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때만큼 힘 빠지고 막막할 때가 없다. 많은 선생님들이 이럴 때 좌절하여 아이한테 화내거나, 아이를 문제아로 치부하곤 한다. 나 또한 한때는 그러한 마음에 너무 괴로웠기에, 해답을 찾아 헤맸다. 불교, 아동심리, 심리학, 교육학, 그리고 1타 강사의 경험담, 공부 vlog까지 별의별 정보를 다 찾아다녔다. 그런데 놀랍게도 모든 영상에서 공통되게 일관되게 항상 나오는 몇 가지 해답이 있었다. "아이에게 공부는 당연히 재미없다.", "남을 바꾸기는 힘들고, 내 마음과 내 방식을 바꾸기는 쉽다."
간단명료한 진리들이지만 놓치기 쉬운 진실이다.
아이에게 공부시키는 법을 찾으면 찾을수록 나오는 모든 해결방안은 결국 선생이나 부모의 변화를 전제한다. 아이가 공부나 숙제를 안 하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하다. 바뀌어야 할 것은 아이의 마음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구구단을 외고, 매일 구몬 학습지나 쎈 문제집에 나오는 수십 가지 같은 유형의 문제를 풀고, 모르는 단어가 나와서 막힐 때마다 찾아보고, 이런 지난한 과정을 우리 모두 싫어하지 않았던가.
그럴 때마다 그들의 감정에 공감하고 같은 편이 되어주고 응원하고 격려하는 게 선생의 역할이다. 교사라면 산에 오르는 방법만 알려주면 끝이지만, 선생이라는 업은 아이 앞에서 먼저 걸어가며 아이가 지치고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끝까지 등반을 포기하지 않도록 응원하고 격려하는 역할까지도 겸해야 하는 것이다.
석가가 말하길 인간의 모든 고통은 나의 욕심으로부터 나온다고 하였고, 공자는 공부야 말로 백년지대계라 했다. 공부는 평생을 하게 될 긴 여정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여정을 먼저 떠나 보았을 뿐인 선생先生이다. 당장의 성과를 바라는 한두 마디 잔소리에 누구나 공부를 할 것 같으면 세상에는 선생 따위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다 큰 성인들조차도 매일 PT 받으러 나가는 그 예측 가능한 고통과 지루함을 못 견뎌하지 않는가? 우연히 책에 재미를 붙였거나 천재적 머리를 타고나서 수학 식만 봐도 답이 술술 나와서 국어 수학 등에 재미를 붙인 특이 케이스와 비교하며 너는 왜 공부에 흥미를 못 붙이냐고 다그치는 것은, 김종국 김계란처럼 헬스에 재미 좀 붙여서 매일 운동하면 건강에도 좋고 인기도 많아지는데 왜 운동 안 하냐고 다그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원하지 않는 자를 바꿀 방법은 없다. 아이가 단번에 바뀌길 바라는 나의 마음이 욕심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
말은 그렇게 써놨지만, 사실 나 자신조차도 조급함과 불안이라는 파도에 휩쓸려, 늘 마음이 요동치고는 한다. 내가 열심히 수업한 만큼 학생들도 열의를 보였으면 하고 바라며 세상 천하태평한 아이들의 모습에 야속함을 느낄 때가 많다. 하지만 나의 열심이 성과를 내지 못했다면 그것은 학생이 아닌 나의 방법의 문제다. 농사는 농부가 열심히 노력하는 것만으로는 결실을 얻을 수 없다. 세상에는 흉년이라는 것이 어쩔 수 없이 존재하고, 작물이 잘 자라서 수확이라는 결실을 얻으려면, 날씨나 병충해와 같은 외부요인까지도 통제해야 한다. 열심히 했는데 실패했다면 방법을 바꿔야 한다. 방법을 만들어내야만 한다. 날씨가 추운데 멍청하게 열심히 농사만 짓고 있는 것은 좋은 농부가 아니다. 그럴 때는 비닐하우스부터 만들어내야만 한다. 학생이 공부할 생각이 없다면,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환경과 상황부터 만들어 내야만 한다.
그래서 나는 알아서 숙제를 잘해오는 아이는 터치하지 않는다. 미운 아이 떡 하나 더 준다는 마음으로, 어떠한 보상으로든 숙제를 해오도록 만든다. 숙제 루틴이 잡히지 않은 학생들의 동기부여를 어떻게든 만들어내어 그것을 습관으로 이어지도록 노력한다. 이왕이면 학생이 제일 좋아하는 방법으로. 그래야 결실이 나오더라.
나의 특별관리대상에 오른 학생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나에게 숙제 검사를 받고 보상을 받는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생각날 때마다 카톡을 보내는 방법으로 숙제를 확인한다. 이것으로 해결되면 양반이다.
나와 가장 친하고 공부는 제일 안 하는 중3 학생은 매일 퇴근 전 그 학생의 집에 들러 숙제를 검사하고, 데일리 플래너를 작성하게 하고, 들른 김에 게임하는 것도 구경하고 가는 방식으로,
매일매일 숙제를 찍어서 보내게 하는 중1 고1 자매는 간단한 기프티콘 혹은 수업 때 준비해 가는 간식으로,
수업 시간 때 매번 졸고 영화를 보기를 좋아하는 중3 학생과는, 숙제를 해오면 수업시간에 문학적 표현기법을 배울 수 있는 영화를 30분씩 보는 것으로,
숙제를 하기 싫은 건 아닌데 자꾸 까먹는다고 하는, 먹을 것에도 영화에도 다 의욕을 못 느끼고 게임에 빠져 사는 중3 학생에게는 컴퓨터를 교체하고 남은 램카드를 선물로 주고, 디스코드로 친구를 맺어, 볼 때마다 숙제했냐고 확인 것으로(카톡은 확인을 안 한다...),
내 생각엔이런 헌신적인 선생이 어디 있나 싶지만, 정작 학생들은내 성의를 무참히 짓밟고 숙제를 안 해오기가 일상다반사다.
그럴 수 있다.
세상이 참 야속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뿐. 마음을 비우면 기대도 하지 않게 된다. 여러 번 더 시도해보고 이 방법이 아니었다면 다른 방법으로 다시 시도해볼 뿐. 어쩌면 때로는 그저 시간이 답일 때도 있다. 믿고 기다리다 보면 마치 걸음마를 떼듯이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아이가 알아서 바뀌기도 한다.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이를 포기하는 것이나 방치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마치 황동규의 시 <즐거운 편지>처럼 '나의 기대를 기다림이라는 즐거움으로 바꾸는 일'에 더 가깝다.오히려 기대를 버림으로써 아이의 작은 노력과 성취에도 진정한 감동과 감사, 보람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갓난아이가계속 넘어지고 다치는 실패와중에도 기어코 걸음마를 떼도록 만드는 것은, 아이가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는 사실을 진심으로 믿고 응원하며지켜보는 부모의 오랜 기다림과, 마침내 오랜 기다림 끝에 보여주는 그 결과에 대한 순수한 감탄뿐이다. 다그침이나 분노 실망과 같은 피드백은 아이의 흥미와 의욕에 아무런 긍정적 영향을 주지 못한다.심지어 걸음마를 성공한 아이들조차도 다음번에 다시 넘어질 수 있다. 그럴때 실망과 같은 부정적 피드백을 받는다면 ,아이는 의욕을 잃고 자신이 잘 하지 못하는 걸음마보다는 다른 재밋거리를 찾아나설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아이가 숙제를 해올것이라는기대를 버린다. 그런 마음으로 아이를 만났을 때에만,예상을 깨고 숙제를 해온 아이에게서, 마치 걸음마를 뗀 아기를 본 어머니의 마음으로 기뻐할 수 있게 된다.
오늘도 아이들은 숙제를 안해올 것이다.
그럴 수 있다.
아 사족으로 영화나 먹을거리 같은 보상으로 아이들을 컨트롤하는 것은 흥미 유발 동기부여 같은 측면에서는 좋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최선의 방식이라고 볼 수는 없다. 아이가 스스로 성취감과 효능감을 느끼고 아무런 보상이 없어도 숙제를 하는 습관을 가지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항상 아이에게도 내가 느낀 고마움과 감동을 전하려 노력한다. 그때 그 아이가 느낄 뿌듯함과 성취감은 아이의 새로운 동기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내일은 이 효능감에 대해서 써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