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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초이 Oct 06. 2024

나의 요리 연대기

집밥 


내 나이 스물여섯 6월, 선을 봤다. 그리고 이듬해 4월 결혼했다. 신혼집은 행신동으로 내 부모님 댁에서 도보로 20분 거리였다. 결혼 전까지 내가 해본 음식이라고는 달걀프라이, 라면, 김치볶음밥이 전부였다. 요리라고 부를만한 건 없었다. 엄마는 회사에 나가면서도 삼시세끼 반찬을 직접 하고 아침마다 도시락을 싸주셨다. 나와 남동생이 고등학교 때는 야간자율학습을 했기에 점심에 저녁까지 도시락 네 개를 싸야 했다. 난 초중고 내내 도시락을 안 가져간 날이 한 번도 없었다. 방학에는 큰댁에 사시는 할머니가 오셔서 우리 점심을 차려주셨다. 대학을 다니고 회사를 다닐 때도 엄마가 차려주신 밥을 먹었다. 난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귀하게 자랐다. 그런데 결혼했으니, 집안일을 배워야 했다. 남편은 청소를 잘했다. 구석구석 먼지를 털어내고 깨끗이 닦았다. 난 빨래를 세탁기에 넣고 돌려 널고 마르면 개어 넣었다. 


문제는 식사였다. 우리 둘 다 요리는 해본 적이 없었다. 점심은 회사에서 사 먹으면 됐는데 아침, 저녁은 만들어 먹어야 했다. 한동안은 가까이 사시는 엄마가 반찬을 만들어서 가져다주셨다. 그리고 결혼 후에 6개월쯤 지나서 난 회사를 그만두었다. 직장생활 3년 차가 되어서 일에 싫증을 느꼈기에 남편과 상의해 관두었다. 갑자기 낮에 시간이 많이 남았다. 그래서 고양시 여성회관에서 진행하는 요리수업에 등록했다. ‘내가 요리를 하다니.’ 떨려서 첫날에 갈지 말지 한참을 고민하다 들어간 기억이 난다. 

칼질은 무서웠다. 손가락을 베일듯해 집중해야 했다. 재료를 손질하는 법, 써는 법, 익히는 법, 양념 만드는 법을 차례로 배웠다. 불고기 양념은 간장과 설탕을 3대 1의 비율로 한다. 처음 만들어본 음식은 초등학교 실과 시간에 나온 탕평채였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다가 재료를 사서 남편에게 만들어줬더니 맛있다고 했다. 지금 떠올려보면 맛보다 나의 노력에  후한 점수를 준듯하다. 그 후로 일 년 가량 수업을 다녔다. 생선을 직접 손질해 조림도 할 수 있었다. 이쯤에는 요리에 재미가 붙었으나, 아이를 임신하고 입덧으로 음식 냄새를 못 맡았다. 그래서 더는 다닐 수가 없었다.




아이가 일곱 살이 되고 우리는 시부모님이 사시는 아파트-탄현동-로 들어가게 됐다. 딸 셋에 아들이 하나라 아버님은 결혼시키고부터 같이 살고 싶어 했다. 그런데 어머님의 반대로 신혼집을 마련해 주셨다. 그래서 난 결혼하고 10년 즈음에는 같이 살게 되겠거니 막연히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내 아가씨가 예상보다 일찍 결혼했고, 두 분만 남은 집에 우리가 들어가게 됐다. 내가 결혼한 지 8년째였다.


아이가 다섯 살에 유치원에 다니고부터 난 남편 사무실에서 같이 일했었다. 남편은 쇼핑몰을 했다. 거래처에 주문과 고객관리가 내 일이었다. 엄연한 나의 능력으로 스카우트된 거다. 아직도 남편은 여태껏 같이 일한 직원 중에 내가 일을 제일 잘한다고 말한다. 사무실은 행신동에 우리가 살던 아파트 앞 상가에 있었다. 그래서 난 아이를 등원시키고 사무실에서 일하다 아이 하원시간에 맞춰서 퇴근했다. 하지만 탄현동으로 이사하니 나의 출퇴근 시간을 제외하면 업무 시간이 3시간 남짓이었다. 이 무렵 쇼핑몰 주문건수가 많아져 직원을 한 명 더 늘렸다. 그래서 난 사무실에 나가지 않게 됐다.


행신동에서는 세 식구라 밑반찬에 찌개나 국 한 가지를 만들어 먹었다. 점심은 남편과 사무실에서 간단히 해 먹거나 사 먹었다. 그런데 탄현동에서는 완전히 달랐다. 시부모님이 계시니 세끼를 차려내야 했다. 다행히 어머님은 음식 솜씨도 좋으시고 요리를 즐겨하셨다. 아버님도 식성이 까탈스럽지 않고 골고루 잘 드셨다. 어머님은 다양한 재료를 쓰셨다. 일산시장에서 아귀를 사 와서 찜을 직접 하셨다. 난 이때까지 아귀찜은 사 먹는 음식이라고 여겼었다. 샤부샤부도 집에서 해 먹었다. 북어머리, 다시마, 무, 대파 등을 넣어 육수를 우려내고, 소고기와 각종 버섯과 야채를 넣어서 먹었다. 수육, 갈비찜, 장조림 등 거의 모든 음식이 집에서 가능했다. 점심에는 면요리를 주로 해 먹었다. 냉면, 칼국수, 수제비를 했다. 명절에는 차례음식을 만들고 만두와 송편도 빚었다. 결혼하고서도 설과 추석, 제사에 항상 탄현동에 와서 어머님과 상을 차렸다. 하지만 모든 음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장만하는 일은 차원이 달랐다.




나의 요리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중에서도 최고는 김치다. 매년 어머님이 김장을 하실 때 와서 같이 배추를 절이고 양념을 하고 담았다. 김장김치를 다 먹은 3월부터 그해 겨울 사이에 김치는 엄마가 담가 주셔서 먹기만 했었다. 그런데 어머님은 매달 김치를 담그셨다. 배추김치, 열무김치, 깍두기, 남편이 좋아하는 파김치. 봄동 무침도 하시고 겉절이도 자주 하셨다. 처음 같이 살 때는 어머님이 김치를 담그자고 하시면, 난 절여놓은 배추를 헹구고, 양념장을 넣는 정도로 도왔다. 그런데 3년쯤 뒤부터는 내가 할 때, 어머님이 간을 보고 양념을 더 넣고 하셨다. 그리고 두 해 지나고부터는 나 혼자 담그기 시작했다. 

그 해 아버님 생신이었다. 우리는 가족 생일에 주로 외식을 한다. 그래도 미역국과 잡채는 집에서 꼭 만든다. 생신이 월요일이라 그전 주 토요일에 다 같이 나가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큰 시누이가 점심 무렵에 집에 왔다. 내가 밥을 차려주자 고맙다고 먹으면서, 엄마가 만든 미역국과 잡채가 너무 맛있다고 말했다. 어머님은 웃으면서 둘 다 내가 만들었다고 말했다. 시누이는 어머님이 만든 것과 똑같다고 놀라워했다.


2024년 난 결혼 21년 차가 되었다. 그사이 둘째가 태어났다. 첫째는 열아홉 살 고등학교 3학년이고 둘째는 열두 살 초등학교 5학년이다. 그리고 아버님은 작년 봄에 돌아가셨다. 전날 내가 만든 음식으로 저녁을 든든히 드셨는데 마지막 식사였다. 지금 우리 식구는 다섯 명이다. 오늘 우리 집 식탁은 내가 요리한 김치찌개에 두부조림, 콩나물무침, 오이무침이 차려졌다. 식사 준비에 얼마나 공이 드는지는 요리해 본 사람만 안다. 고작 나물무침 한 가지를 만드는데 30분이 걸린다. 사 와서 다듬고 씻어 데친 다음 양념해 무쳐내야 한다. 쌀을 씻어 전기압력밥솥에 안치고, 그 사이 된장찌개는 맹물에 육수한 알 넣고 된장 풀고 애호박, 버섯, 두부 넣고 파와 마늘 넣고 멸치액젓으로 간하고 팔팔 끓여내야 한다. 식탁을 차리기까지 한 시간 반은 걸린다. 하지만 먹는 데는 15분 남짓이다. 요리는 품에 비해 가성비가 낮다. 날이 더워 지치고, 매일 요리하는 게 싫증 나고, 열심히 차려냈으나 반응이 시원찮으면 요리를 그만두고 싶다. 그래도 남편이 백숙을 해달라거나, 아이들이 카레라이스 한 그릇을 뚝딱 비우거나, 어머님이 생신에 미역국과 잡채를 해드리니 일찍 일어나느라 잠도 못 잤겠다고 맛있다며 좋아하실 때가 있어 요리하게 된다.  


내게 요리는 가족을 돌보는 방법이다. 내 요리는 식구들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된다. 그 속에 담긴 나의 정성과 사랑이 느껴질 것이다. 때로는 지치고 힘들지만 내가 요리를 할 수 있어 감사하다. 내일 아침은 또 뭐 해 먹나. 쿠팡 로켓프레시를 검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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