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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인 권태주 May 03. 2024

시인과 어머니

시인과 어머니


          


문 밖에선 긴 겨울의 기다림이

흰 눈 되어 내리는 저녁

쇠죽을 끓이는 아궁이 앞에서

후끈한 시래깃국 냄새 나는 시를 쓰는

아들에게 어머니는

- 얘야! 시인이 되면 가난하다더라.

시는 뭐 하려고 쓰느냐.

근심 어린 눈빛으로 말했었다.

     

아궁이 속 타오르던 장작불도 꺼지고

이젠 어머니도 이 세상에 없다.

흰 눈 내려 가득 세상을 덮어도

어머니와 함께 보던 그 저녁

토방 위에 내리던 싸락눈만 못하다.

꺼져 가는 불씨 불어 가며 매운 연기 눈물 나던

그런 저녁이 아니다.

안방에선 동치미에 뜨끈한 숭늉

문밖에 소리 없이 싸락눈이 내리는

그런 시절은 다시없다.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이제는 혼자서 가야 할 길

내가 할 수 있는 건

끝날까지 시를 쓰는 일과

바람 한 줌씩 움켜잡는 일

그 저녁 가슴에 고이 묻어 두는 일

먼 훗날 내 아이에게 지울 수 없는

추억 만들어 주는 일


----------------

* 에필로그-  


나의 고등학교 시절


               

  1978년 겨울, 안면도 촌놈 섬마을 중학생 권태주가 공주고등학교 입학시험을 보러 새벽 첫 버스에 올랐다. 박정희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의 성장에 맞추어 짜인 입시로 인해 직할시들이 고교평준화가 되어서 대전시도 평준화가 되어 고교 입시를 하게 되었다. 당연히 비평준화였던 공주에 수재들이 모여들었다. 공주는 교육도시로 이름이 나 있어서 시민보다 학생이 많다고 할 정도였다. 공주사범대학교, 공주교육대학교, 공주간호전문대학교 등이 있어서 시민들은 집집마다 하숙을 해서 하숙생들이 넘쳐났다.

  안면도에서 출발한 버스는 태안과 서산을 지나 홍성읍을 거쳐 예산을 들렀다가 천안까지 네 시간이나 걸려 갔다. 천안에서 다시 공주로 가는 버스를 갈아탔는데 아뿔싸! 비포장 도로였던 것이다. 한 시간이 넘게 터덜거리는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공주 시외터미널은 공산성 아래에 있었다. 마중 나온 정0훈 중학교 선배를 따라 일곱 명의 촌놈들이 오리 새끼들처럼 중학동에 있는 하숙집에 갔다. 예비 소집을 마치고 와서 저녁을 먹자마자 우리는 여독으로 곯아떨어졌다. 다음 날 입학시험을 보고 되돌아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후회막심이었다. 처음 생각처럼 천안에 새로 생기는 천안00이라는 사립고등학교에 갈 것을 담임에게 속았다는 찝찝함이 남았다. 전교 10등 안에 드는 친구들이 시험을 보러 갔으니 전원합격! 바야흐로 공주에서의 고등학교 생활이 시작되었다.     

  고등학교 1학년의 검은 교복에 배지와 명찰을 달고 봉황동에 있는 하숙집에서 가방을 폼나게 들고 등교했다.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였는데 1학년이 12반 720명, 전교생이 2,000명이 넘는 엄청난 숫자였다. 1학년 10반 권태주! 담임 전0수 60명의 학우와 공부를 하게 되었다. 교장선생님은 모교의 부활을 외치며 오신 0호교장선생님이셨는데 아쉽게 1학년 말 12월에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그 당시 선배 중에서 JP로 이름난 김종필 국무총리와 정석모 국회의원이 있었다. 교장선생님은 첫 훈화 말씀에 "여러분은 전국에서 모인 수재들이니 첫째도 학력!, 둘째도 학력!, 셋째도 학력!"이라며 명문 공주고의 전통을 다시 세울 것을 강조했다. 또한 1977년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에서 공주고가 포수 김경문을 중심으로 첫 우승을 해서 동문들의 격려와 장학금이 쇄도했다.

  나도 고향에서 학비와 하숙비를 대느라 고생하시는 어머님과 큰형님 가족들을 생각하며 공부에만 집중했다. 점점 성적이 올라 월말 평가에서 내 이름이 교무실 벽에 당당히 장학생 명단으로 붙어 있었다. 선배들이 기탁한 봉황장학금과 JP장학금은 2학년 초까지 받을 수 있었다.  


  1학년 어느 봄날 우리 하숙집 친구들은 목욕준비물을 챙겨 근처에 있는 목욕탕에 가서 서로 등을 밀어주며 십 년 묵은 때를 모두 벗기고 왔다. 첫날은 몸이 개운하고 시원했는데 다음날부터 몸 여러 곳이 빨갛게 부풀어 오르고 가렵기 시작했다. 약국에 가서 알아보니 봄철에 유행하는 '옴'이라는 아주 심한 피부병이었다. 옴균이 피부에 알을 까서 나중에 곪기까지 해서 쉽게 낫지 않아 긁기 일쑤였고 고통스러운 2년의 세월을 보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성경의 인물 중에서도 이 옴이라는 피부병으로 고생한 욥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하지만 나의 학구열은 멈추지 않았다. 공부가 끝나면 야간자습, 그 후에는 공주사대생들에게 영어, 수학 과외를 받으며 4당 5락(4시간 자면 대학 합격, 5시간 자면 탈락)이라는 일념으로 공부에 매진했다. 그 결과 1학년 마지막 평가에서 전교 2등이라는 성과를 내게 되었다. 당시에 1위를 했던 친구는 현재 임O성 서울교육대학교 총장이다.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좋은 성적으로 어머님과 선생님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는데 2학년에 올라가며 문·이과 선택에서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되었다. 나는 미래의 목표가 뚜렷하지는 않았지만 숙부의 권유에 따라 법대에 진학하게 되면 판검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월간 잡지에서 미래에는 은행원이 가장 성공한 직업인이 될 것이라는 기사를 보고 이과를 선택하게 되었다. 수학 2, 물리, 생물, 화학, 지구과학 등의 과목들은 공부하면 할수록 재미보다는 스트레스를 안겨 주었다. 안 되는 것을 억지로 공부하려고 하니 결국 스트레스로 편두통과 축농증이 찾아왔다. 고3이 되어서 고향은 먼데 포기하고 돌아가고 싶었지만 자식의 뒷바라지를 위해 바다에서 조개 잡고 굴 따고 김을 해서 학비를 보내주시는 어머님과 큰형님의 얼굴이 아른거려서 포기할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악으로 깡으로 버티며 입시 준비를 했다. 마침내 첫 학력고사에서 원하는 성적은 못 나왔지만 서울에 있는 국립교대나 시립대에 도전할 수 있었다. 서울에 가서 직접 원서를 샀지만 시립대 도시행정학과 원서는 쓰지않고 서울교대 원서만 작성해서 했다. 이과에 원서를 내면 학력고사 점수의 10%가산 혜택이 있는데 굳이 문과를 선택했다. 이과로 지원했더라면 무난히 합격했을텐데 하지만 최종 결과는 불합격! 이것이 프로스트가 말한 가지않은 길을 선택한 결과였다.

  고등학교 3년간의 학업을 마치고 패배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추운 겨울 어스름이 내리는 저녁에 아궁이에서 쇠죽을 끓이는 어머니 옆에 쪼그리고 앉아 불 앞에 언 손을 내밀며 말했다. "어머니, 죄송해유. 저 대학 떨어졌어요." 닭똥 같은 눈물이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떨어졌다. 어머니는 아들의 손을 잡으며. "잘 돌아왔다. 포기하지 말고 다시 시작해 보렴. 어머니는 하나도 서운하지 않어. 괜찮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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