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품은 남자와 사는 이야기 (8)
아빠가 떠나신 지 두 달 후, 남자는 신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그는 먼저 중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나는 학업을 마치기까지 아직 1년 반이 남아 있었지만, 남자는 자신이 먼저 귀국하는 것이 내가 학업에 더 집중할 수 있는 길이라 생각했다. 오랜 시간 해외에서 지내면서 중국 교회 상황에 대한 감각이 희미해졌기에, 미리 들어가 사역지를 알아보는 것도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처음엔 남자의 의견에 강하게 반대했다. 낯선 미국 땅에서 혼자 살아가야 한다는 현실이 막막하고 두려웠다. 하지만 남편의 결정은 흔들리지 않았고, 나는 결국 홀로서기를 받아들여야 했다.
남자는 떠나기 전, 나와 앞으로 함께 지낼 룸메이트를 구해야 했다. 학교 커뮤니티 웹사이트에 공고를 올리고 여러 명의 학생들과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그중 한 사람이 바로 센센(xienxien)이었다.
센센은 중국 난징 출신으로, 나보다 두 살 많았다. 20대 때 한국 선교사를 통해 믿음을 갖게 되었고, 7년간 중국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미국으로 건너와 ’기독교 리더십(Christian Leadership)’을 전공하고 있었다. 영어 교사 출신이라 유창한 영어 실력 덕분에 내가 언어적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큰 힘이 되어주었다.
키는 170cm쯤 되었고, 큰 눈에 또렷한 목소리, 무엇이든 시원시원한 성격 덕에 유학생들 사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싸’였다. 다소 내성적인 나와는 정반대의 성향이었지만, 그녀 덕분에 우리 집은 항상 친구들로 북적였고, 나 역시 학교에서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믿음이 깊었다. 매일 아침 찬양 음악으로 하루를 열고, 기도와 큐티를 빠뜨리지 않았으며, 밤이면 나와 늦은 시간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가끔은 토론을 즐기는 그녀의 직설적인 말투에 마음이 어려울 때도 있었지만, 그 또한 ‘다름’을 배우는 기회가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룸메이트를 넘어, 믿음 안에서 서로를 지지하는 동역자가 되어갔다.
남자는 마침내 모든 준비를 마치고 중국으로 떠날 날이 다가왔다. 우리가 함께 다니던 교회는 500명 정도 출석하는 한인교회였는데, 그곳에서 남자는 유일한 중국인이었다. 5년 가까이 함께 신앙생활을 했지만, 많은 이들이 남자를 한국인이라 착각할 만큼 그는 한국어도 잘하고, 붙임성도 좋았다.
학생 신분으로 교회에 처음 발을 디딘 그는 간사로, 전도사로, 목사로 성장했고 결국 선교사로 파송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 교회는 우리에게 말씀과 사랑을 아낌없이 부어준 ‘신앙의 집’이었다.
마지막 파송 예배 날, 담임목사님은 남자를 “한국인인 척하는 중국 사람”이라고 소개하며 웃음으로 분위기를 띄우셨고, 온 회중은 웃음 속에 눈시울을 붉혔다. 예배의 마지막 축도는 남편에게 맡겨졌고, 그는 교회에서 처음으로 중국어로 축도를 드렸다. 아무도 그 내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모두가 눈물로 감사의 기도를 올렸던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며칠 후, 교회 지인들과 함께 공항으로 나가 남편을 배웅했다. 마지막 인사를 나눈 후, 남자는 눈시울이 붉어진 얼굴로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 채 발걸음을 떼지 못하다가, 결국 조심스레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나 역시, 돌아오는 길에 차 안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앞이 보이지 않아 위험할 뻔한 순간도 있었고, 거의 정신이 나간 상태로 집에 도착했다.
이제 정말 혼자였다.
항상 내 곁에서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남자.
남편이자, 때로는 아빠 같았던 그가 없는 미국 생활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서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아빠와 남편을 거의 동시에 떠나보낸 듯한 깊은 상실감이 몰려왔지만, 슬픔에 빠져 있을 틈은 없었다. 살인적인 학교 일정과 끝도 없는 과제들이 나를 가만두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