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발표 시집-회색 도시 엽서

회색 도시


도시는 온통 회색 안개에 정복당한 채

서서히 긴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한다

나는 거대한 짐승의 입 같은 지하도를 헤매는

한 마리 벌레처럼 표정 없는 얼굴들에 휩싸여

또 다른 입으로 토해져 나와

끝없는 미로의 빌딩 숲을 걷는다

표정 없이 우뚝 서 있는 빌딩마다

낮 전등이 켜지고

회색의 안개는 소리 없이 빌딩 숲을 배회할 때

나의 발걸음은 빌딩 속으로 향한다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도시의 풍경

눈앞에 보이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분출해 버린

콘크리트 조각품들

흙이 사라진 회색 도시의 물결 속에서

누가 흙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것인가

흙의 평화를 진실들을 두껍게 덮어버린

회색 도시에 언제까지나 나의 껍질들을

하나둘씩 벗겨내야만 하는가(1987)


엽서


먼 곳에서

아주 먼 곳에서 날아 온

엽서 한 장

파도 소리 가까이에서 몸짓하는 섬마을

온 밤을 뒤척이다 뱃고동 소리에 눈떠

새벽 바다에 서면

동쪽 하늘엔 온통 황금새 날아오르더라

다 저녁때

꽃잎처럼 바다로 떨어져 빛나는 햇살 바라보면

깊은 바다의 사연 조금이나마 느낄지도 몰라

외로움이라면 그것은 감청색 외로움

그리움이라면 그것은 노을빛 그리움

이곳 가을 들녘은 온통 들꽃 세상

들꽃들 세상

바다에서도 꽃은 피리라

다만 손 닿지 않는 곳에서

무형의 날갯짓으로 날아오르리

외로움 넘치면 노래하라

보고픔이 가득해 떠나는 뱃머리 꿈에 보이거든

이렇게 짠 내 풍기는 엽서 한 장

바다에 띄우렴

흐르다 흐르다 머무는 곳에

젊은 날 우리 있으리니(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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