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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Oct 20. 2023

가문과 종교가 결합된 이슬람 공동체 '움마'

부족과 신앙 - 이슬람 공동체 '움마'의 2축  

움마’(이슬람 공동체)의 한축 '이슬람' 

  - 이슬람 제국의 확장과 정교일치 - 이슬람 원리주의

  - 이슬람 ‘원리주의’ 사우디 왕실의 ‘와하비즘’ 

'움마'의 또 다른 한축 '부족'

  - 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부족장 

  - 부족주의와 가문의 명예 

  - 좋은 가문 출신의 협조원과 방위 산업 장비 수출 활동


부족과 신앙 - 이슬람 공동체 '움마'의 2축  

역사상 가장 거대한 이슬람 제국은 아랍의 한 유목민 부족에서 출발하였다. AD 620년경 아라비아반도의 ‘메카’에서, 아랍 유목민의 지도자인 ‘무함마드’가 이슬람을 창시한 이후, 그의 추종자에 의한 4명의 ‘정통 칼리프’ 시대에는 이슬람을 믿는 아랍 세력이 급격히 팽창하였다. 


이처럼, 제국이 확장되자 기존 부족사회에 어느 날,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들어섰다. 무함마드 이래, 사회, 정치, 문화, 경제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이슬람'이 부족사회에 도입되자, 복종과 헌신의 대상은, 자연스레 ‘기존의 부족’과 '이슬람' 종교를 결합한 ‘움마’ 즉, ‘이슬람 사회 공동체’가 되었다. 이슬람의 '움마'는 모든 무슬림의 공동체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아랍어의 '국가' 또는 '국민'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나왔다. 


모든 무슬림은 서로 형제자매이며, 종교적, 인종적, 문화적 배경이 다르더라도 '움마'의 일원으로서 연대를 이루고 있기에, 모두가 알라(신) 앞에서 평등하며, 서로 사랑하고 배려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 때문에, 이슬람의 역사적 발전에서 '움마'는 다양한 문화와 언어를 가진 다양한 지역의 무슬림들이 서로 교류하고 협력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이슬람은 ‘인간과 신의 수직적 관계’를 강조하는 종교적 교리를 강조하였지만, 특이하게도, 국가에 대한 소속감이나 충성심을 내세우는 ‘국가적 정체성’을 강요하지 않았다. 자연히, 사회적으로 개인 간의 대인관계는 서로를 독립적인 요소로 생각하였고, 느슨한 수평적 관계를 유지하였다. 


움마’ (이슬람 공동체)의 한축 '이슬람' 

- 이슬람 제국의 확장과 정교일치 - 이슬람 원리주의

무함마드 이후, 제국이 급속하게 커져 가자, 이슬람 세계를 지배하였던 무함마드를  계승한 자 - 즉, 선출된 정통 칼리프들(아부 바크르, 오마르, 오스만, 알리 등 4명)은, 이슬람 종교의 '이상 실현'에 필요한 세속적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슬람이 정교일치가 되는 순간이었다.


급격하게 확산되는 이슬람(출처: 네이버 포스트)

정통 칼리프 시대를 거친 이후, 최초의 아랍계 중심의 세습왕조로 출발한 ‘우마이야’(AD 661-750) 왕조는 서쪽으로는 ‘지브롤터’를 지나 711년에는 이베리아 반도까지, 동쪽으로는‘펀잡’, ‘발루치스탄’ 지역 (현재의 파키스탄)까지 진출하였다. 그리고, 뒤를 이어 AD 750년에 건국된 ‘압바스’ 왕조는, 아랍계와 비아랍계가 이슬람 안에서 더불어 사는 ‘무슬림 평등’ 원칙이 확립되었고, 사실상 ‘아랍’이 ‘이슬람’으로 진화하여 이슬람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이슬람은 두 제국에서도 항상 그 중심에 있었다.


한편, 제국을 다스리는 소수의 아랍인은 광대한 정복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서 화합과 평등의 통치 철학을 도입했다. 그들은 새 점령지의 기존 토착세력 (부족이나 가문)을 그대로 활용하여 통치하되, 세금 징수와 군사적 통제로 제국을 운영하였다. 이처럼, 기존 부족의 정치 문화나 행태를 점령지의 법규로 인정해 준 ‘부족주의’ 결과로, 각 부족은 ‘이슬람’ 안에서 자신만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는 곧 큰 확장성을 제공하여 부족 중심의 유목사회인 북아프리카, 아랍,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이슬람이 급속도로 확산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이슬람은 광대한 지리적인 간격에도 불구하고 각 부족을 하나로 묶는 거대한 정신적인 주체가 되었다.  


또한, 정통 칼리프들은 제국의 구성원 상호 간에 가져야 할 윤리적, 법적 규범을, 현실사회의 생활 규범으로 적용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졌다. 그리하여, 정치적 신앙공동체로서 ‘정교일치 (政敎一致)를 앞세우며 이슬람을 국교로 지정하였다. 뒤이어, 경전인 ‘꾸란’과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에 의해, 종교가 이상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세속적 권력’을 장악하고 제국의 구성원에게 ‘일상생활의 규범’을 요구하려는 정체되고 완고한 사상이 형성되었다. 이것이, ‘이슬람 원리주의’(지식백과, ‘이슬람 원리주의’)의 출발이었다. 


이슬람 원리주의자 집회

이처럼, 이슬람 원리주의는, 1,400여 년 전 무함마드가 ‘메디나’ 시절 세속적인 권력과 종교적 권위를 갖춘 ‘정교일치’의 국가를 건설할 때, 알라(신)께 구한 사회적 계시인, ‘움마’ (이슬람 ‘사회 공동체’)를 모방한 것으로서, 이상적인 ‘이슬람적’ 인간과 사회를 구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무슬림 개개인은 이런 종교적 사상의 틀속에서 오랫동안 대를 이어 살아오는 동안, 의식 구조, 신념, 가치관, 사고체계, 관습이나 행동 등 삶의 모든 분야에서 이 사상과 동화되었다. 그 결과, 이슬람 종교는 자연스레 서민 생활의 기준으로 자리 잡고, 20세기 초까지 이슬람권을 깊숙하게 지배하였다. 이 때문에, 무슬림의 ‘알라(신)’에 대한 ‘신성’(神性)은 오늘날까지 강하게 유지되어 왔으며, 이슬람이 국교인 국가에서는 전 국민이 '경건한 삶'을 추구하며 마치, 수도생활을 하는 것처럼 6 신과 5행을 준수하며 꾸란과 율법에 따라 살아간다.


- 이슬람 ‘원리주의’ 사우디 왕실의 ‘와하비즘’ 

사우디아라비아는 사우디부족에 ‘와하비즘’을 도입하여 형성된 ‘이슬람 공동체(움마)’의 모습이다. 그런데, 이 ‘와하비즘’은, 이슬람 테러조직에 자극을 준 ‘이슬람 극단주의’의 사우디 버전으로, 한동안 국제사회에 테러 공포를 몰고 왔던 시대착오적인 ‘수니파 극단주의 이슬람국가(IS, Islamic State)’ 의 사상적 뿌리가 되었다.

그런 까닭으로, 이슬람국가(IS)가 중동지역 정세 불안과 서구 무슬림 테러의 정점에 섰을 때, 사우디, 쿠웨이트, 카타르 왕실의 일부 수니파 원리주의자 왕족들이, 역시 사우디인으로 9.11 테러를 주도한 '오사마 빈 라덴'의 ‘알카에다’는 물론, IS에도 자금 지원과 후원을 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있었다. 물론, 이들 왕실은 즉각 공식적으로 부인했지만, 그들이 같은 이념을 공유한 테러집단을 지원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와하비즘'을 따르는 테러리스트 '이슬람 국가'(IS)

기득권층인 이슬람 왕족이 '알카에다'나 'IS' 같은 테러 조직을 후원하였다는 게 우리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지만, ‘진정한 이슬람 공동체’를 건설하려는 수니파 원리주의자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사우디, 카타르 등의 아랍 왕국의 사상적 배경은 이슬람 원리주의인 ‘와하비즘’인데, 그 원조는 13세기 경 발전된 '수니파 원리주의'로 이슬람 세계를 ‘칼리프’가 통치하는 이슬람 제국 건설을 목표로 하며, 엄격한 이슬람 원리주의로 율법과 종교 복고주의적 성향이 강한 '살라피즘'이었다. 


이 때문에, 사우디, 카타르 왕족 중 일부는 자신이 속한 왕국이 ‘이교도 (서방)와 거래하며’, 알라(신)의 율법이 아니라 ‘사람이 통치하는 가짜 이슬람 국가’이기에, 이를 전복시켜야 한다고까지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들 이외의 아랍 왕가의 일부세력도 IS가 성장하기 전부터, 그 모체 세력을 지원하였다. 그 이유는, 이라크, 시리아 지역에서 활동하는 IS세력이 더 커지는 데 대한 염려보다는, 그들과 결이 다른 시리아와 이라크 내 '시아파' 정권의 몰락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특히, 사우디 왕실은 미국이 절정기에 달한 IS격퇴를 논의하였을 때에, IS퇴치에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IS가 몰락해 가자, 그 직전에서야 미국과 1,100억 달러 상당의 무기 계약을 맺었다. 그러자, 미국은 그 대가로 서구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란과의 핵 협정을 파기하였다. 이들은 IS를 버리고도 이란 등의 시아파 견제에 성공한 듯하다. 미국은 냉전시대에, 아프간이나 중동에 대한 무신론적 공산주의 소련의 사상적인 영향력을 견제하고자 ‘이이제이 (以夷制夷)’ 전략으로, 이슬람 원리주의인 ‘와하비즘’을 전폭 지원하였다. 하지만, 당시 인물들 모두가 이슬람 원리주의자로서 반미활동을 하고 있으니, 미국이 이들의 세력을 키워 준 셈이다. 한 때,  IS는 무자비한 테러와 잔혹한 수법으로, 국제적 관심을 끌었으나 이제는 이슬람 문제의 한 부분일 뿐이다.


'움마'의 또 다른 한축 '부족' 

- 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부족장 

근세 들어, 산업혁명으로 무장한 서구 제국주의가 약 200여 년에 걸쳐, 아랍 등 이슬람 지역을 침공하자, 거대 제국 ‘오스만 터키’는, 서구 제국 (帝國) 주의에게 안일하고 무기력하게 대처하여 많은 영토를 상실하였다. 하지만, 정치권력이 바뀌어도 아랍의 이슬람 중심 율법주의는 바뀌지 않았다. 반면에, 식민지 확보에 주력하던 서구 열강들은, 현지 주민들의 생활에 대해 무지하였다. 서구는 이 지역을 지배하는 동안 그저 무자비한 박해와 탄압으로, 기존의 공동체를 와해시키려 하였고,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인위적인 국경선을 그었다. 


그러나, 이렇게 ‘인위적인 주권을 가진 국가’는 ‘알라(신)의 통치권’과 ‘움마의 우위’에 대한 지역 부족민들 (혈연 중심)의 믿음과는 공존하기 어렵다. 서구가 그어놓은 경계선이 아랍 각국의 국경선이 되었지만, 베두인 등 많은 유목민은 부족장의 통제아래 여전히 양 떼를 몰고 국경선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조상이 하던 대로 '알라(신)'을 따르며, 사막의 목초지를 찾아 떠돌아다닌다. 이들도, 이슬람 사회 공동체 '움마'의 일원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만 터키’와 서구가 물러가자, ‘오스만 터키’에 복속하던 '아랍' 각 지역 부족은, 각각 독립을 추구하였다. 이 중 ‘압둘 아지즈’는 사우디아라비아를 건국하였고, ‘하세미트’ 가문의 형제인 ‘파이잘’은 이라크를, 그리고 ‘압둘라’는 요르단을 각각 건국하였다. 이처럼,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모두 22개의 아랍국이 건국되었지만, 아랍 각국은 이런 '움마'의 확대된 모습일 뿐이다. 이들은 거의 모두 왕정이나 독재국가인데, 쿠웨이트, 콰타르, 오만, UAE, 사우디, 바레인 등의 왕정국가는, 기존 ‘부족’과 이슬람이 결합한 ‘이슬람공동체 (‘움마’)’로 형성된 전형적인 ‘가문 중심’의 권력체제이며, ‘사우디아라비아’가 그 대표적이다


‘사우드’ 족의 부족장으로 1932년 ‘사우디아라비아’를 건국한 ‘압둘 아지즈’는 ‘와하비즘’이라는 이슬람 원리주의를 표방하며 오늘날 사우디를 가장 엄격한 종교국가로 만들었고, 석유 발견으로 돈방석에 앉게 되자, ‘가문의 부족장’으로서 '부족민을 먹여 살리는’ 부족의 오랜 전통에 따라, 전 국민에게 대학 교육과 의료, 주택, 전기, 가스, 수도를 무상으로 제공하였다. 사우디처럼 걸프만 아랍국(GCC) 국가의 왕들도 부족장으로서 부족민에게 보편적 무상 복지를 제공하였는데, 이는 비이슬람권 기독교와 자본주의로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부족주의가 갖는 문제 또한 적지 않다. 다음은, 사우디의 ‘압둘 아지즈’ 관련 기사이다.

「…. 1953년에 사망한 그는 왕실의 안정을 위해 ‘부자상속’이 아니라 ‘형제상속’이라는 유지를 남겨, 사우디 왕실에서, 형제세대의 왕위계승이 끝나기 전에 손자세대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게 하였다. 덕분에 ‘압둘 아지즈’의 36명의 아들 중 6명의 형제가 차례로 왕위에 올랐지만, 세월이 지나 왕위 계승이 가능한 이들 형제들도 이제는 모두 늙어 노인정치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압둘 아지즈’의 장자였던 2대 ‘사우드’ 국왕이래 지켜오던 형제상속은, 2017년 왕위계승 위원회가 현 ‘살만’ 국왕의 아들 ‘무함마드 빈 살만’ 왕자를 왕세자로 임명하며 끝났다. 그 사이 왕자와 공주는 15,000여 명이 태어났다….」 (조선일보, ‘신중동 천일야화’, 인남식 (2016. 3. 16) 요약)


남은 문제는 왕족의 생계 문제다. 사우디 왕정은 수 천명에 달하는 왕손의 생계를 위해 국방 등 국가사업에 참여를 허용한다. 사우디 군 무기체계는 필요성보다 왕손들 로비의 결과물로 왕손의 생계유지를 위해, 군 규모에 비해 장비가 많이 도입되었다. 이로 인해, 사우디 군은 미국의 다양한 무기체계를 ‘백화점식’으로 보유하고 있으며, 어떤 장비는 포장도 뜯지 않은 채 창고 속에 보관되어 있다. 세상은 빠르게 바뀌는데 왕실은 여전히 고루하다. 미국의 안보 우산과 고유가에 부른 배를 두드리던 시대는 지났지만, 부족주의는 이들의 근간이다.  


부족주의와 가문의 명예 

우리는 ‘국가와 국민의 이익’이 중요하지만, 오아시스를 배경으로 살아가는 유목민은 오랜 전통인 부족주의적 ‘가문의 결속력’을 중시하였다. 이는 비단, 사우디 같은 왕정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이집트 같은 공화국도 오랜 군부독재로 국민 주권주의 개념이 희박하고, 권력자 집안 간의 인맥 형성은 여느 왕국에 못지않다. 무슬림에게는 부족으로 대표되는 가문 관계가 중요하며, 부족이나 가문에 대한 명예심도 그런 전통의 예이다. 


가문에 대한 명예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들의 이름에서 알 수 있다. 자식은 부모의 성을 따르나, 이름까지 공유하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아랍인의 이름에는 성 (姓, Last name) 보다 자신이 기억하는 조상의 이름을 포함한다. 맨 앞이 부모로부터 받은 이름(First name)이고, 그다음은 아버지의 이름, 그리고 가문의 이름이다. 예컨대, ‘살만 빈 압둘 아지즈 알 사우드’는 현재의 사우디 국왕이다. ‘살만’은 그의 이름이고 ‘빈 압둘 아지즈’는  ‘압둘 아지즈의 아들’이며, ‘압둘 아지즈’는 사우디 왕국의 건국자이다. ‘알 사우드’는 사우디 가문이라는 뜻이다.  현 왕세자 ‘무함마드 빈 살만 알 사우드’는 사우디 가문의 ‘살만의 아들’ 무함마드라는 뜻이다.


이들은 개인보다, 부족의 ‘명예를 최상의 가치’로 여기므로, 가문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고 집안 구성원 개개인의 잘못에도 보호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자신들끼리는 부족, 집안 간 서로의 잘못에 대해서는 대놓고 비난하기도 하지만... 이 같은, ‘혈통주의’는 같은(?) 뿌리를 둔 유대교의 영향으로 보인다. 구약성경은, 역사의 흐름에 따라 선지자의 관점에서 ‘여호와’와 관련되는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다분히 율법적인 부분과 ‘야곱’의 자손인 12지파의 역할로 혈통주의를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이들 12지파 중에서 ‘레위’ 지파만 성막 안에서 하느님께 제사를 지낼 수 있어, 양을 키우거나 농사를 짓지 않고도 제물을 받는 제사장으로서 특권층이었다. 


유대교처럼, 이슬람의 수니파나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혈통을 매우 강조한다. 수니파는 무함마드의 자손이 아니어도 그의 ‘꾸라이쉬’ 부족 출신이면 ‘칼리프’가 될 수 있지만,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혈통이 아니면 ‘이맘’이나, ‘칼리프’가 될 수 없었다. 항간의 ‘금수저’ 논란처럼 출신 부족이나 가문이 이들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가문이나 혈연을 중시하는 사회는 내 가족, 내 집안을 자신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모두 나의 소유와 연결한다. 즉, 부족의 일원으로 가문의 명예를 곧 자신의 명예로 알고, 가문의 이익에 사활을 건다. 최근, 살만 왕세자는 자신의 이복형을 세계 최대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 사장으로 앉혔다. 그리고, 정부 각 분야의 고위직을 그의 측근이 독점하였다. 사우디는 국가라기보다 '살만'의 사유 재산에 가깝고, 모두 가문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 


이처럼, 아랍국가에서는 부족 중의 누군가가 고위직에 오르면, 그 부족이 함께하며, 그들만의 인간관계는 장관급 인사까지 움직인다. 가문은 비즈니스의 매개체가 된다. 조폭이나 패거리 정치처럼, 부족과 부족이 얽히면 때로는, 거짓과 부정, 그리고 부패까지도 용납될 정도로 집안이나 가문에 대한 결속력은 유별나다. 부모를 봉양하는 불문율처럼, 가족 구성원에 대한 애정과 의무도 진하여 만약에, 출가한 여동생이나 누나가 가문의 명예를 떨어뜨리면,  아버지나 오빠가 대외에 알리는 방법으로 집안의 이름으로 가혹하게 처리한다. 가문의 이름으로 꼬리 자르기를 하는 셈이다. 그래서, 이슬람권에 벌어지는 ‘명예살인’이 “왜, 일어나는지?”에 대해 약간은 알 것 같다. 한 때, '명예살인'이 정당하다고 판결한 사례도 있었으나, 이제는 용납하지 않는다.  


필자가 어릴 적에 무슨, 무슨 김 씨의 무슨 무슨 파에 속하는 ‘집성촌’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가 사촌이었고 육촌 형제였다. 모두 같은 마을에서 살며, 집안에서 일어나는 대, 소사를 공유하였다. 집안 어른들은 항상 “우리가 남이가?”라며, 족보와 전통, 그리고 가문의 이름을 들먹거렸다. 구성원 중 누구 하나가 잘 되면 집안의 자랑이었고 모든 문제의 해결사가 되길 기대하였다. 반대로,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에게 무슨 문제가 있으면, 집안 어른들은 “낯을 들고 다닐 수가 없다”거나, “남사스럽다”라고 바깥출입을 한동안 자제하는 등 자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가족이나 가문의 명예가 때로는 목숨만큼 소중하다고 생각하였다.


좋은 가문 출신의 협조원과 방위 산업 장비 수출 활동 사례

필자가 이집트에 근무할 때, 이집트 군에 대한 우리의 무기 수출은 매우 제한되었다. 그런데, 아랍 국가는 대체로 큰 부족이 국가권력을 잡고 있는 가문 중심의 권력체제이다. 가문의 주요 인원을 협조자로 활용하면 그의 좌, 우, 상, 하 인맥이 장관급 인사를 움직이는 지렛대가 된다. 


한국이 개발한 장사정 자주포 K9

마침, 필자에게는 주재국 방산부 장관의 가까운 친척이 협조원 노릇을 해주어, 우리는 친 삼성 성향의 방산부 장관과 다양한 협조체제를 구축해 갔다. 우리 국방부는 협조원의 근친인 장관에게 우리의 K-9 자주포에 관심을 가지도록 하였다. 운이 좋게도 장관은 삼성제품에 대해 무한 신뢰하는 인물이었다. 


당시, 이집트 방산부 장관의 고민은 스웨덴의 '바마스' 회사로부터 수천만 달러를 주고 수입한 사거리 40Km급 장사정 견인포(차량이 끌고 가는 대포)를 어떻게 자주포(전차처럼 자체 주행)화할 것인가였다. 자주포를 만들기 위해 자신들이 보유한 T-55 전차 차체를 사용하여 포신만 올리려 하였으나, 시험 사격 도중 포신의 반동으로 전차 차체가 폭삭 주저앉아 버렸다. 그 바람에 기술국장 등 몇 명이 징계를 받을 상황이었다. 다급해진 이들은, 결국 필자가 제시한 K-9 자주포 홍보용 자료를 보고 K-9 차체를 활용해 보자는 결정을 내렸다. 


얼마 후, '삼성 테크윈' 소속(지금은 '한화 디펜스')의 K-9 기술자가 이집트에 와서 해법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차체와 포탑 간 기술적 간섭으로 인하여 추가적인 비용 발생 문제가 생기자, 삼성은 내친김에 40Km인 K-9 완제품을 수입하면, '탄약과 더불어 그런 저런 비용을 모두 감해 주겠다'는 파격적인 안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돈이 없던 이집트는 자신의 '천연가스를 물자로 주겠다'라고 제안하였는데 삼성은 이마저도 수용하였다.


이렇게 해서, 양국 간의 관계가 우호적으로 변해가자, 방산부 장관은 필자와 우리 기술자에게 '200 군수공장' (주재국은 구 소련식으로 무기 계열별로 군수공장 명칭을 부여하며, 200은 기갑장비 공장임)을 보여 주었다. 이는, 이스라엘을 늘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이집트로서는 파격적인 조치였고 장관의 방산협력에 대한 의지의 표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200 공장'은 생각했던 것보다 낡고 후져서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정부 대표자로서 무관은 우리 측 인원을 상대국 관리와 만나게 해주는 역할만 하고 더 이상 깊숙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

   

사업이 진행되어 가자, 방산부는 더 욕심을 내어, 미국의 군사원조로 제공받은 미국제 155미리 자주포(M109 A2)의 성능향상 사업까지 의뢰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미국의 '동의' 문제가 발생하면서, 미국이 제공하는 군원 자금 등과 엉퀴면서, 성사직전까지 갔던 K-9 자주포 수출도 덩달아 무산되었다. 이를 보면, "방산 수출은 한 건, 한 건 차분하게 추진하는 것이 좋겠다"라는 생각이다. 이후, 긴 시간이 흘렀다. 이집트 군에 대한 K-9 자주포 수출은 2022년에야 이루어졌다. 그것도 한국이 많은 자금을 빌려주는 조건으로...


참고로, 중동 지역에는 어느 가문의 누구, 누구를 잘 안다며 협조원 노릇을 자청하고 나서는 수많은 사람이 있다. 하지만, 협조원으로 대우해 주면 아무 데서나 무관 이름을 팔고 다니는 껍데기가 수 없이 많으니, 항상 고위직을 만나게 해 주던지, 아니면 실적을 올릴 수 있는지 여부로 신중하게 선별한 뒤, 적절히 운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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