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_40. 영화 <노팅힐>
1.
기온이 뚝 떨어졌다. 역대 가장 더운 여름이 될 거라는 둥, 올해 여름은 11월까지 갈 거라는 둥 이런저런 얘기가 나왔지만 어쨌든 10월이 되니 거짓말처럼 쌀쌀해지기 시작했다. 11월이 거의 다 되어서까지 에어컨을 켜고 살 정도로 몸에 열이 많은 나조차도 아침저녁이면 반팔만 입기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터이니 이제 여름을 지나 초가을에 들어섰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나는 계절을 타는 편이다. 그것도 상당히. 더위가 한 풀 꺾이고 낙엽이 지는 시기가 오면 괜히 센치해지고 감성적으로 변한다. 겨울이 되면 정점을 찍는 그 감정의 시작이 바로 지금이다. 원래도 그렇게 거친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특히 이맘때쯤 더더욱이 심해진다. 솔직한 말로 꼴 보기 싫은 짓 많이 하는 때라는 뜻이다. 이럴 때면 선택하는 영화의 카테고리도 달라지곤 한다. 물론 극장에 걸린 영화들 위주로 감상하는 것은 똑같지만 이왕이면 조금 더 따뜻하고, 이왕이면 조금 더 사랑스러운, 혹은 다소 쓸쓸하거나 아련한, 그런 영화들을 고르곤 한다.
2.
내가 여러 번 사랑을 고백했던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가장 상징적인 장면은 아마 낙엽진 공원 걷는 두 주인공일 것이다. 가을날의 낙엽진 공원이 아닌 다른 계절의 다른 장소로 대체되었다면 아마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달라졌을 것이다. 영화 <만추>는 어떤가. 제목부터 '만추'인데, 내용 또한 가을을 배경으로 계절을 닮은 쓸쓸하지만 동시에 뜨거운 사랑과 이별을 다룬 영화다.
다소 뜬금없게 느껴질 수 있지만 영화 <비긴 어게인> 또한 가을 하면 떠오르는 영화 중 하나다. 직접적으로 의도하여 계절감을 드러내는 영화는 아니지만, 약간은 스산한, 그러나 아주 추운 것은 아닌, 그 미묘한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어떤 시기의 뉴욕을 만날 수 있어 이 맘 때쯤이면 한 번씩 떠오르는 영화다. 이런 사례를 생각해 보면 '가을 하면 떠오르는 영화들'에서 가을은 정확히 '여름과 겨울 사이 계절'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 너무 덥지도, 너무 춥지도 않은 선선한 계절감에서 느낄 수 있는 어떤 정취를 의미하는 것 같다. 영화 <노팅힐> 또한 마찬가지다.
3.
런던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한 영화 <노팅힐>은 여행 서적 전문 서점을 운영하는 윌리엄 태커와 유명 영화배우 애나 스콧의 사랑을 다룬 영화다. <노팅힐> 또한 직접적으로 가을이라는 계절을 밝히지 않지만, 여러 요소들을 통해 어떤 선선한 온도를 전달한다. 아마 가을에 느끼는 어떤 설렘의 많은 부분은 <노팅힐>을 감상했을 때 머릿속에 그려졌던 이미지에서 기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적어도 나는) 날이 차가워질수록 사랑을 갈구한다. 낙엽은 의외로 벚꽃보다 사람을 더 싱숭생숭하게 만든다. 그래서 봄보다 더 사랑의 따뜻함과 쓸쓸함이 어울리는 계절일지도 모르겠다. 가을은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뒤흔든다.
4.
앞서 말한 영화들에서 알 수 있듯이, 가을은 그런 계절이다. 시간은 끝을 향해 달려가고 남은 시간도 부족하지만 아직은 포기할 수 없는 계절이다. 한바탕 시끄러웠던 축제의 시간이 지난 뒤, 이제는 다소 차분한 마음을 가지고 침체된 감정을 정돈할 수 있는 계절이며, 눅눅하고 습하지 않게 비교적 쾌적한 조건에서 새로운 관계를 시작할 수 있는 계절이자, 날이 슬슬 쌀쌀해지는 만큼 마음을 따뜻하게 데울 준비를 하는 계절이다. 그것이 가을이다. 갈수록 가을이라는 계절의 존재감이 희미해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매년 가을이 기다려지는 이유고, 그 정취를 담은 영화를 찾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