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품은 남지와 사는 이야기 (9)
아주사라는 조용한 도시 한가운데 자리한 Azusa Pacific University는 1899년에 설립된 복음주의 개신교 전통의 학교다. 비록 규모가 아주 크진 않지만, 이 학교는 학생 한 명 한 명의 삶에 깊이 관여하며 이끌어주는 ‘영적 공동체’로서의 매력을 지니고 있다. 특히 국제학생들에게도 따뜻하고 환영하는 문화를 갖추고 있어, 문화적 다양성 속에서도 신앙을 중심으로 하나 되는 특별한 경험을 제공한다.
나는 이곳에서 Master of Music 과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수업은 클래식 음악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재즈 관련 수업도 여러 개 개설되어 있어 클래식과 재즈를 두루 배울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클래식 전공 수업으로는 음악사(Music History), 화성학(Harmony), 지휘법(Conducting), 청음(Ear Training), 악기론(Orchestration), 대위법(Counterpoint), 음악 분석(Music Analysis) 등 음악의 기반을 탄탄하게 다질 수 있는 이론 중심의 수업들이 준비되어 있었고, 교수님들의 깊이 있는 강의는 내게 늘 새로운 자극이 되었다.
반면, 재즈 수업에서는 보다 실전 중심의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재즈 트리오 밴드(Combo), 빅밴드(Big Band Ensemble), 즉흥연주(Improvisation), 재즈 작곡(Composition & Arranging), 리듬 섹션 스터디(Rhythm Section Workshop), 재즈 이론(Jazz Theory) 등 다양한 커리큘럼을 통해 나는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을 접하고, 실제 무대에서 연주하는 법을 체계적으로 익힐 수 있었다. 이처럼 클래식과 재즈가 균형 있게 어우러진 교육 과정 덕분에, 나는 한쪽으로만 기울지 않고 음악 전반을 유연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한 가지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나의 전공은 ‘재즈 피아노’였기에 매주 전공 레슨이 필수였는데, 학교 내에는 재즈 피아노를 전문적으로 지도하실 교수님이 계시지 않았던 것이다. 연주 경험이 있는 분은 있었지만, 전공이 클래식이신 만큼 대학원 과정의 전공 교수로 모시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런데 이 상황은 오히려 나에게 ‘전화위복’이 되었다. 학교의 배려로 외부의 교수님께 레슨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그것도 내가 어린 시절부터 동경해왔던 세계적인 재즈 뮤지션들에게 말이다.
첫 학기, 나는 USC 교수이자 Yellowjackets의 키보디스트이며, 그래미 어워드를 무려 17번이나 수상한 러셀 페란테(Russell Ferrante) 교수님께 개인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그의 작업실이 위치한 파사데나(Pasadena) 는 LA 북동쪽에 자리한 도시로, 고풍스러운 건축물과 예술적인 분위기가 가득한 곳이다. 거리에는 고급스러운 레스토랑과 세련된 카페, 그리고 정갈한 주택가가 어우러져 있어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교수님의 집 또한 그런 분위기와 꼭 닮아 있었다. 아름다운 정원이 딸린 집, 햇살이 잘 드는 창가, 그리고 조용한 골목길 너머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까지—그곳에서의 레슨은 내 인생에서 절대 잊을 수 없는 꿈같은 경험이었다.
하지만 한 학기가 지난 후, USC 측에서 외부 학생을 가르치는 것이 금지된다는 지침이 내려왔고, 나는 다시 새로운 교수님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만나게 된 분이 바로 UCLA 교수이자 이스라엘 출신의 재즈 피아니스트 타미르 헨델만(Tamir Hendelman) 교수님이었다.
처음엔 이름이 생소해 긴가민가했지만, 첫 레슨을 듣고 나서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그의 연주는 내 스타일 그 자체였고, 무엇보다도 가르침의 깊이가 남달랐다. 잘 연주하는 사람은 많지만, 잘 가르치는 사람은 흔치 않다. 그런데 교수님은 이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사람이었다.
매주 진행된 레슨은 나에게 단순한 피아노 수업을 넘어, 음악을 대하는 태도와 철학 자체를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다. 문제는 거리였다. 그의 레슨은 LA에서 오전 9시에 시작되었고, 트래픽이 심한 날에는 2시간 넘게 걸리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새벽 5시 30분, 해가 뜨기도 전 어둠 속을 뚫고 운전대를 잡았다. 교수님 댁 근처에 도착하면 스타벅스에 들러 두 시간 동안 과제를 하며 레슨을 기다렸다. 그리고 한 시간의 레슨이 끝나면 다시 학교로 돌아와 밤 10시까지 수업을 듣고, 집에 돌아오면 몸이 녹초가 되었다.
그렇게 먼 거리를 오가며 힘들게 배운 시간이었지만, 그만큼 내게 소중하고 값진 배움이었다. 교수님의 맞춤형 레슨은 매번 감탄이 절로 나왔고, 나는 매 시간 몰입하며 음악이라는 언어 속에서 깊은 대화를 나눴다.
사실 그 시절에는 하루종일 피아노만 치고 싶었다. 배우고 온 것들을 바로 연습하고 싶었고, 머릿속에서 정리한 내용을 손끝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하지만 미국 대학원은 그런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매일 과제와 시험, 리서치와 연습이 끝없이 몰아쳤고, 하루하루가 버거웠다. 매일매일 위기와 안도의 감정이 교차했고, 심장은 쪼그라들다 겨우 숨 쉴 만큼만 회복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버텼고, 그 시간들은 결국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음악이란 무엇인지, 좋은 연주자가 되기 전에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하나님께 받은 달란트를 어떻게 사용할지 끊임없이 고민하게 만든 시간이었다.
아주사에서 시작된 이 여정은, 나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었다. 단지 음악을 잘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통해 나 자신을 이해하고, 또 세상과 소통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진심을 품게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