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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한 Apr 18. 2024

다만 지는 것을 미뤄왔을 뿐

김혜진, "9번의 일"

어쩌자고 여기까지 온 걸까.
그는 생각했다.
당장 몇 주 뒤면 아들이 진학할 대학에 예치금을 내야 했다. 봄이 되면 등록금을 내야 하고 기숙사 비용과 생활비도 마련해야 할 거였다. 아니, 그가 걱정하는 건 그런 게 아닐지도 몰랐다. 처음부터 이 길고 긴 싸움을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가 들었다. 이런 무모한 싸움이 아니고 다른 어떤 것에 이처럼 긴 시간과 노력을 쏟았어야 했다는 자책이 밀려왔다. 자신은 처음부터 이런 싸움을 감당할 만한 사람이 아니고, 지금껏 자신이 한 일은 패색이 짙은 이 싸움을 끝없이 유예하면서 다만 지는 것을 미뤄왔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캄캄한 산길을 오르는 동안 그는 아이를 생각했다. 몇 년 뒤면 준오도 자신의 일을 갖게 될 거였다. 그러니까 자신도 모르게 이끌리는 어떤 일을 발견하게 될 거였다. 그리고 그것이 진짜 일이 되는 순간, 얼마나 많은 것들이 달라지는지 알게 될 거였다. 그 일을 지속하기 위해 바라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는 일을 계속하면서,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바뀌어버리는지 깨닫게 될 거였다.

(*김혜진, "9번의 일")




잘하면 울 수도 있겠다 싶었다. 아이를 생각하고 아내를 생각했다. 그리고 일을 생각했다. '다만 지는 것을 미루고 단지 지속하기 위해 일한다'는 것은, 살아간다고 하는 대신에 죽어가고 있는 중이다 해야 맞는 게 아닐까. 그런데 나 역시 다르지 않구나 싶어, 서글펐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라고 곧바로 치고 드는 생각에, 울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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