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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소년 Feb 26. 2023

본가에서 기르던 강아지를 떠나보내며 든 단상

우린 강아지만큼이라도 가족같은가

올해 8살 된 아이가 작년까지 가족을 주제로 그리던 그림엔 항상 본가에서 기르던 강아지가 함께 있었다. 올해, 가족 그림에서 강아지가 빠지면서 비로소 녀석이 무지개다리를 건넜다는 사실이 체감됐다. 이쯤 되면 아이도 나름의 방식대로 강아지를 하늘나라로 보내는 의식을 치른 것일 게다.


작년 12월, 그렇게 ‘삼식’이라는 말티즈종 강아지(성인 견이지만 자그맣기에 강아지란 표현이 더 어울린다)가 16년 만에 우리 곁을 떠났다. 사람의 나이로 치면 90살이 넘었을 정도로 제명껏 살았으려나. 하지만 녀석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1년째니, 그전부터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가족과 함께 공유하던, 어쩌면 아버지의 냄새(?)는 우리보다 더 각인하고 있을 유일한 반려 동물이었다. 어느 정도 죽음이 예견되었을 때 어머니는 침대에서 녀석을 품 안에 두고 함께 잠을 청하곤 했다고 한다. 그날도 함께 잠든 사이 어머니는 직감할 수 있었다. 오늘 까지겠구나,라고.


어머니는 비교적 덤덤하게 삼식이의 죽음을 톡으로 알렸다. 순간 정적이 흐르면서 주마등처럼 녀석과 함께 한 시간들이 스쳐갔다. 더구나 아이가 생기면서 항상 후순위로 밀렸던, 그래서 때론 천덕꾸러기로 전락해 버릴 수밖에 없었던 녀석의 모습이 안타깝게 상기됐다.


그리고 수일 내 각자의 방식으로 녀석의 죽음을 애도하며 장례를 치르기 위해 업체를 물색했다. 관련법상 도심에 존재할 수 없는 근교의 한적한 산골로 들어가 녀석의 싸늘한 주검을 마주했다.


슬픔은 항상 아무렇지 않을 거라고 방심한 순간에 복받치는 눈물로 허를 찌른다. 아버지의 임종을 지켰던 그때도 좀 전까지 생명의 박동과 함께 느껴지던 아버지의 온기가 사그라져 감을 느끼며 비로소 죽음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녀석의 몸도 차갑게 굳어 있었다. 끝까지 만지기가 두려웠지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인사를 나눠야겠단 생각에 잠시 만졌던 그때 감촉이 며칠간 잊히질 않았다. 그렇게 녀석과 함께 한 16년의 시간을, 모두의 기억을 불로 승화했다. 한 줌의 재는 녀석이 무지개다리를 건넜다는 증표로 추려졌다.


그렇게 서너 달이 지났다. 사람을 화장하는 데 연고가 없는 곳에서 절차대로 진행한다면 대략 100만 원가량의 비용을 치렀던 걸로 기억한다. 강아지를 화장하는 덴 25만 원 정도가 들었다.

죽음을 직감해 서로를 보듬고, 마지막을 함께 보낼 수 있는 가족이 몇이나 될까? 어떤 금액으로 사람이, 강아지가 얼마나 가족 같은 지를 얘기할 순 없겠지만, 다만 강아지의 1/4 만큼이라도 우린 서로에게 얼마나 가족 같은 지.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과 상념에 젖어 있을 때, 아이가 웃으며 새로 그린 그림을 보여준다. 아이가 그린 그림에 다시 삼식이가 등장했다. 할아버지와 함께 하늘나라에 있는. 아이도 아빠가 왜 이렇게 칭찬을 하며 한참을 웃음 짓고 있는지 어렴풋이 아는 것 같았다. 잘 가 삼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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