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사수들은 퇴근을 안합니다.'
직장 선배의 눈치를 보며 퇴근 시간을 맞추기 힘들어 하는 후배들에게 종종 하는 말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사수들도 퇴근을 한다.
다만 후배의 입장에서 사수들이 퇴근을 안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좀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사수들은 나처럼 퇴근 시간을 기다리는 것 같지 않고, 간혹 그것을 넘기더라도 크게 신경쓰지 않는 것 같다.' 이다.
이것을 후배의 시각에서 보면, '사수들은 퇴근을 하지 않는다.' 가 된다.
도대체 왜?
> 사수의 입장
'사수' 라는 말의 정의부터 좀 살펴보자. 다들 알겠지만, 사수는 원래 군대 용어다.
초소 근무 등에서 2인1조로 근무를 할 때 그 중 리더 역할을 하는 선임이다.
직장에서는 사수라는 말은 3년 이상 7년 이하정도의 선배를 지칭하는 말로 쓰이며,
대개 사수와 부사수는 공통의 중간관리자를 위에 두고 있다.
사수는 보통 사석에서는 '형' '누나' 로 불릴 수 있는 정도의 연배차를 갖는다.
후배가 대략 입사 후 2년 이내를 지칭하는 표현이라 쳤을 때 (20대 중반-후반), 사수들은 대개 30대 초반정도이다.
물론 정말 유치하게 후배들을 단순히 '길들이기' 위해서
[이 녀석이 나보다 정말 먼저 퇴근하나 보자..] 하면서 늦게 가는 사수도 있을 수 있다.
이런 사수들은 후배 입장에서 보기에도 그 전략이 빤해서 금방 알아차린다.
그러므로 이런 어린이 같은 사수는 좀 제쳐두기로 하고.
사수가 퇴근을 안하는 이유는 일단 '바쁘기' 때문이다.
바쁘다는 한자로 다망 (多忙) 하다고 표현되는데, 여기서 망 자는 마음 심 자에 망할 망자를 합쳐놓은 글자다.
즉 이들은 너무 바빠서 마음이 죽어있는 상태이다.
이들이 왜 그렇게 까지 바쁜지 생각을 해보자면,
후배님들이 맡고 있는 일이 무슨 일인지를 먼저 생각해보자.
후배님들은 보통 '잡일' 을 맡는다. 안타깝지만.
잡일이란 무엇인가?
잡일이란 잘한다고 해서 크게 티가 나지 않고, 못한다고 해서 크게 손해가 나진 않지만 주변 사람들이 귀찮아지는 일이다.
사무직이라면 문서수발 (폰트 예쁘게 쓰기, 문서 디자인하기) 팀내 분위기 증진 (회식때 대장님 옆에 앉기), 사무실 미화, 간식 보조 등이 있겠다. (슬프다. 근데 나도 다 해봤으니까 뭐...)
사수들은 보통 '실무'를 맡는다.
잡일과 달리 실무는 잘하면 티가 나고 공로가 된다.
그런데 일을 못하면 주변 사람들이 귀찮아지는 것이 아니라 책임이 발생한다.
그런데 이 책임이란 것이 혼자 지는 것이 아니라 대개 관리자와 그 책임을 함께 진다.
또한 책임은 승진 누락, 사내 왕따, 심하면 이직이나 퇴사 등의 무시무시한 결과로 연결될 수 있다.
이러한 무시무시한 결과는 빠른 퇴근 후 누릴 수 있는 다소간의 차별적인 행복 따위는 아득하게 초월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마음이 죽어있다. 행복을 찾을 여유가 없다. 어찌보면 직장생활에서 가장 행복에서 먼 시기라고 볼 수도 있다.
사수들은 퇴근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빠른 퇴근보다 훨씬 무서운 것에 쫓기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사수들은 자신이 일찍 퇴근을 하거나 휴가를 간다고 해서, 자신의 업무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결국 자기가 돌아와서 해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이른 퇴근이란게 별로 의미가 없다. 어차피 내일 일찍 와서 해야하니까.
> 관리자의 입장
여기서 관리자란 공무원 사회에서 과장이나 차장급, 일반 회사에서는 차장이나 부장급 정도를 의미한다.
30대 후반에서 40대 초중반에 해당하는 나이가 된다.
사수들과 마찬가지로, 후배들의 입장에서는 부장님도 좀처럼 퇴근을 안 한다.
이들이 퇴근하지 않는 것 처럼 보이는 이유는 사수들과는 약간 다르다.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먼저 쉬운 유형부터 살펴보자면
필자가 종종 언급하듯, 조직에서의 평가는 실적이 반, 인사가 반이다.
그런데 간혹 실적은 중간 이하인데, 인사 능력이 매우 뛰어나서 관리자가 된 사람들이 있다.
이런 유형은 관리자가 되면 대개 할 일이 별로 없다.
관리자가 될 즈음에는 본인의 후배나 주변 사람들이 필요한 일을 다 알아서 하는 구조가 되어있다.
그리고 이러한 유형은 자신이 성실하게 보이지 않는 것에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퇴근시간을 잘 지키는 정도가 아니라 그 시간을 넘겨 퇴근하여 성실한 것처럼 보이고자 한다.
그리고 (당연히) 본인의 팀원들에게도 그러한 행동을 요구하여 슬픔을 유발한다.
반대로, 실적이 인사능력보다 우수한 관리자들이 있다.
이들은 본인의 실적으로 평가받아 왔기 때문에, 더 나은 실적을 내고자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성실성보다는 창의력이나 기획력과 같은 본인만의 능력이 요구된다.
즉, 이들은 전문성을 갖추게 된다. 유능하고 전문성을 갖춘 이들에게는 출퇴근 시간은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오히려 짧더라도 온전하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성과를 내는데 훨씬 도움이 된다.
관리자가 되면 초년 때와 달리 출근에 좀 늦거나 저녁에 미리 나간다고 해서 문제될 일이 적다. 게다가 이들은 이미 우수한 실적으로 인해 성실성을 인정받고 있기 때문에, 출퇴근 시간을 엄밀하게 지킬 필요성을 덜 느낀다. 출퇴근 시간보다는 더 많은 실적을 내는 데 신경이 집중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런 분들은 대체로 출퇴근시간이 불규칙하다. 불규칙한 퇴근시간은 정규의 퇴근시간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후배 입장에서는 '퇴근하지 않는' 사람처럼 보인다. (분명히 6시가 되었는데 왜 안나가시는거지? ㅜㅜ 이렇게 보이니까.)
추가로, 앞서의 유형이든 후자의 유형이든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이 되면 퇴근 이후나 주말이 그렇게 기다려지는 요소가 아니다.
친구들과 만나서 불금을 보낼 에너지도 없고, 보낸다고 해도 별로 재미도 없다.
내 경험으로는 아무리 좋은 사람들과 만나도 8시가 넘으면 솔직히 집에 가서 아이들이랑 놀아주고 싶다.
휴가를 간다고 해도 부모님이나 자녀들을 챙겨야 하는 입장이 되기 때문에,
퇴근 후나 휴가 등에 대한 갈망이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후배들에 비해 많이 낮을 수 밖에 없다.
> 그러므로 당신은?
필자는 이제 40대 중반이고 관리하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지만 어쨌든 중간관리자다.
누구나 조직에 들어오면, 후배 => 사수 => 관리자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관리자부터 시작하는 사람은 없다.
이런 상황에서 후배님들께 하고 싶은 조언은,
후배의 업무 (잔무) 에서 빨리 사수의 업무 (실무) 로 넘어오고, 또 거기서 최대한 빨리 관리자 (전문성)으로 진행하도록 노력하라는 것이다.
잡무를 맡아서 진행하는 상태에서 칼퇴나 휴가를 오매불망 바라며 살아가면,
인간의 심리라는게 오매불망 바라면 불행하다. 똑같은 칼퇴라도, 정신없이 일하다가 퇴근이 다가오는게 빠르게 느껴지지, 오후 4시부터 시계 바라보다가 퇴근하면 빨리 퇴근해도 참 괴롭다.
그리고 앞서 언급하였듯이,
필자가 생각하기에 직장에서 행복을 찾기 가장 어려운 시기는 후배 때가 아니고 사수 때이다.
후배 때는 사실 에너지가 많아 이래저래 불만이 많아도 열정이 넘치고 틈날 때마다 불같은 행복을 느낄수가 있다.
반면에, 사수 즈음에는 삶의 무게도 차츰 무거워지고, 업무에 대한 책임도 느껴질 뿐 아니라 소위 '실력차' 가 나기 시작한다.
이 혹독한 시기를 잘 넘겨야 하는데, 자신이 어떤 업무를 잘 할수 있는지 판단하여 (본인이 창의형인가? 속도형인가? 인간형인가?) 맞는 업무를 자신에게 배치하고 맞지 않는 업무를 최대한 밀어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전문성을 가진 관리자가 될 수 있고, 이 때에 이르러 비로소 자신의 행복과 직장에서의 삶의 방향을 맞출 수 있게 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조언하자면,
내향적이고 사색적인 사람들은 후배 때가 무척 어렵다.
후배 때는 사실 직장에서 받는 인간적인 대우도 별로 좋지 않고, 하는 업무도 별로 재미가 없는 시기이지만
이 시기를 이겨낼 수 있는 큰 힘은 동년배 젊은이들의 friendship에서 나온다.
이 friendship을 힘으로 삼기 힘든 내향적인 사람들이 그래서 이 시기에 많이 퇴사한다.
게다가 전문성이 적은 업무를 맡고 있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사내 평가가 실적보다는 인사에 주로 기반한다. 그래서 내향적인 이들이 실력에 비해 박한 평가를 받게 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유형은 사수의 시기에 후배 때보다 삶의 질이 오히려 나아질 수 있고, 관리자 때까지 버틴다면 전문성이 있는 우수한 관리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직장생활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가능성도 높다.
그러니까 조금 더 버티고, 윗사람들이 부르는 식사 자리에 투자라고 생각하고 가라! 동년배들과 어울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게 쉽다. 눈치 보는 법을 배워라. 한 사람하고만 너무 친해지지 말고 사람들이 뭉쳐있는 무리에 가서 멍 때리더라도 들려오는 소식을 들어라.
샤이한 형의 경험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