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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현실에 직면하다.

하늘을 품은 남자와 사는 이야기 (5)

by 도럽맘

이런 말이 있다. “미국 공항에서 누가 마중 나왔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직업이 결정된다.”


우리는 이민자가 아닌 유학생이었기에 직업이 결정될 일은 없었지만, 전혀 아는 사람이 없는 낯선 땅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누구냐는 중요했다. 공항에는 안 목사님이 보내신 한 남자 전도사님이 나와 계셨다. 어색한 첫인사를 나눈 뒤, 전도사님은 우리를 차에 태우고 어디론가 향했다.


도착한 곳은 집을 구해야 하는 아파트 단지였다. 전도사님은 지역 신문을 펼쳐 ‘rent’라고 적힌 아파트 광고를 찾아 주소를 확인한 뒤, 우리를 그곳으로 데려가셨다. 몇 군데를 둘러본 끝에, Bellflower라는 동네의 작은 아파트에 짐을 풀었다.


가진 전 재산은 고작 6천 불. 아파트 계약금을 내고, 1996년식 중고 일본차 파란색 혼다 어코드를 3천 불에 구입하고 나니, 손에 남은 돈은 몇 달러뿐이었다.


미국에 도착한 지 단 이틀 만에 앞으로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지라는 현실이 우리를 덮쳐왔다. 심각한 상황이었다. 남자의 가족도, 내 가족도 경제적으로 도와줄 수 없는 형편이었기에, 우리는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했다. 문제는, 유학생 신분으로 미국에서 일을 하는 것은 불법이라는 것. 순간 앞날이 캄캄해졌다.


감사하게도 교회에서 살림에 필요한 모든 물건을 마련해 주셨다. 냉장고, 식탁과 의자, 전자레인지, 2인용 소파, 텔레비전, 서랍장, 매트리스, 식기물건 등.. 첫날 월마트에서 산 물건은 휴지와 이불 그리고 배게 정도뿐이었다. 또 나는 교회에서 예배 반주를 하며 약간의 사례비를 받을 수 있었고, 교회 성도들의 자녀들에게 피아노 레슨을 하며 조금씩 수입을 마련했고 남자 또한 학교에서 짧게나마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빠듯하게 아파트 비용과 생활비를 감당하며 하루하루를 버텨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가 가진 돈은 단 2달러뿐이었다. 쌀도 한 끼 먹을 분량만 남아, 그마저도 거의 바닥을 보이는 상황.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든 버텨내야 했다. 돈이 없음에 이렇게 큰 불안함과 절망감을 느껴본 건 나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결혼 전에도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런 두려운 마음이 들 만큼 힘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르바이트 얼마든지 가능했고 레슨과 연주도 언제라도 원하는 만큼 할 수 있었기에 돈을 벌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는 현실이 내게는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절망적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한국 유학 시절, 비슷한 경험을 미리 해본 남편은 비교적 담담한 모습이었다. 물론, 사랑하는 아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한다는 것은 그에게 또 다른 고통으로 다가왔지만 말이다.


타지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익숙했던 것들을 하나둘 포기하며 사는 것이었지만, 나는 그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미국에 와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한국에서 당연하게 누리며 살았던 것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었는지를.


더 이상 먹을 쌀조차 남아 있지 않을 때, 앞날이 캄캄하게 느껴졌다. 그때 안 목사님의 사모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잠시 한인 마트로 나오라는 연락이었다. 마트에서 만난 사모님은 나를 보자마자 카트를 밀며 말했다.


“필요한 것들 다 담으세요.”


그날, 나는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신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했다. 미국에서의 생활은 결코 쉽지 않았지만, 이제 돌이켜보면 그것은 나를 선교사로 준비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이렇게까지 아프고, 이렇게까지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던 이유. 결국, 오로지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시고, 진정한 삶의 가치를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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