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면도
1. 서시序詩
원시적인 것은 신비롭다.
아무런 발길 닿지 않았음에
성스러운 처녀림과
숫총각다운 거친 숨결 일으키는
바다로부터의 끝없는 밀려옴과 되밀림이
끝없이 반복되는 그리움의 날들
모든 꿈들이 일제히 일어나
춤을 추는 자연에서는 모든 것들이
정지된 시간 속에서 화석으로
기억될 뿐이었다.
고요 속에 잠을 자던 섬은
태고의 침묵을 깬 인간들의 발자국 소리에
큰 기지개를 켜고
인류의 역사에 동참하게 된다.
그럼 인간이란 무엇인가.
유일하게 두 발로 걸어 다니는 동물들의 돌연변이
무진장한 생식력으로 번식한 족속들을 키우기 위해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우는 침략자
그들이 지나는 곳에는 원시의 신비보다도
더 괴상한 불이라는 정복적인 무기가 있어
이 땅 모든 자연물들은 그들에게 무릎을 꿇었으니
이는 장차 지구 위에
피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모든 창조와 파괴의 역사는
인간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다.
2. 섬의 역사
섬은 안개에 덮여
비릿한 갯내음 속에 모습을 감추고
한 시대의 패배자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중원 전국시대
강한 침략군에 밀린
약소한 제후 아래 백성들은
동쪽으로 동쪽으로 해 뜨는 나라 찾아
항해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미 불타는 성을 뒤로하고
새로운 별천지를 향해 닻을 올린
그들 앞에 나타난 안개와 해송의 섬
서둘러 해안에 상륙한 최초의 인간들
무성한 처녀림을 헤치고 살 집을 짓고
쟁기질한 땅 위에 솟아나는 곡식들
원시의 처녀성은 어느덧 찢겨
붉은 피를 뿌리고 하늘에선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씨를 뿌리세, 땅 갈아엎으세.
어화만세 어화태평
바랄님이 이 땅에 내리사 축복 있네.
어화둥둥 어리둥둥
용왕님 오셔서 고길 주네.
어셩셩 어리셩셩 바라류 요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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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라류 요롬: 안면도 최초의 이름
3. 섬의 노래
얼라 얼라 어기 얼라
소낭구에 꽃이 피면
바랄님이 잠을 깬다.
얼라 얼라 어기 얼라
서쪽 하늘 불해덩이
용왕님이 오신단다.
어셩셩 어리셩셩 바라류 요롬
4. 남북시대
중원中原 유민들이 정착한 이후
섬은 평화와 축복으로 가득 차
모든 것들이 풍성한 나날이었다.
늦은 여름 큰 태풍이 바다와 섬을
뒤집어 놓고 지나간 후
서해가 온통 검은 기운으로
뒤덮였다.
중원을 호령하던 진秦나라도 망하고
제濟나라의 세력도 힘을 잃어
또 하나의 거대한 이동이 시작된 것이었다.
원주민들은 전쟁 준비
그들의 무기는 모두 녹여
농기구로 만들었기 때문에
싸울 무기가 없었다.
깨어진 평화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곡괭이, 쇠스랑, 도끼와 대창을 깎아
대항 준비
모든 포구는 폐쇄되고
낮은 해안선에는 목책과 철책 방어선
떨리는 마음
그러나 물러설 수 없는 땅
물리치리라.
드디어 밀물이 쏜살같이 들어오자
거대한 함선이 닻을 내리고
안면도 최초의 전쟁은 시작된다.
병술만兵戌灣에 닻을 내리고 상륙하여 기어오르는 적들을 향해
필사적인 저항을 하다 쓰러지는 군사들
피로 물들어 버린 백사장과 개펄을
바다는 썰물로 흔적 없이 지워 버리고
또 밀려오는 바다
저들의 싸움을 무심한 바다는 아는가 모르는가!
생존을 위한 싸움
인간들의 전쟁
섬은 침묵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갈매기들은 해안에 뒹구는 시신들을 파먹고
살아남은 자들은 살기 위해
남북으로 갈라 서로의 영토를 정하였다.
남쪽에는 먼저 온 유민들이 터전을 정하고,
북쪽에는 나중 온 유민들이 자리를 잡았다.
봄이면 산에 들에 피어나는 춘란과 새우란
가을이면 알알이 영그는 모감주나무 열매
평화의 세월이 또다시 안면도에 찾아들었다.
어셩셩 어리셩셩 바라류 요롬
5. 승언承彦 장군
통일신라시대 해상왕 장보고
당나라와 신라, 왜倭의 무역이 활발해지고
멀리 아라비아의 상인들까지 찾아오는 서해에
상선商船들을 탈취해 노략질하는 해적선을 소탕하고자
완도에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고
안면도에 승언承彦 장군을 보내 바다를 지키게 하였다.
어느 날 태안 안흥진安興鎭에 중국에서 내려온 해적들이
성을 함락하고 백성들을 살상殺傷한다는 급보를 받고
해적을 소탕하러 떠난 승언 장군
부인은 날마다 언덕에 올라 장군을 기다리다 죽어 바위가 되었고
해적을 진압하고 돌아온 승언 장군도 아내를 따라 죽어 바위가 되어
꽃지해변에 할미 할아비 바위의 전설이 되었다.
6. 삼별초 항전
아시아의 대제국 몽고의 40년 침략에 맞서 온 고려 조정이
1270년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還都하려 하자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으로 구성되었던 삼별초가
배중손裴仲孫 장군을 중심으로 항전抗戰을 시작한다.
천여 척의 전선을 이끌고 남으로 남으로 내려와 도착한 곳이
안면도 병술만兵戌灣 이곳에 망대望臺를 세우고
둔두리屯頭里, 발검拔劍배, 유황幼皇맞이, 목밭, 목축골, 줄밭머리, 마장터에
항전의 터를 잡는다.
삼별초가 머물다 떠나간 석성石城 터에는
청설모 먹이 찾아 기웃거리고
여름이면 찾아오는 관광객들 웃음소리
둔두리 앞바다 파도 소리 거세다.
7. 안면도 핵폐기장
1990년 11월 3일 안면도에 핵폐기장이 들어설 거라는 한겨레신문 보도에
안면도민 1만 5천 명은 파출소와 무기고를 공격하여 전소全燒시키고
안면교(연륙교)까지 진출하여 안면공화국을 외친다.
민중의 함성 소리에 놀란 대한민국
편안하게 잠자던 섬 안면도는 드디어 역사의 중심에 선다.
핵폐기장 백지화로 거둔 승리의 함성
8. 안면도 저녁노을축제 낭송 시
- 지는 노을은 새로운 희망이어라
저 해는 365일을 멈추지 않고 지구를 비추어 주었습니다.
동해 바다 위를 힘차게 차고 올라
이 나라 하늘 위를 변함없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저 해의 발자취를 따라
우리 삶의 흔적들도 노을과 함께 지려 합니다.
편히 잠자던 섬 안면도
1990년 핵폐기장 반대라는 항쟁으로
이 땅에 그 존재를 알린 이후
세속의 곤고함을 잊게 하는 망각의 땅 휴식의 땅으로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서해의 마지막 저녁노을 속에
우리의 흘러간 세월을 돌아봅니다.
안타깝고 되돌리고 싶은 나날들도 많았고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던 세월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 하늘에 번져 가는 노을 덩어리들처럼
사랑과 희망이라는 기억 또한 아름다움입니다.
축복입니다.
새로운 희망을 잉태하기 위한
거룩한 작별입니다.
황금빛으로 출렁이는 바닷물과 낙조
지금 아름다움을 향유하는 사람들에겐 분명
지는 노을은 새로운 희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