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품은 남자와 사는 이야기 (4)
모두가 놀라는 눈치였다. 갑작스러운 결혼, 선교사 훈련원 입소, 그리고 미국 유학까지… 나조차 믿기 힘든 변화였으니, 주변 사람들은 얼마나 놀랐을까.
남자와 나는 선교사 훈련원을 마친 후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미국으로 가기 전에 암 투병 중이신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고, 중국에서 미국으로 가려는 계획이었다. 남자의 고향은 하룻 밤이면 배로도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여서, 우리는 김포에 있는 김포 대명항에서 배를 타고 중국 단둥으로 입국하기로 했다.
입시 준비 때 사용하려고 샀던 야마하 키보드도 중고로 팔아 유학 자금에 보태며, 부족한 살림을 털어 돈을 모았다. 부모님은 딸이 국제결혼을 해도 비교적 가까운 중국으로 가기에 안심하셨는데, 갑자기 먼 미국으로 간다고 하니 섭섭해하셨다.
나는 그때만 해도 부모님을 떠나 멀리 사는 것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를 통제하던 엄마의 손에서 벗어나고, 무기력하고 술을 좋아하시는 아빠의 모습을 당분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홀로 기대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결혼한 성인의 모습이었지만, 아직 내 안에 해결되지 않은 가족에 대한 불만과 상처로 미성숙한 내가 숨겨져 있었고, 이를 해결하는 데 10년이 더 걸릴 것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우리는 김포 항구에서 단둥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기분에 설렘 반, 두려움 반의 감정으로 멀어지는 김포 항구를 바라보며 홀로 한국과 작별을 고했다. 우리는 여러 명이 함께 쓸 수 있는 넓은 방을 예약했는데, 대부분 중국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었고, 한국에서 일하는 사람들 같았다.
방에서 쉬고 있는데, 옆에 아주 귀여운 1살 남아와 3살 여아, 그리고 부모가 모여 앉아 있었다. 그들은 한국 사람으로 보였고, 가까이 가보니 한국말을 했다. 우리는 반가운 마음에 말을 걸었고, 그들도 반갑게 인사하며 대화가 이어졌다. 알고 보니 그들은 단둥에서 선교를 하고 있던 선교사 가정이었고, 남자의 집과 불과 5분 거리에서 살고 있다는 얘기에 우리는 더 반가웠다. 그렇게 우리는 단둥에 도착해서도 서로의 집을 여러 번 오가며 교제를 나누었다.
하루는 선교사 부부가 우리에게 소개해주고 싶은 분이 있다고 했다. 그분들도 선교사 부부인데,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온 한인 노부부라며 식사를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흔쾌히 그 만남에 응했고, 어느 날 저녁, 모두 함께 그 한인 노부부 선교사님의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반가운 마음에 서로를 소개하고, 무엇보다 남자의 간증은 모두를 놀라게 했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시간이었다.
그중 남자가 미국에서 다니게 될 신학교 이름을 들은 선교사님은 자신과 잘 아는 지인이 그 학교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며, 미국에 가게 되면 꼭 연락해보라며 연락처를 건네주었다. 남자는 전화번호를 여행 가방에 잘 넣어두었다. 그리고 그 번호로 전화를 거는 데까지 1년이라는 시간이 더 걸렸다.
우리는 2개월간 남자의 고향인 단둥에서 지내며 남편의 부모님과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남자의 아버지의 방사선 치료는 예후가 좋았고, 앞으로 5년간 재발하지 않으면 완치될 것이라는 의사의 소견을 받았다. (그렇게 아버지는 1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건강하게 살아계신다.)
나와 남자 비행기를 타기 위해 기차를 타고 다시 한번 북경으로 향했다. 남자는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꼭 한번 씨에 목사님을 살아계실 때 뵙고 싶은 마음에 수소문하여 연락처를 알아내고 연락을 드려 찾아뵈었다. 그분은 마오쩌둥 시대에 삼자교회에 가입하지 않는 목사님들을 감옥에 수감할 때, 30년이 넘도록 수감되었다가 풀려나신 씨에 목사님이셨다. 굉장히 연로하신 모습의 그 목사님은 많은 중국 목사님의 존경을 받는 리더이시자, 여전히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변함없이 지켜내시며, 곧 예수님을 뵐 날을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계셨다. 우리는 그 목사님과 식사와 대화를 나눈 후 우리 부부의 새로운 앞 날을 위해 안수 기도를 받았다.
그렇게 우리는 설레고 두려운 마을을 품고 미국으로 떠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