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품은 남자와 사는 이야기 (6)
미국에 온 지 어느새 1년이 되었다. 삶이 나아진 것은 없었지만, 이곳에서도 점점 익숙해지고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 무렵, 랍비에 관한 일화가 담긴 책을 읽고 있었는데, 그중 한 장면이 유독 마음에 남았다. 가난하게 생활하는 젊은 랍비가 나이 든 랍비에게 묻는다.
“랍비님, 어떻게 하면 이렇게 힘들고 가난한 생활을 벗어날 수 있을까요?”
그러자 나이 든 랍비는 이렇게 대답한다.
“30년이 지나도 환경은 변하지 않아. 다만 우리가 그 삶에 익숙해져서 힘든 줄 모르고 살 뿐이지.”
그 말을 읽고 피식 웃다가도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종교인이 된다는 것은 물질적인 부분을 내려놓고, 흔히 말하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사는 삶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자신이 없었다. 아직도 사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많은 20대 중반의 나에게 이 유학생활은 점점 더 버거워지고 있었다.
그런 고민이 깊어지던 어느 날, 얼바인에 있는 대만계 교회에서 부목사 청빙 요청이 들어왔다. 중국과 대만 출신 교인이 많은 교회였고, 조건은 너무나도 좋았다. 넉넉한 월급에, 주택 제공은 물론 영주권 스폰서까지 보장해 주는 최고의 기회였다. 아마도 다시는 오지 않을 제안이었을 것이다.
처음 미국 유학을 결정했을 때, 우리는 한 가지 원칙을 세웠다. 절대 미국에 정착하지 말자. 공부를 마치면 무조건 중국으로 돌아가기로 약속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많은 중국 크리스천들이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결국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해가 되는 일이었다. 중국에서 목회 활동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삼자교회만을 인정했으며, 외국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중국에서 사역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게다가 미국에서 종교적, 정치적 자유를 누리다 보면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기 마련이었다.
우리는 청빙 제안을 받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마음과 머리가 따로 움직였다. ‘그동안의 고생을 보상받을 수 있는 기회가 아닐까?’ ‘앞으로의 삶이 훨씬 안정적이지 않을까?’ 기대감이 커졌다. 하지만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교회에서는 이미 우리가 99% 온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우리가 한마디만 하면, 우리의 삶은 단숨에 바뀔 수 있었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 영적 지도자인 안 목사님을 찾아가기로 했다. 주일 예배 후, 우리는 목사님을 찾아뵙고 우리의 상황을 말씀드렸다. 사실, 이미 목사님께 어떤 대답을 듣게 될지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답을 듣고 싶었다. 그래야만 혼란스러운 마음이 평안해질 것 같았다.
목사님은 우리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씀하셨다.
“아직 때가 아닌 것 같구나. 더 배우고 준비하렴.”
그 말을 듣는 순간, 우리의 마음은 이상하리만큼 평안해졌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가난하고 힘든 유학생의 삶을 살아가기로 다짐했다. 어쩌면 이번 청빙 제안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험이자 유혹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확신했다.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길로, 가장 바른 길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라고. 그렇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길을 선택할 수 있었다.
한국에 있을 때 즐겨 마시던 커피도 끊었다. 한때는 스타벅스에서 바닐라 라떼를 마시며 책을 읽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곤 했지만, 미국에서는 그런 여유가 사치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아예 단호하게 커피를 끊어버렸다. 그렇게 한 푼 두 푼 아껴가며 우리는 3,500달러를 모았고, 결국 중고 혼다 자동차 한 대를 더 장만했다. 나와 남자가 얼마나 악착같이 살아왔는지 그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어느 날, 미국으로 떠나기 전 단둥에서 알게 된 미국 선교사님께 연락이 왔다. 잠시 캘리포니아에 왔다며, 예전에 이야기했던 남자의 학교 이사장님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갖자는 제안이었다. 우리는 미국에 온 뒤 여러 번 이사장님께 연락을 시도했지만 닿지 않았던 터라, 흔쾌히 만남을 갖기로 했다.
LA로 향하는 차 안에서 남자는 내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알고 보니 이사장님은 LA에서 또 다른 대학교의 총장으로도 계셨고, 그 학교에는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 수업이 있었다. 그러니 식사 자리에서 그곳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해보라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미국 유학을 꿈꿨지만, 여러모로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었다. 유학 비용도 문제였지만, 가장 큰 걸림돌은 턱없이 부족한 영어 실력이었다. 결국 유학은 막연한 꿈에 불과했다. 남자를 따라 미국에 왔지만, 1년이 지나도록 나의 영어 실력은 그대로였다. 스몰 토크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고, 집과 한인 교회를 오가는 생활 속에서 영어를 쓸 기회조차 없었다. 그렇게 1년이 흘렀고, 나는 여전히 제자리였다.
그런데 이제 총장님께 ESL 수업을 들을 수 있느냐고 직접 부탁하라는 미션이 주어졌다. ‘이거 민폐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남자는 “이번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수도 있어. 안 되면 어쩔 수 없지만, 시도는 해봐야 해”라며 거듭 당부했다.
LA의 한 한식당에서 우리는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눴다. 이후 커피를 마시러 걸어가는 길, 우연히 총장님과 나란히 걷게 되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입이 바짝 말랐다. 괜히 말을 꺼냈다가 곤란한 상황이 되는 건 아닐까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이 순간을 놓치면 더 이상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총장님, 제가 꼭 영어를 배우고 싶은데… 혹시 총장님 학교에서 ESL 수업을 들을 수 있을까요? 그런데 저희는 돈이 없어요…”
내 말을 들은 총장님은 단 1초도 고민하지 않으셨다.
“그래요. 배우러 오세요. 그리고 이따 학교 측에 이야기해 둘 테니 온 김에 레벨 테스트까지 받고 가세요.”
‘이게 된다고?’ ‘이렇게 쉽게?’
너무나 간단하게 허락이 떨어지자 어안이 벙벙했다. 뒤를 돌아보니 남자가 나를 보며 씩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날로 나는 학교에서 영어 레벨 테스트를 보고 수업 등록까지 마쳤다. 우리가 살던 Bellflower에서 LA까지 거리가 꽤 됐기에, 결국 몇 주 후에 우리는 LA 다운타운으로 이사까지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1년간 영어를 공부하며, 그것은 내 인생의 다음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커다란 디딤돌이 되어 주었다.
LA 생활도 쉽지 않았다. 더 비싸진 렌트비는 물론, 멀어진 학교와 교회를 오가는 기름값조차 걱정해야 하는 나날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공부하며 성장하고 있다는 생각에 감사함이 컸고, 버틸 만했다. 그리고 가끔 벌어지는 이벤트에 재미도 있었다.
하루는, 학교에 가려고 집을 나선 남자에게서 갑작스레 전화가 걸려왔다. 주차해 둔 1996년식 혼다 어코드 중고차가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다른 차들은 그대로 주차되어 있는데, 유독 남자의 차만 없어졌다고 했다. 황당한 마음을 안고 경찰서로 향했지만, 이미 도난당한 차량을 신고하러 온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남자의 차는 오래된 모델이라 도난이 쉬웠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전 재산의 반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그날을 떠올려보니, 그것 또한 하나의 추억이었다.
여러 이벤트들이 흘러, 어느새 나는 ESL 수업에서 레벨을 차곡차곡 올려, 토플 반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그러자 남자는 내게 또 다른 제안을 던졌다.
“이제 대학원 준비를 해 보는 게 어때?”
막상 미국에 와서 현실과 마주하고 보니, 과거에 꿈꿨던 음악 공부가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었고, 나는 이미 음악 공부를 하겠다는 마음을 접은 상태였다. 대신 남자가 신학 공부를 마친 후 함께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남자의 대학원 제안은 예상치 못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남자는 처음부터 그럴 계획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먼저 영어 공부를 시작하기를 바랐고, 자신이 졸업하면 그다음에는 내가 학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서포트해 줄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진짜로 꿈이 현실로 다가오자, 오히려 망설여졌다. 내가 과연 미국에서, 이 어려운 영어로 대학원 공부를 하고 졸업까지 해낼 수 있을까? 의구심이 나를 잠식했다. 고민에 빠져 있는 나를 바라보던 남자가 조용히 한마디를 건넸다.
“너는 꿈은 많은데, 용기가 부족해. 시도하지 않는다면그건 현실이 될 수 없는 꿈일 뿐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어린 시절 간절히 기도했던 꿈이 떠올랐다. 손을 불끈 쥐고 기도했던 순간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묻고 울면서 기도했던 시간들을 말이다.
하나님은 내 기도를 외면하고 계시지 않으셨다. 모든 것을 듣고 계셨고, 응답하기를 원하셨다. 그분의 때에, 그리고 그분의 방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