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발표 시집-낯선 곳에서 하룻밤을 길

낯선 곳에서 하룻밤을



새 눈 트는 봄날

대지엔 어느덧 저녁 안개 머물러

긴 염전길 따라 홀로 걸어가네

처음 걸어보는 이 길에는

그 옛날 선인들의 발자국 박혀있어

흐린 시선 너머

서해로 하루의 해가 지누나

긴 노을 붉게 타올라

내님 향한 애타는 사랑만큼이나

가슴 뜨거워져

자욱이 사라지는 안개 저녁연기

모든 것들이 한 줌 꿈이어라

태양은 지고 대지는 식어도

이 땅 위에 흐르는 그리움은 남아

어제는 먼 충청도 섬마을

오늘은 경기 땅 달월 들판

내일은 또 어디일까

하루 일을 끝낸 염부의 귀갓길엔

마을에서 아이들과 놀다 돌아오는

바람이 먼저 맞이한다

염전 길 만큼이나 골 파인 볼 가

길게 뿜는 청자 담배 연기

하늘은 유채색 풍경화다

외양간 젖소 되새김질하는

시골집 사랑방에서 하룻밤 잠을 청하니

세월은 자꾸만 거꾸로 흘러 흘러

가슴에 맺힌 지난날들의 영상 피어나네

손 내밀어도 잡히지 않는 수많은 말들

온 방을 날아다니네

끝없이 벽에 부딪히며 솟아나고 있네(1988)



연대표가 새겨진 비석들 서 있는 무덤 곁을 지납니다

육신은 한 줌 흙이 되어 하얀 뼈만 곱게 숨을 쉴

나그네 여정을 살다 간 사람들

이곳에서는 부귀와 영화 번뇌와 고통 사라진

한갓 흔들리는 풀들의 꿈일 뿐입니다

나무들로 하늘 덮어버린 숲길을 갑니다

패일 대로 패이고 가끔 잡초에 묻혔다가

되살아나는 산길

꼬부랑 산길을 걸으면

아무도 없는데 혼자서 걷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따라옴을 느낍니다

무엇일까요 바람 혹은 세월

인생이랍니다 그림자 없는 길입니다

시리도록 파란 하는 마시며

길을 가고 있습니다

아주 먼 곳에서 입을 벌리고 있을

심연을 향해 웃으며 환호하며

미워하고 사랑하면서

선한 사람도 용서받지 못할 죄지은 사람도

모두 걷고 있는 길이 산 아래 보입니다

애초에 무엇인지도 모르고 태어난

우주의 사생아들

그들이 빠져나온 흙을 콘크리트로 덮으면서

걸어가는 마지막 지점 알고 있을까요

몸속에서 흐르는 붉은 피 그 향기로운 흙냄새

지울 수 있을까요

숲이 끝나는 곳

양지바른 마른 풀밭에 눕습니다

가벼이 가슴 덮어 주는 원초의 대기

하늘과 내가 만납니다(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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