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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웅 Oct 20. 2023

서구화에 대한 무슬림의 모방과 배척

서구화가 국제 규범의 기준일까

'지배할 자'를 정하기 위한 '엘 알라메인' 전투

무슬림의 자각과 결속그리고 이슬람으로의 회귀

이슬람 지역을 떠나는 서구 국가들


서구화가 국제 규범의 기준일까

서구와 이슬람의 대립은, 그 뿌리가 구약성경 ‘아브라함’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이슬람과 갈등의 골이 더욱 깊어진 것은 ‘모함마드’가 이슬람을 창시하고 제국을 확장하며 본격화되었고, 서구는 십자군 전쟁의 폐해와 무력을 앞세운 악랄한 식민지 경영으로 그 오해를 더욱 증폭시켰다. 


그런데, 양 진영 간의 군사적 대결 외에 ‘규범과 반문명’의 대립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는, 미국과 서구가 기독교적인 규범에 따라 이슬람 문명을 바라보면서, 이슬람을 세계사적 조류와 ‘글로벌 스탠더드’에 역행하는 ‘반문명’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사회와 다른 이슬람 식의 신분제도, 인권탄압, 여성 참정권 제한, 일부다처제 등 여성을 옭아매는 각종 제도와 복장(니캅, 부르카 등) 등은 분명히, 서구의 기준과 가치관에 역행하고 ‘국제 규범’이나 현대 문명에도 반하는 것으로 인식되면서, 이슬람은 무시와 경멸의 대상이 되었다.


박물관에 전시된 중세의 기사 모형도 

그렇다면, ‘국제 규범’은 누가 정한 기준인가? 역사에서 보듯이, 지난 수백 년간 서구가 세계역사를 주도한 것은 군사력의 결과물이다. 이들의 문화, 예술 수준이 동양이나 이슬람에 비해 뛰어나서 세계를 이끌었다기보다, 기독교 종교의 선교와 정복에 바탕을 둔 폭력을 ‘진취의 기상’으로 삼은 탓이다. 기사의 명예는 '승리'에 있었다. 당연히, 도전하고, 힘을 겨루고 무술을 단련하는 스포츠에 집중하는 풍토가 되었기에, 영국은 한동안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행세할 수 있었다. 게다가, 운 좋게도, 과학과 철학도 함께 발전하였다. 덕분에, 서구 열강은 아시아, 아프리카를 압도했다. 이들 대륙은 하나같이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한동안, 대영제국의 문화와 관습은 ‘신사도’로, 그리고, 프랑스 왕실의 예의와 기독교적 규범은 ‘서구식’이라는 이름으로, 서구 각국은 물론, 각국의 식민지의 생활양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만의 기준이었다. 그런데, 제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영국과 프랑스가 물러서고, 서구의 일개 이민국이던 미국이 군사 강국으로 성장하면서 이들의 가치와 기준을 답습하였다. 뿐만 아니라, 미국이 주도한 유엔도 이를 준용하자, 모두가 서구의 기준에 맞추려 하였고, '서구식'이 마치 ‘국제 규범’처럼 인식되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지난 수천 년 동안 동양 역사의 중심에 우뚝 섰던, 중국은 세계 문화를 주도하였던 초강국이었고, 그 찬란한 문명은, 주변국에게 문화의 기준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 중국식 법도와 규범은 서구의 그것에 비해 결코 덜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근대 150여 년 동안의 무기력한 대응과 치욕스러운 역사로 인해 ‘중국식’ 기준은 그 빛을 잃어버렸다. 이슬람의 역사도 유사하다. '사라센' 문화를 이은 세계 최대 제국 ‘오스만 터키’의 문화 또한 동 시대 서구의 문화와는 비교할 수 없이 찬란하였다. 하지만, 과거 수차례의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은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그 존재가 미미하기 그지없다. 그렇다면, 이제는 ‘서구식’ 혹은 ‘서구화’’가 문명사회의 기준인 새로운 국제 규범으로서 자리 잡은 것인가?


영국과 독일의 북아프리카 전역(戰役) - '엘 알라메인' 전적지

이집트 한국 대사관에 근무하는 국방무관은 매년 11월 4일에,  제2차 세계대전의 유명한 격전지인 '엘 알라메인'에서 거행하는 제2차 세계대전 전몰 연합군과 추축군의 위령탑에서 거행하는 위령제 행사에 초청받는다. 서구 연합국의 일원은 아니지만,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한, 중, 일의 국방분야 비중이 대단해서일 것이다(?) 


'엘 알라메인' 전투 위령탑

위령탑으로 가는 길은 멀다. 카이로에서 알렉산드리아까지 200여 킬로미터, 그리고 지중해 연안 휴양지에서 다시 약 200여 킬로미터를 더 달리면 리비아 국경 가까이에 있는 '엘 알라메인'에 도착하게 되는 데 이쯤에서 고속도로 길가에 몇 개의 안내판이 나오고 위령탑으로 들어가는 길임을 알린다. 

위령탑 입구에는 이집트 군 경비병이 지키고 있는데 안내소를 지나 좁다란 직선 길을 따라 한참을 가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수 만 명의 전사자를 낸 연합군과 추축국의 전사자들을 추념하기 위한 위령탑이 마주 서 있어 파도와 바람 소리를 벗 삼으려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위령제 행사는 연합국과 추축국 모두가 매년 번갈아 통합으로 주관하는 데, 이제는 모두가 EU라는 틀 안에서 사이좋게 지내고 있으므로, 각국의 주요 외교사절과 많은 전몰자의 친척들이 참석하여 각각 헌화식과 더불어 추념제를 엄숙하면서도 성대하게 지낸다.


이집트와 리비아 사이에 있는 사하라 사막은 세계적인 사막이다. 사하라는 아랍어로 ‘아무것도 없는 곳’이라는 뜻이다. (‘바다”라는 뜻도 있다.) 자동차로 사막 도로를 달려보면 사하라라는 의미를 새삼 알게 된다.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달려도 동서남북 어디를 둘러보아도 지평선만 보이고 끝이 보이지 않는다. 사막의 하늘도 모래 땅과 맞붙어 있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지표면 인지도 착가 할 만큼 그야말로 일망무제의 무한한 광경이다. 이 사막의 지중해 연안 끝 부분에서 욕심에 가득한 제국주의자들의 전투가 벌어졌다. 


1942년 8월 31일, 독일군의 야간공격으로 시작하여 9월 7일 종료된 '엘 알라메인' 전투는 독일군 '롬멜'의 아프리카 군단과 영국군 '몽고메리'와 그의 연합군이 격전을 벌인 역사적인 사건이다. 이 전투에서 '롬멜'은 '엘 알라메인' 해안선 근교의 '카타라' 분지에 막혀 자신의 장기인 전차 기동전을 제대로 펼 수 없었고 전차 연료도 떨어져 퇴각하게 된다. 롬멜은 10월 달에 또다시 일제 공세를 감행하지만 실패하고, 결국 1943년 1월 23일 영국군이 리비아 수도인 '트리폴리'를 장악하게 되어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독일군 패전의 계기가 되었다.


롬멜의 전차군단이 패배한 첫 번째 이유는 엄청난 무더위 속에서 식용수는 물론, 전차에 사용하는 연료 부족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롬멜의 장기인 전차 기동전을 엘 알라메인의 사막에서 펼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기 때문이다. 전차가 다닐 수 있는 정도의 경도를 지닌 굵은 모래로 이루어진 사막이 있는가 하면 전차의 궤도를 못 움직이게 만드는 입자가 고운 모래로 된 사막 등 여러 가지 지질로 이루어진 탓이다. 중과부적의 적을 맞이한 롬멜은 기동력을 발휘할 만한 지리적 이점마저도 박탈당한 터라 매우 난감했을 것이다.


먹이를 찾아 헤매는 사막의 여우

‘엘 알라메인’ 근교에 있는 ‘롬멜’ 기념관에는 ‘사막의 여우’로 불렸던 ‘롬멜’의 지휘훈이 걸려 있다. 사막은 행정가에게는 지옥이고 전술가에게는 천국이다.” 하지만, 기갑 전술의 대가였던 ‘롬멜’조차도 물과 연료 없이 아무런 전술도 발휘할 수 없었다. 에어컨이 없는 전차는 사막에서 불한증막이다. 독일군 전차는 연료가, 군인은 물과 신선한 야채가 필요했다. 하지만, 독일군의 주요 보급선은 지중해를 건너는 동안 연합군 공군에게 격침당하였다. 반면에, ‘사막의 여우’ '롬멜'과 싸우는 '사막의 생쥐' 영연방 제8군 사령관 '몽고메리'의 항전은 완강했다.


생쥐문양과 영국 '몽고메리' 장군

'여우'와 '생쥐'(독일과 영국)는, 먹잇감을 앞에 두고 싸우는 공룡들처럼… 이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피 흘리며 싸웠다. '지배당할 자'는 정해져 있는데, '지배할 자'를 정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전투가 끝나자 '여우'와 '생쥐'는, 지배도 못해 보고 조국으로 되돌아갔지만, 엉뚱하게도 지배당할 처지에 있던 이집트가 ‘엘 알라메인’ 전투의 최대 피해자가 되었다. ‘롬멜’과 ‘몽고메리’가 싸우느라, 매설해 둔 지뢰로 매년 수십 명의 인원이 지뢰폭발 피해자로 사상을 당하고 있어서다. 경제력이 약한 이집트는 지뢰제거 작업을 할 형편이 못되어, 영국, 독일에 지뢰제거 비용 분담을 요구하지만 이들은 묵묵부답이다.


인천 앞바다에서 매년 1904년 ‘러-일전쟁’에 침몰한 ‘러시아 함정 위령제’를 갖는 러시아 군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러시아와 일본이 ‘지배할 자’를 정하기 위해 싸웠다. 그때의 우리 역사도 이집트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무슬림의 자각과 결속그리고 이슬람으로의 회귀

기독교 창시이래 1,000년 이상을 ‘신성’에 의지하던 서구가 AD 1,400여 년 경부터 '르네상스'(문예부흥 운동)로 ‘인성’을 앞세우며 문화, 예술 및 과학기술의 발전을 거듭하는 동안, 이슬람은 AD 620년 경 창시 이후 약 1,400여 년 이상을 줄곧 정체된 ‘원리주의’ 하에서 오로지 ‘신성’에 의지하여 평화와 안정을 누려왔다. 하지만, 안주한 결과로 근대 문명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었고, 18세기 이후, 산업화를 앞세운 서구의 끊임없는 도전에도 무기력하게 대응하다가 이슬람은 급기야 서구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이스라엘 건국 기념일 행사

특히, 아랍은 독립과 함께, 경제성장과 기술 발전을 위해, 지배자였던 서구로부터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야 하였다. 그렇지만, 이런 아랍의 열심에 대해 경제적 이익만 챙기던 서구 열강은, 오히려 이스라엘의 건국을 지원하였고, 건국 이후에도 정치, 경제, 군사적 협조 관계를 유지하며, 아랍에 대해서는 정치적 후원과 배려마저 거두어 버렸다. 아랍 제국(諸國)은, 서구와의 관계에서 종교적, 문화적 괴리를 절감하였고, 낮은 산업화와 경제 수준 등 현실적 좌절감으로, 서구에 대해서 질시와 저항적, 거부적으로 변화였다.


그리고, 서구를 모방하려던 무슬림은, 언제부터인가 이슬람으로 돌아가자라고 외치고 있다. 지금껏, ‘알라(신)'만 믿고 경건하게 살아온 자신들이 마약과 퇴폐에 찌든 서구보다 ‘더 낫다’는 자부심을 느끼는 순간,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서구의 과학기술 문명은 받아들이나, 모든 생활은 이슬람적으로 살고자 하였다. 무슬림의 자각이 이어지면서 ‘이슬람으로의 회귀’가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움직임은, 제2차 대전 이후의 역사 - 대영제국의 약화, 미-소 냉전체제와 이념적 대립으로 서구의 약해진 모습과, 물질만능주의로 피폐해진 서구의 속 모습을 알게 된 것도 큰 이유였지만, 무엇보다 유태인들이 어느 날 들고 온 '성경'을 근거로 종교적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땅에 세운 '이스라엘 건국'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무슬림이 한사코 반대한 ‘이스라엘 건국은 아이러니하게도 무슬림을 자각하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영국 등 서구가 유대국가를 ‘팔레스타인’ 지역에 세우려 하자, 그동안 세습과 전통에 갇혀 반목과 질시를 일삼던 중동 아랍권은 뒤늦게 일치단결하여 이스라엘 독립저지 운동을 전개하였다. 마치, 물고기를 키울 때, 같은 종류의 물고기만 키우기보다, 메기나 상어 등 천적을 한, 두 마리 넣어 두면 물고기들의 생존력이 훨씬 더 커지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랄까?


1948년 제1차로부터 1974년 제4차 전쟁까지, 아랍은 외견상 절대적인 군사력 우세에도 불구하고 4번 모두 이스라엘에게 패배하였다 (제4차 전쟁은 이집트의 승리라며 승부의 견해가 엇갈린다). 이들은 그 과정에서 서구 국가가 노골적으로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것을 목도하고, 그제야 기독교와 이슬람이라는 해묵은 대결구도를 받아들이고, 자기 각성의 시대를 가지게 되었다.


데모하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

최근 이들 두 세력이 군사, 경제적으로 충돌하는 빈도가 더욱 잦아지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이슬람은 이슬람대로 서구의 몰지각과 몰이해에 대한 반감으로, ‘원리주의’가 팽배하고, 서민에게도 ‘반서방’ 의식이 확산되었다. 이처럼, 이슬람 사회의 지배적 조류는 반서구적이다. 이는 이슬람 자체의 자각과 결속의 덕분으로, 사회, 정치, 경제, 윤리에 미치는 서구와 미국의 영향력을 거부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에 비해, 서구는 서구대로 이슬람 원리(극단) 주의자들이 무차별적으로 야기하는 연이은 대형 테러와 폭증하는 무슬림 난민 및 인구 증가로, 일반 국민과 지도층 모두가 이슬람에 대한 관용을 잃어가면서, 이제 이들 상호 간에는 대립이 격화되고 관용은 줄어드는 추세이다.


모든 이치에 양면성이 있듯이, ‘인성’ 위주의 서구가 물질지상주의를 지향하며 이룩하여 온 산업화가, 지금껏 ‘신성’을 지켜온 이슬람에 비해 더 나은 사회라는 확신은 아무 데도 없다. 따라서, 누가 지배하고누가 지배당해야 하는가?”하는 질문은 지나간 긴 역사에서는 '한순간'에 불과하고, 앞으로는 두 세력 간의 물리적인 상관관계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이슬람 지역을 떠나는 서구 국가들

9.11 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였던 미국은 2021년, 20여 년의 전쟁 끝에, 아프간에서 철수했다. 미군 철수로 현지 정권은 곧바로 붕괴되고, 탈레반이 전국을 장악했다. 마치, ‘오바마’ 시절, 이라크에서 미군이 철수하자, 시아파가 정권을 장악하는 모습을 미국이 이라크에서 이미 경험하였듯이... 


이라크에서 후세인의 잔당과 과격한 수니파가 원리주의 무장집단인 IS로 국가 수립을 천명하자, 미국은 어쩔 수 없이 IS와 싸우는 쿠르드 지원 명분으로 다시 들어갔다. 하지만, ‘트럼프’가 ‘쿠르드’를 견제하려는 터키와 합의하며, IS를 궤멸직전까지 몰고 갔던 ‘쿠르드’ 족을 지원하던 미군을 철수시켰다. 그리고, 이에 항의하던, ‘메티스’ 국방장관도 사임하였다. 모두들 ‘국익’이라는 미국 정치가(대통령)의 냉정한 모습에 -아연실색했다. 


아프간 수도 '카불'에 진입하는 '탈레반' 반군

'바이든' 대통령 역시 '아프간'에 대해서 더욱 분명한 선을 그었다. 미국의 '아프간' 작전에 동조했던 일부 서구 국가가 미국을 '배신적'인 행태라며 비난했지만, 지상군 개입으로 다른 국가를 바꾸려는 일은 더는 없을 것이라며... 실제로, 미국이 ‘군사적’ 작전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올렸는지 모르겠으나, 종교적, 문화적 무지로 ‘군사 외적인’ 작전에서 패배했다는 관측은 일반적이다. 약 2조 달러의 돈이 전쟁비용으로 낭비되고, 미군 3,000여 명이 살상되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한 무의미한 전쟁이었다. 


그동안, 미국은 '못마땅한 국가'를 ‘친미정권’으로 만드는 시도를 계속하였다. 하지만, 미국이 만든 ‘무늬만 민주’인 친미정권조차 국민을 의식하여 대부분 미국을 환영하지 않았다. 2020년, 이라크 의회는 '이란 혁명수비대 사령관' 암살 건으로 이라크 내 미군 철수 결의안을 가결하였다. 이런 사태로, 미국은 자신의 정책적 실수 만회에 상당한 군사외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되고, 누적된 정책적 실수의 후유증에 시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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