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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인 권태주 May 01. 2024

하늘타리

하늘타리



     

가을

빈손으로 하늘을 탄다.

거친 벼랑도 심연도 아닌

무공無空으로 무심히 떨어졌던

하지만 필연이었던 한 톨 씨알     

날마다 야위어만 가던 병든 아버지

햇빛보다 더 고운 삶의 물을 주던

양지 쪽 하늘타리

하늘 타고 먼 시공時空으로 가려 했던

아버지의 마지막 소망     

오늘은 석류 붉게 타는 저녁

아버지의 하늘이 주렁주렁 달렸다.

오르지 못하는 나무는 멀리서 푸르더니

노을 지는 산자락

저 홀로 피어난 그리움

하늘을 타고 있다.


* 하늘타리·과루등·하늘수박·천선지루라고도 한다. 산기슭 이하에서 자란다. 뿌리는 고구마같이 굵어지고 줄기는 덩굴손으로 다른 물체를 감으면서 올라간다. 잎은 어긋나고 단풍잎처럼 5∼7개로 갈라지며 갈래조각에 톱니가 있고 밑은 심장밑 모양이다.

꽃은 7∼8월에 피고 2가화이며 흰색이다. 수꽃은 수상꽃차례로 달리고 암꽃은 1개씩 달린다. 꽃받침과 화관은 각각 5개로 갈라지고 화관갈래조각은 실처럼 다시 갈라진다. 수술은 3개, 암술은 1개이다. 열매는 둥글고 지름 7cm 정도이며 오렌지색으로 익고 종자는 다갈색을 띤다.

한방에서는 뿌리를 왕과근(王瓜根), 열매를 토과실(土瓜實), 종자를 토과인(土瓜仁)이라고 하며 약용한다. 뿌리는 통경·이뇨·배농(排膿)에 쓰고 과육은 민간에서 화상과 동상에 사용하며 종자는 거담·진해·진통에 쓰거나 소염제로 쓴다. 뿌리에서 받은 녹말은 식용하거나 약용한다.

한국·일본·타이완·중국·몽골에 분포한다. 잎갈래조각에 톱니가 없고 열매가 타원형인 것을 노랑하눌타리(var. japonica)라고 하며 일본에 분포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하늘타리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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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나의 중학생 시절               

  

  1학년 3반 권태주! 담임 홍0태 선생님

  나는 우리 집에서 30리 길이나 되는 중학교에 가게 되었다섬마을에 있는 중학교가 두 개였는데 한 개는 고남면에 있는 사립 중학교였고 우리는 안면읍에 가까운 공립 중학교에 가게 되었다나는 5형제 중에 막내였는데 큰형부터 3형제는 이미 중학교를 거쳤고 중3의 넷째 형과 막내인 나만 중1이었다아버지께서는 읍내에서 교복을 사 오셨는데 중3까지 오래 입어야 한다고 너무 큰 교복이어서 어머니께서 단을 줄여주셨다결국 중때 교복을 다시 맞춰서 멋있게 입고 다녔다.

  중학교 1학년 미술 시간에 나의 그림 솜씨가 미술선생님의 눈에 들었었나 보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 미술 대표로 대회에 나갔던 실력이어서 그런지 다른 친구들의 솜씨와는 차이가 났던 것이다. 미술선생님께서는 학교 건너편 해송이 우거진 산 아래 집에 사셨는데 점심시간마다 사모님이 해주시는 도시락 심부름을 시키셨다. 나는 수업 종 치기 10분 전에 매일 도시락을 가지러 다녔다. 어느 가을 길옆의 포도나무에 포도가 탐스럽게 익어가고 있었는데 군침이 돌았지만 참고 한 송이도 따 먹지 않고 심부름을 완수했다. 우리 동네 학생들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동네에 살았는데 새벽에 등잔불 아래에서 밥을 먹고 30리 길을 걸어 다녀야 했다. 1학기 월말 평가에서 6개 반 학생 중 전교 1등을 해서 부모님의 기대가 커졌다. 덕분에 같은 반 친구와 중학교 주변에서 자취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중학교 2학년 봄 음력 4월 12일에 안타깝게도 아버지께서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죽음이 믿기지 않아 눈물도 나지 않는 삼일장을 빗속에서 치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아 학급에서 나를 자주 괴롭히던 친구와 교실에서 싸움을 하게 되었다. 그 친구는 중학교 가까운 마을에 살아서인지 우리처럼 먼 동네에서 온 친구들을 무시하고 자주 괴롭혔다. 특히 그 동네 여러 명이 어울려서 점심시간에 귀찮게 하기 일쑤였다. 그날도 다음날부터 시작되는 월말 평가를 준비하느라 점심때도 놀지 않고 공부를 하고 있었다. 마침 한 친구가 등을 툭툭 치며 나를 자극했다. 싸움이 시작되었고 나는 왼손잡이로 집에서 형들에게 배운 권투 실력을 발휘해 펀치를 날렸다. 마침내 그 친구의 코에서 코피가 터졌고 승리는 나의 것이었다. 다른 무리의 친구들이 와서 나를 때렸지만 나는 아프지 않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한 놈만 팬다. 다음에는 누구 차례인지 내가 정한다."라며 웃어넘겼다. 그 이후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않아서 나의 중학교 2학년도 잘 지나갔다.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는 클럽 활동 시간에 문예반에 들어가게 되었다. 국어시험만 보면 늘 상위권이어서 이0순선생님이 나를 문예반으로 부르셨다. 여자선생님이신 데다 목소리도 낭랑하게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나 '못 잊어', '산유화'를 낭송하셔서 나는 선생님의 팬이 되었다. 그때 나도 모르게 나도 어른이 되어서 시인이 되어야 하겠다는 다짐을 한 계기가 되었다.

  봄 소풍으로 삼봉이라는 바닷가까지 걸어갔다 오는 일정을 친구들과 즐겁게 보내고 자취방으로 왔는데 한 갈래머리 여학생이 편지와 선물을 주고 갔다. 한 마디로 러브레터였다. 오랫동안 지켜보았고 사귀고 싶다는 편지였다. 나도 싫지는 않아 하교 후 가끔 만나 빵도 먹고 같이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으며 우정을 나누자고 했다. 그 사진은 없어졌지만 가슴이 콩닥거리는 아련한 추억이 되었다.


  중학교 3학년이 끝나갈 무렵 고등학교 원서를 써야 하는 시기가 되었다. 아버지께서 안 계셨지만 어머니와 큰형님은 나에 대한 기대가 크셔서 고등학교 진학을 읍내로 원하셨다. 하지만 담임이셨던 최0규선생님께서는 사림이란 모름지기 큰물에 가서 배워야 한다고 공주로 유학을 권하셨다. 대전이 연합고사로 평준화가 되어서 나는 천안에 생긴 신흥 사립학교 진학을 희망했지만 담임선생님께서는 일관되게 공주고등학교로의 진학을 권하셨고 결국 공주고등학교로 원서를 쓰게 되었다. 결국 안면도 촌놈 섬사람의 공주에서의 피 말리는 사투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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