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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재미있게 놀아

거창한 목표는 없어

by 내복과 털양말

아들에게,


어제는 너무 피곤해서 네게 편지를 띄우는 시간을 놓쳐버렸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게 너무 여실히 느껴지는구나. 네 아빠와 그 이야기를 하다가 이제 “오늘도 재미있게 놀아”라는 출근 인사가 “오늘도 공부 열심히 해”로 바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했지. 네 아빠는 네가 초등학교 돼도 놀게 할 생각이라고 하더라. 엄마도 별로 초등학교부터 널 휘어잡을 생각은 없어. 실제로 초등학생이 되면 또 어떨지 모르겠지만 엄마아빠는 문간에서 3학년부터 공부 시작해야 한다 4학년부터 시작해야 한다 낄낄 이야기하다가 아침 인사를 마무리했지.


엄마는 거창한 목표는 없어. 네가 1학년이 되면 글자가 많은 어린이 소설책을 읽도록 유도하고 한두 줄짜리 일기를 쓰는 습관을 들여주는 게 목표야. 부담 없이 짧게 시작하다가 너도 생각이 많아지면 하고 싶은 말이 늘어나겠지. 그러면 쓸 문장도 한두 개로 끝나지 않겠지. 엄마는 그저 그 정도 생각 중이야. 여유가 좀 더 있다면 동네에 있는 도자기 학원을 권해주고 싶긴 하지. 무념무상의 집중 상태를 즐길 줄 알게 해주고 싶어서. 몰입의 희열이나 손끝으로 만들어내는 결과물을 눈앞에 딱 들고 볼 수 있는 것. 말을 이렇게 하니 굉장히 고차원 같지만 그냥 푹 빠져서 만들어낸 걸 보고 네가 이야! 하고 감탄할 수 있는 경험이지, 뭐. 오늘 뿌듯했다. 만들어낸 모양새가 마음에 든다. 이 정도의 짧은 일기도 쓰고 말이야. 네가 원하는 게 있다면 그걸 우선해서 고려해 보는 거.


앞으로의 사회는 엄마아빠 시대만큼 학벌의 중요도가 그리 높지 않을 거야. 사회는 천천히 변하니까 성인이 된 네가 살아갈 세상은 우리 때랑 천지차이라고는 하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변해있긴 하겠지. 다른 건 몰라도 공부란 건 본인에게 맞는 방식이 있더라고. 엄마도 휘몰아치는 공부의 물살에 같이 떠내려가지 않았어. 강남 8학군이란 말이 엄청난 임팩트가 있던 시절이 있었지. 아직도 그러려는지는 모르겠지. 그게 왜 그렇게 난리 칠 일인지도 엄마는 모르겠어. 엄마는 강남 8학군에서 학원 다니면서 자랐지만 대학은 재수했어. 그런데 재수하면서 느꼈지. 나한테 맞는 공부 방식이란 게 있다고. 학교 다니면서 분위기에 휩쓸려 학원에 다닐 때는 몰랐어. 재미도 없고, 잘하지도 못하고, 잘하고 싶은 목표 의식도 없었고. 엄마는 7월부터 독서실에 박혀서 혼자 공부했어. 제일 잘 되더라. 심지어 은근히 즐거웠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 외할머니가 엄마 대학 이름 꺼내면서 민망해할 일 없는 곳에 들어가 보니 강남 8학군 근처에도 안 가본 학생들도 수두룩하던걸. 물론 외고 출신들은 많긴 했지만. 엄마가 재수를 해봐서 그런지, 1년 그거 되게 큰 거 같지만 별것도 아니란 걸 알아. 엄마는 네가 너에게 맞는 공부 방식을 찾기를 바라. 하지만 경계도 중요하니까 하한선은 정할 필요가 있지. 7살 너를 두고 너무 나갔나? 여하간 어린 너를 공부라는 압박감으로 스트레스 줄 마음이 없어. 외국어도 너를 지켜보다가 네가 흥미를 느낀다 싶을 때 슬며시 노출시킬 거야. 네가 주도하는 생활과 공부를 주고 싶고, 주도할 수 있을 기본 능력치를 키울 기회를 주고 싶을 뿐.


주말에 너는 시범단 공연을 했지. 힘들다, 긴장된다 하더니, 잘만 하더구나. 넌 스스로에게 목표치가 높은 게지. 엄마아빠 둘 다 그런 스타일이라 어쩌겠니. 닮지. 사범님께 이 꼬물꼬물거리는 꼬맹이 잘 훈련시키느라 고생이 많으셨다고 감사인사를 드리니 사범님께서 그러시더라. 네가 많이 힘들어해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고. 하지만 그걸 다 이겨내고 사범님 예상보다 훨씬 잘 해냈다고, 장하다고. 공부도 별 다를 것 없어.


매일 작은 뿌듯함을 쌓아가자. 네가 많이 쌓은 것이 네 인생이 되더라. 엄마는 아둔하여 마흔이 넘어서야 이 단순한 진리를 알았네.



오늘도 날이 좋아.

재미있게 놀렴!



사랑해.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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