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파키스탄에 발령받을 당시 코로나가 창궐했던 시기라 남편이 먼저 3월에 파키스탄에 오고 우리 가족은 8월에 신학년 시작에 맞추어 오게 되었다. 남편과 떨어져 있을 동안, 남편은 한국인 회사 동료들과 함께 우리 아이들이 다닐 학교를 알아보았다.
가족을 동반했던 회사 전임자들은 미국국제학교인 ISOI(International school of islamabad)와 영국 시스템을 따르는 셰이크자이 두 학교에 보내었었기에, 남편과 회사 동료들은 두 학교를 가 보았던 것이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나중에 지내다 보니 현지 사립학교들도 있었다.)
구글에 나와있는 셰이크자이 학교(좌), ISOI(우) (출처 : 구글이미지)
우리는 두 학교 중 미국 국제학교인 ISOI에 우리 아이들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미국국제학교인 ISOI는 학비가 1인당 연간 2만 4천 달러(약 3000만 원) 정도였고, 입학 시에 발전기금을 따로 1인당 6천 달러(약 700만 원)를 내야 했다. 파키스탄 수도에서 유일하게 인가받은 국제학교로, 원어민 선생님들이 많으며 미국 교육시스템을 따른다.
그리고 아이들이 이 학교에 다니면서 알게 되었지만, 학부모들이 대부분 각국의 대사관이나 국제기구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며 유럽국가 사람들이 많고 선진국 대사 자녀들도 꽤 있었다.
영국 대사관의 경우, 이 학교 이외의 다른 학교는 자녀들이 다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영국 아이들은 모두 ISOI에 다녔다.
ISOI는 학비가 다른 학교에 비해 월등하게 비싸 대부분 우리 자부담으로 학비를 내야 했지만, 우리는 아이들의 영어를 위해서라면 그것을 감안하고 보내기로 했다. (학비가 셰이크자이의 3배 정도이고, 당시엔 몰랐지만 나중에 알게 된 다른 사립학교들의 20배 정도이다)
당시에 우리는 돈보다는 아이들이 국제학교에서 영어를 배우는 경험을 더 중요시했다.
미국국제학교인 ISOI 전경. 친환경적이다. 가끔 달팽이와 도마뱀도 볼 수 있다.
우리가 파키스탄에 온 날은 8월 11일이었는데, 그 당시 학교 개학이 8월 9일이었다. 그래서 개학한 지 며칠 지나서 우리 아이들은 국제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이미 새 학년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파키스탄에 도착한 다음날, 아이들과 함께 국제학교를 방문했다. 학교 선생님이 우리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영어와 수학 테스트를 하고 우리 아이들은 그 테스트를 통과하여 우리가 원하는 학년에 진학할 수 있었다. 우리는 입학서류를 내고, 학비를 냈다. 그리고 학생과 학부모 아이디카드를 만들기 위해 학교 사무실에서 사진을 찍었다.
국제학교 학생과 학부모 아이디카드. 아이디카드가 있어야 출입이 가능하다
외국은 학사시스템이 우리나라와 다르다. 우리나라는 새 학년이 3월에 시작, 일본은 4월에 시작하지만, 우리나라와 일본을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들은 8월이나 9월에 시작한다. 미국 시스템을 따르는 ISOI는 8월에 시작했다. 따라서 우리나라 아이들은 한 학기가 차이가 나게 되는데, 대부분 다른 영어권 국가에 살다가 오지 않는 이상 영어 때문에 한 학기를 낮춰서 입학한다. 우리 아이들 역시 한국에 있다가 입학했기 때문에 한 학기 낮춰서 첫째는 3학년, 둘째는 1학년으로 입학했다.
3학년 시간표(좌) , 1학년 시간표(우)
ISOI에는 영어를 처음 배우는 아이들을 위한 ELL(English Language Learner) 수업이 있었다. 우리 아이들은 처음에 둘 다 ELL수업을 들었다. 보통 ELL수업을 떼는데 2년이 걸리는데 둘째 딸의 경우 1년 만에 떼었고, 현재는 3학년인데 미국 5학년 정도의 영어실력을 보인다.
지금 우리 아이들은 과외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딸의 과외선생님이 10년 동안 국제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지만 본인이 가르친 아이들 중에 우리 둘째(딸)가 제일 똑똑하다고 했다. 둘째 딸은 수학은 물론이고 골고루 뭐든지 잘하는 경향이 있는데, 나의 어렸을 때가 생각났다.(자랑 같아 말하기 좀 그렇지만, 나는 초등학교 때 골고루 모든 과목을 다 잘해 학교에서 받은 상장이 수북이 발에 차였었고, 공부를 별로 안 해도 반에서 1등이었다. 게다가 어렸을 때는 얼굴도 예뻤었다; 엄마가 나를 매우 자랑스러워하면서 월반 시키고 싶어했지만 그당시는 월반 시스템이 없어서 못했다. 남동생은 누나는 어렸을때는 예쁘더니.. 라고 이야기하곤 했다ㅠㅠ)
첫째(아들)는 3학년으로 입학했는데 담임선생님이 남자 선생님이었고 미국인이었다. 그 선생님은 한국에서도 근무한 적이 있다고 하셨다. 3학년은 한 학년에 두 반이었는데 아이들은 한 반에 12명 정도였다.
둘째(딸)는 1학년으로 입학했는데 담임선생님이 파키스탄 여자 선생님이었다. 둘째 역시 한 학년에 두 반, 한 반에 12명 정도였다. 보조선생님들은 모두 파키스탄 여자 선생님이었다.
파키스탄은 예전에 영국식민지였기 때문에 영어를 많이 쓰고 영어와 현지어인 우르두어를 공용어로 쓴다. 하지만 오히려 파키스탄 사람들은 영어를 모국어처럼 쓰는 경우가 더 많아서 이때까지 나는 파키스탄에 살면서 우르두어를 들을 일이 거의 없었다. 파키스탄 사람들은 영어를 쓰면 엘리트처럼 인식하는 경향이 있기에 파키스탄 사람들은 모국어인 우르두어보다 영어를 쓰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며 영어를 많이 쓴다.
우리 아이들은 입학 첫날, 교실에서 담임선생님과 사진을 찍었다.
아들과 담임선생님(좌), 딸의 담임선생님과 보조선생님(우)
입학 첫날을 제외하고는 그 당시 코로나 시였기 때문에 아이들을 정해진 장소에서만 픽업해야 했다. 각반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나오면 학부모들은 강당 앞 공터에서 기다리다가, 아이들을 선생님으로부터 인계받는 형식이었다. 그래서 공터에는 여러 나라의 다양한 인종의 학부모들이 앞에서 모여 기다리고 있었는데, 나는 첫날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었다. 그런데 한국인처럼 보이는 어떤 학부모가 나에게 친절하게 웃는 모습으로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어디서 오셨어요?"
다양한 여러 나라 말, 특히 영어가 곳곳에서 외국 학부모들 사이에서 들리는 가운데 한국어를 들으니 반가웠다.
"한국에서 왔어요~"
"저는 대사관이에요. 남편이 ###(남편직급)이요. 남편분 회사가 어디신가요?"
"남편이 000에 다녀요"
"아~ 000에서 오셨군요~ 저희 아들은 3학년 #반이에요"
"아~ 저희 아들도 3학년 #반인데, 같은 반이네요~"
그분은 내가 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그분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키가 큰 한 분이 더 오셨다.
"안녕하세요"
그분도 한국말을 했다. 한국인이었다.
아까 나에게 먼저 자신감 있게 말을 거셨던 분이 그분에게는 약간 조심하는 듯하면서 나에게 그분을 소개해줬다.
"이분은 유럽 s국가 대사 부인이세요"
"아~ 안녕하세요. 저는 이번에 처음 왔어요. 우리 아이는 1학년 @반이에요"
"저희 아들도 1학년 @반이에요"
공교롭게도 한국인 두 분의 아이들이 모두 우리 아이들과 같은 학년 같은 반이었다.
그리고 첫날 자기소개를 하면서 이곳에서는 남편의 직업과 직위에 따라 부인의 직업과 직위도 따라간다는 것을 느꼈다. 남편의 회사 이름이 나의 회사 이름이었다.
나는 사실 남편과 사내커플이라, 남편의 회사 이름이 나의 회사 이름이 맞지만 그렇지않은 경우에도 남편의 회사 이름이 가족의 회사 이름이 되었다. 한국과는 다른 문화인 것을 느꼈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는 내 직업이 남편의 직업과 분리되어 나는 독립적인 존재라는 생각이 강했는데, 이곳에서는 남편에게 종속된 존재라는 느낌이 들어기분이 이상했다.하지만 이곳의 문화가 그러하면 이 또한 적응해야겠지.
코로나때 아이들 픽업 장소였던 강당 앞
그 다음 날, 아침에 아이들을 처음으로 학교에 등교시키고 나서 학교 정문인 게이트를 통과해서 나오는데(파키스탄은 위험국가이고 국제학교는 보안을 더욱 철저하게 해서 그런지 철문 두 개를 통과해야지만 학교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한국 엄마들이 모여있었다.
어제 알게 된 두명의 한국엄마와 또 다른 2명의 한국엄마가 있었다. 그 중에 한 한국엄마가 돌 때쯤 되어 보이는 아기를 어깨에 안고 있었는데 아기가 토를 했다. 다들 걱정하는 눈빛으로 아기를 병원에 데려가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외국인 한 명을 제외하고 나를 포함해 5명이 한국 엄마였다. 그런데 외국인 한 명이 끼니까 모두들 영어로 이야기하는데 세 명의 한국엄마들은 영어가 굉장히 유창했다. 그래서 아. 나도 이곳에서 영어를 배워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비록 외국인이 한 명밖에 없었지만 영어로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한국 사람들이 배려를 잘한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