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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걸어야 할 길, 그리고 아빠와의 이별

하늘을 품은 남자와 사는 이야기 (7)

by 도럽맘

본격적으로 대학원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선망하던 학교부터 캘리포니아에 있는 대학들까지, 현재 내 형편에 맞는 곳을 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몇 가지 어려운 점이 있었다. 가고 싶었던 학교들은 거리가 너무 멀어 유학생활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캘리포니아의 대학들은 학비가 어마어마해 불가능해 보였다. 그렇게 또다시 절망 속에서 갈팡질팡하며 학교를 찾고 있었다.


그때,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2년 만에 한국을 잠시 다녀올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었다. 오랜만에 엄마와 오빠를 만났지만, 두 사람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아빠가 병원에 입원해 계신다며, 나와 남자를 데리고 곧장 종합병원으로 향했다.


우리는 담당 의사를 만났다.


“전립선암 말기입니다.”


아빠가 암에 걸리셨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미국으로 떠난 후 아빠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졌다. 몇 년 전부터 알코올 중독으로 일을 그만두고 치료를 받다가, 내가 결혼한 후 함께 살았던 1년 동안은 거의 술을 드시지 않으셨다. 그런데 우리가 미국으로 떠난 후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결국 병원에 입원한 후 암이 발견된 것이었다.


아빠는 내 어린 시절, 한없이 자상하고 따뜻한 분이셨다. 비록 말수가 적고 친구가 많지 않으셨지만, 누구보다 착한 성품을 지닌 분이었다. 그러나 내가 고등학생이 될 무렵부터 엄마와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엄마는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사람이었다. 강한 추진력과 리더십을 갖고 계셨고, 종종 “남자로 태어났으면 대장부가 됐을 거야”라는 말을 들으셨다. 두 분의 삶을 내가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시댁과의 갈등, 경제적 어려움, 신뢰와 대화 부족이 겹치면서 관계가 점점 멀어졌다. 엄마는 아빠에 대한 불신이 깊어졌고, 아빠는 점점 집안에서 소외되어 갔다.


나또한 그런 아빠를 외면한 채 세상으로 떠돌다가 결혼을 했고, 남자는 처음 우리 부모님을 만났을 때부터 그 분위기를 감지했다.


“왜 표정이 안 좋아?” 내가 물었을 때, 남자는 조심스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아빠가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게 전부가 아니야. 아버님은 많이 외로워 보였어. 몸도 많이 아프신 것 같고.”


나는 충격을 받았다. 평생 희생적이고 불쌍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엄마가 피해자가 아닐 수도 있고, 무능하고 책임감 없어 보였던 아빠가 사실은 피해자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혼란스러웠다.


아빠는 남자를 정말 좋아하셨다. 자신을 음지에서 꺼내어 세상으로 다시 이끌어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말동무가 되어주고, 자신의 존재를 인정해 주고 존중해 주는 사위를, 한평생 함께 살아온 가족보다 더 고마워하는 모습이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함께 지낸 1년 동안 아빠는 정말 많이 달라지셨다. 밝아졌고, 웃음이 많아졌고, 술도 끊으셨다. 하지만 우리가 떠난 뒤,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하셨다. 누군가와 함께 걸어주던 손이 사라지자, 그 손 대신 술잔을 들기 시작하신 것이다. 실망한 엄마는 더 차가워졌고, 아빠는 다시 깊은 외로움 속으로 가라앉아 갔다.


2년 만에 만난 아빠는, 나와 남자를 누구보다 반가워하셨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빠의 손을 다시는 놓고 싶지 않았다. 남은 시간 동안 아빠가 외롭지 않도록 곁을 지키고 싶었다.


짧은 한국 방문을 마치고, 우리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남자에게 말했다.


“나, 미국에서 음악 공부는 못 할 것 같아. 당신이 신학교 졸업하면 한국으로 돌아가자. 아빠가 살아 계시는 동안은 곁에 머물고 싶어.”


쉽지 않은 이야기였다. 대학원 진학은 어쩌면 내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었다. 그 결정을 쉽게 내릴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와의 통화에서 나는 결국 결정을 내렸다.


“은혜야, 아빠의 꿈은 네가 미국에서 공부해서 훌륭한 피아니스트가 되는 거야.”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다시 꿈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이유를.


“응, 아빠, 그렇게 할게…”




학교를 더 알아보니 LA에서 멀지 않은 곳인 Azusa 지역에 크리스천 사립 대학교를 발견했다. 원래 가고 싶었던 학교보다 학비도 저렴했고, 무엇보다 토플 점수가 부족해 대학원 입학이 어려웠던 내게 이곳은 한 학기 동안 ESL 수업을 추가로 들으면 다음 학기부터 대학원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원서와 오디션 영상을 제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입학 허가서가 도착했고, 추가 오디션을 통해 학비 장학금도 받게 되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시작되는 듯했다.


우리는 다시 이사를 준비해야 했다. 학교 커뮤니티 사이트를 통해 아파트 룸메이트를 찾는 글들을 읽으며 우리에게 맞는 집을 찾았다. 학교 앞 아파트 단지는 대부분 학생들이 방을 세놓으며 사는데, 마침 졸업을 앞둔 두 학생이 방을 비우게 되어 새로운 룸메이트를 구한다는 글을 발견했다. 연락해 보니 졸업하는 학생들도 한국인이었고, 맞은편 방에 사는 학생들도 곧 졸업을 앞둔 한국 학생들이었다. 그렇게 나와 남자는 그 작은 방으로 이사했다.


나는 한 학기 동안 ESL 수업을 들으며 부족한 영어 실력을 채워나갔다. 그리고 드디어 대학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에 계신 엄마에게 연락이 왔다. 아빠가 많이 위독하신데, 특히 나를 계속 찾고 계신다는 것이었다. 많이 보고 싶어 하시니 돌아가시기 전에 인사하러 오는 게 어떻겠냐는 말씀이었다. 이제 막 학기가 시작되었고, 곧 중간고사가 다가와 공부할 것이 많았지만, 나는 바로 가겠다고 말씀드렸다. 다만, 이번에 다녀온 후 아빠가 방학 전에 돌아가시면 장례식에 참석할 수 없을 거라고 말씀드렸다. 그래도 살아계실 때 한 번이라도 더 뵙는 게 좋지 않겠냐는 엄마의 말에, 나는 학교 측에 양해를 구하고 홀로 다시 한국으로 향했다.


반년 만에 다시 만난 아빠는 몰라보게 야위셨다. 이제는 거동도 어려워 병원 침대에 누워 계셨다. 아빠의 침대 옆에는 나와 남자가 한복을 입고 찍은 결혼사진이 아빠의 왼쪽 서랍에 얼굴 높이에 붙어 있어, 누워 있는 아빠를 바라보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내 방문에 아빠는 환하게 웃으셨다. 내 손을 꼭 잡으시고 놓지 않으셨다.


나도 그랬다. 이 손을 이제 놓으면 다시는 못 잡을 것 같아… 어릴 적 내 손을 꼭 잡고 동네를 함께 산책했던 크고 따뜻했던 아빠의 손을 마지막으로 잡는 것 같았기에 나 또한 아빠의 손을 놓지 못했다. 얼마나 한참을 아빠의 얼굴을 바라보고 또 봤을까… 시간이 흘러 면회 시간이 끝나갈 무렵, 아빠는 어렵게 서랍에서 한 권의 책을 내게 건네주었다. 아빠가 기력이 있을 때 쓴 글들이 책 앞표지, 겉표지 안쪽에 가득 적혀 있었다.


남자에게는 아들이라 부르시며 ’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주의 종‘이 되거라, 나에게는 ’딸아 세상에서 가장 멋진 피아니스트가 되어라 ‘… 그렇게 아빠는 마지막 유언을 책에 남겨주셨고 그 책을 가슴에 품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한 달 뒤, 수업을 듣던 중 엄마에게서 카톡 메시지가 도착했다.


“아빠가 오늘 새벽에 하나님 품으로 가셨어.”


손끝이 덜덜 떨렸다. 휴대폰 화면이 흐려졌다. 말도 안 돼. 현실이 아니길 바라며 몇 번이고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하지만 문장은 변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발 받아줬으면, 이 순간 혼자가 아니었으면. 하지만 계속해서 신호음만 울렸다. 남편의 휴대폰에 문제가 생겨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걸 알았을 때,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렇게나 절박한 순간, 세상과 단절된 기분이 들었다.


아무도 반기지 않는 캄캄한 집에 도착한 나는 떨리는 손을 꼭 쥔 채 억지로 책상 앞에 앉았다. 다음 날 시험이었기에 마음껏 울 수도 없는 밤이었다. 눈물에 글씨가 번졌고, 손등으로 몇 번이고 눈물을 닦아내며 내 모든 슬픔을 꾹꾹 삼켜야만 했다.


그렇게 나는 미국에서 아빠와 영원한 이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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