 어디쯤에 머물고 있어 자꾸 어딘가에 소속되어야 마음이 편했고, 그런 나를 성인이 된 또 다른 내가 항상 못마땅한 듯이 바라보았다.
이렇듯 되다만 어른이지만 그럼에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어쩌면 이러한 일들이 나를 바꿔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진 채로. 하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형성된 사고방식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나는 ‘눈치 보는 사람’에서 ‘눈치 보는 엄마’가 되었다. ‘엄마라면 으레 이래야지.’ 하는 사회의 시선에 맞추어 나를 더 몰아세우고 예민해져갔다.
이런 나에게 첫째 아이의 adhd 판정은 나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일이었다. 그동안 간신히 버티던 것이 더 이상은 그 중압감과 압박을 못 이겠다는 듯 무너졌다. 웃음도 잃고, 말도 잃은 채 마음 속으로 끊임없이 소망했다.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고 싶어.’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온 아이가 웃는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엄마, 내가 왜 태어났는 줄 알아?”
“아니. 왜 태어났는데?”
무심한 내 말투에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의기양양한 얼굴을 한 아이가 웃으며 답했다.
“엄마 보려고 태어났지.”
아무렇지 않은 듯 방에 가서 얼른 눈물을 훔치며 생각했다. 사라져야 할 게 아니라 살아져야겠다고, 그래서 아이들에게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고 말이다. 더 이상 일에도 세차게 흔들리며 사는 건 싫었다. 단단하게 잡힌 중심, 어른들이 말하던 뱃심을 갖고 싶었다.
‘내공이 필요해.’
그러자 퍼득 어린 시절 만화 속 주인공인 오공이 모으던 원기옥이 생각났다. 원기를 조금만 나누어 달라면서
그는 지구상의 다른 생명체로부터 조금씩 원기를 받아 큰 힘을 만들어냈다. 본래의 나는 비실대고 나약하지만 그럼에도 다른 것들로부터 힘을 얻을 수 있다면 더 이상 쉽게 무너지거나 휩쓸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다시 일어나 엄마의 길 위에 섰다. 여의주를 모으기 위해 길을 나섰던 오공처럼 나 또한 내공이 있는 엄마,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원기옥을 모으는 여정을 시작한 것이다.
"모두들 부탁해. 나에게 조금만 기를 나누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