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짓조각이 되어버린 피의자 신문조서의 슬픈 이야기
영화에 보면 범죄자들이 자기가 했다고 자백을 하기도 하고, 자기가 절대 안 했다고 부인을 하기도 하잖아요.(물론 입을 꼭 다물고 묵비권을 행사하는 범죄자도 있긴 하지만요..)
피해자 입장에서는 이게 궁금합니다. 과연 저 범죄자들이 하는 말들은 재판에서 증거로 쓰일까? 하는 것을요.
이 내용은 형사소송법 중에도 아주 어려운 내용 중 하나이기 때문에 길게 돌려 설명하기보다는 간단하게 설명하려고 합니다.
결론만 먼저 적어보면, 지금 현재 우리나라는 경찰 앞에서 그리고 검찰 앞에서 피고인(가해자, 수사단계에서는 피의자)이 했던 말들이 적힌 종이가 죄다 법정에서 휴짓조각이 되도록 바뀌었습니다.
수사기관에서 피의자가 했던 진술이 법정에서 휴짓조각이 되는 것은 피해자랑 어떤 상관이 있을까요? 대체로 피해자에게 불리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범죄자의 진술이 빠지면 사건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고, 무엇보다 짧은 재판 시간 동안 범죄자가 얼마나 많은 범죄를 저질렀는지 일일이 물어볼 시간적 여력이 없기 때문에 결국 가해자가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죠.
피의자 신문조서가 뭘까요? 경찰이나 검찰과 같은 수사기관 앞에서 피의자가 진술한 것을 적은 종이를 말합니다. 처음에는 이름이나 생년월일, 사는 곳, 가족관계 같은 것을 물어보고요. 본격적으로 사건이 어떻게 시작되어서 어떻게 끝난 것인지 자세한 상황과 등장인물들, 행동과 말들을 물어보고 답하고 물어보고 답하고 하면서 써 내려갑니다. 컴퓨터로 적으면서 피의자 신문(*자세히 캐 물어본다는 뜻)을 하는데 신문이 끝나면 이 종이를 싹 출력해 줍니다. 말 한 대로 잘 쓰여 있는지 확인할 수 있게 해 주는 거죠. 그렇게 다 읽어보고 '내가 말 한대로 잘 쓰여있어요.' 하면 종이 끝 부분에 이름을 쓰고 지장이나 도장을 찍습니다.
이렇게 국가기관에서 몇 날 몇 시간을 들여서 만든 종이를 법정에서 피고인이 '저 이거 인정 못하는데요?' 한 마디만 하면 다 휴짓조각처럼 사건 기록에서 빼 버리도록 법이 바뀐 것입니다.
원래는 안 이랬어요. 2022년 1월부터 이렇게 된 것입니다. 검경수사권 조정 때문에요.
2021년 12월까지는 경찰이 만든 피의자 신문조서와 검찰이 만든 피의자 신문조서의 증거능력이 조금 달랐어요.
경찰이 만든 피의자 신문조서는 피고인이 법정에서 '저 이거 인정 못하겠습니다' 한 마디에 기록에서 빠졌지만, 그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검찰이 만든 피의자 신문조서는 피고인이 아무리 법정에서 인정 못하겠다 하더라도 '자기가 읽고 이름 쓰고 도장이나 지장 찍은 것이 맞다'라고 하면 증거로 쓸 수 있었어요. 그래서 범죄를 계속 부인하거나 억울하다고 주장하는 피의자가 있으면 기소하기 전에 검찰에서 피의자 신문조서를 자세하게 받아 두었고, 이게 별문제 없이 증거로 쓰일 수 있었거든요.
그런데 2019년 민주당이 패스트트랙으로 통과시킨 검경수사권조정 (형사소송법 등 여러 법들을 한꺼번에 개정한 것)으로 인해, 2022년부터 경찰이 만든 피의자 신문조서와 검찰이 만든 피의자 신문조서는 똑같아졌습니다. 그래서 피고인이 법정에서 인정 못하겠다고만 하면 모두 증거로 쓰일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죠. 왜 이렇게 했냐고요? 표면적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예요. 하나는 피고인의 방어권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판중심주의(*재판 오기 전 만들어진 증거 말고 재판 자체에서 나오는 진술과 증거를 바탕으로 재판을 해야 한다는 입장)를 강화한다는 것이었어요.
피의자 신문조서는 몇 가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사건이 일어난 비교적 초반에 이 피의자 신문조서를 받기 때문에 범죄자의 기억이 왜곡되거나 자기 합리화가 많이 진행되기 전에 생생한 진술을 받아둘 수 있고요, 어떤 점을 인정하고 어떤 점을 부인하는지가 서류로 드러나기 때문에 사건의 쟁점을 파악해서 신속하고 정확한 재판을 하는 데 도움이 되었죠.
외국은 범죄자의 수사기관에 대한 진술을 어떻게 재판에 쓰고 있을까요? 우리나라와 법체계가 많이 다르긴 하지만 미국을 먼저 보면, 미국의 경찰이나 검찰은 피의자 신문조서와 같은 문서를 꼭 만들어야 하는 의무는 없어요. 그렇다 하더라도 범죄자가 수사기관에 한 진술, 특히 범행을 자백했다거나 한 것들은 재판에서 중요한 증거로 쓰이고 있습니다.
독일은 우리나라 법의 뿌리라고 할 수 있어요. 독일법을 일본이 들여왔고 식민지를 거치며 우리나라에 그 법들을 전달했기 때문이죠. 그 독일에서도 이 피의자 신문조서를 어떻게 증거로 쓸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점점 신문조서라는 종이뭉치에 대한 증거능력을 줄여나가는 것은 맞아요. 신문조서에는 진술의 요지 위주로 적기 때문에 진술의 원래 뜻이 왜곡될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그래서 최근 독일은 범죄자가 수사기관에서 진술하는 모습을 찍은 '영상녹화물'의 증거능력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있어요. 영상녹화물은 처음부터 끝까지 찍히는 것이라 조작가능성이나 편집 가능성이 거의 없고, 말하는 사람의 표정이나 몸짓도 함께 볼 수 있죠. 범죄자가 정신적 장애가 있는 상황이라면 그것도 영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어서 범죄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고요.
하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범죄자가 수사기관에서 진술하는 장면을 찍은 영상녹화물을 증거로 쓸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아예 법조문이 없기 때문이에요. 이 법조문이 생기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법원이 극장도 아니고 맨날 법정에서 스크린으로 피의자의 수사기관 진술 영상녹화물만 틀어 댈 거냐?'라고 말해요. 하지만 영상녹화물을 증거로 쓰는 나라들이라고 법정에서 맨날 그 영상들을 다 틀어서 보는 방식으로 재판하지는 않아요. 영상녹화물이 있으면 녹취록이 있고, 그 녹취록을 바탕으로 재판을 하면서 필요한 부분을 영상에서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하거든요.
결론적으로, 검경수사권조정으로 형사소송법이 바뀌면서 2022년부터는 피고인은 법정에서 말 한마디만 하면 그전에 경찰이나 검찰에서 자기가 했던 말이 적힌 피의자 신문조서를 휴짓조각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피해자는 이런 상황까지 대비해서 더 열심히 증거를 모으고 더 믿을만하게 진술을 잘해야 되는 것이죠. 피해자로 산다는 것은 참 쉽지가 않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도 이 부분이 개선되어야겠다고 생각되신다면 어디에 있으시건 목소리를 높여주세요. 우리나라도 범죄자의 수사기관에서의 진술이 합리적인 절차와 방법을 통해서 재판에 증거로 쓰여서 더 좋은 재판을 할 수 있도록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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