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기간, 소련은 무려 2,700여만 명의 전사상자의 피해를 입었다. 모두가 20, 30대의 남성들이다. 이 때문에, 전후 소련의 남녀 성비율은 거의 50대 100으로 여성이 많은 사회가 되었다. 게다가, 경제나 각종 산업 또한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피점령지 사람들로부터 '도둑놈'이라는 비난을 감수하며까지 점령지의 산업시설들을 뜯어간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니, 더 이상의 큰 전쟁을 치를 능력이나 형편이 안 되었다. 더구나 가상 적국인 미국은 경제, 군사력 이외에도 원자폭탄이라는 가공할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소련은, 어떤 경우든 미국과의 전쟁을 극도로 회피하려 했다. 그렇기에, 1949년 3월 소련을 방문한 김일성이 한반도 적화를 위한 전쟁물자 지원요청에도, "미국이 참전하지 않는다면"이라는 조건으로 소극적이었다.
냉전 해체 이후 공개된 각종 소련의 문서들을 살펴보면, 김일성과 마오쩌둥이 한반도라는 작은 장기판에서 놀았다면, 스탈린은 큰 스크린에서 게임을 하고 있었다. 당시, 김일성은 한반도 적화통일에 몸 달아 있었는데, 스탈린에게도 전쟁을 시작하면 전략적 이득이 많았다. “한반도가 적화되면 김일성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둘 수 있고, 미국이 확보한 일본에도 큰 위협을 줄 수 있으며, 미국이 전쟁에 참전하면 미군 전력을 소모시킬 수 있다. 그리고, 미국의 개입으로 중공도 참전할 것인데, 그리되면 중국의 대만 통일은 물 건너갈 것이니, 중공은 발전은커녕 오랫동안 전쟁 후유증에 시달릴 것이다. 또한, 미국과 중국이 아시아의 한 귀퉁이인 한국전쟁에서 서로 붙들고 허덕이고 있는 동안 소련은 유럽의 공산화를 더욱 확고히 할 수 있다”는 전략적 계산이었다.
1949년은 국제정세의 격변기였다. 1949년 6월, 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였다. 그리고, 8월에는 소련이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였고, 10월에는 중공이 중국 대륙을 장악하고 정부 수립을 발표하였다. 이어서, 1950년 1월, 미국은 '에치슨' 라인을 발표하며 한반도와 대만을 제외시켰다. 남침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 조성된 것이었다. 그러자, 1950년 3월 '스탈린'은 태도를 바꾸어 "북한의 요구를 들어주겠다"라며 전쟁을 부추겼다. 다만, 전제 조건은 여전히 "미국이 참전하지 않는다면"이었다. 그러면서, 유사시 중공의 개입을 요청하였다.
한국전 발발 이후 미군이 개입하고 북한군이 패주 하는 유사시가 되자, 소련의 개입 요청에, 항공기도 없고 대공 능력도 미약한 전투력으로 참전을 머뭇거리던 ‘마오’가, ‘저우언라이’ 부주석을 보내어 소련의 적극지원 가능성을 다시 타진하였다. 이에, ‘스탈린’은, “중국에 대한 공군지원은 약속하지만 중공군에 대한 직접적인 공중 엄호는 곤란하다”는 입장을 밝히면서도, “초기 한국전쟁에서 보듯, 미국은 전쟁 준비가 부실하고, 일본이 도울 상황은 못 되며, 이런 이유로 미국은 중국에 굴복할 것이고, 그리되면, 미국의 대만 포기와 일본 재무장 불가로 이어질 것”이라며 중공의 개입을 촉구하였다. 스탈린은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미군으로부터 패주 중인, 김일성에게는 “한반도에서 철수하여 망명 정부를 구성하라”는 이중적인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이 같은 스탈린의 교활함을 의식한 트루먼은, 늘 ‘유럽 안보 우선’이라는 표현으로 나토군 사령관 ‘아이젠하우어’에게 힘을 실어 주는 반면에, 한국전에서의 확전을 경계하면서 ‘맥아더’를 견제하였고, 그것이 유엔군의 초기 전쟁 대응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그리고, 한반도에서 전쟁이 시작되자, 스탈린의 계산대로 한국과 북한은 망국의 위기에 직면하였고, 미국과 중국도 엄청난 전비를 치르고 수많은 젊은이가 희생되었다.
반면에, 소련에 ‘등 떠밀리어’ 전장에 투입된 중국이지만, ‘마오쩌둥’이 ‘항미원조(抗美援朝)’로 ‘중조 인민연대’를 외치며, “북한을 구하겠다”며 세계 최강 미국에 도전하였다. 중국이 6‧25 전쟁을 '결사항전'을 의미하는 ‘항미원조(抗美援朝)’라는 데는, 소련 스탈린의 전쟁 지원 약속과 막대한 경제 원조를 기대한 측면보다, 보다 분명한 목적과 의미가 있었다. 중공에게 북한은 국경보호를 위한 완충지역으로서 '순망치한(脣亡齒寒)'이었다. '마오'는 또한 막 자리 잡은 공산주의 체제 수호를 위해 '보가위국(保家衛國)'을 내세웠다. 신생 중국의 수반 '마오'에게는 외세 배격, 영토 보존, 체제 수호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국정 최우선 과제였다.
중공의 첫 전제가 '항미(抗美)'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과거 서구의 만행으로 인하여 수많은 중국인의 뇌리에 지울 수 없는 강한 ‘외세’ 트라우마를 가졌기에, '반 외세'라는 인민의 정서를 무시 못한 측면도 강했다. 미국 등 자본주의 서구 국가와 국경을 맞대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중국인에게 ‘항미’는 애국주의를 넘어 ‘중화 민족주의의 자부심’에 가깝다. 중국은 외세배격과 영토보존, 체제보호에 사활을 걸었다.
'원조(援朝)'는 북한에 대한 중국의 빚 갈음이다. 1946년~1949년 간 전개된 국공내전에서, 외형적으로 우세한 국민당군은 인민해방군을 압도했다. 당시, 북한은 소련 민정청의 통제를 받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김일성이 전권을 행사하던 상황이라 북한은 중공 부상자들이나 중공 당 간부 가족들에게 안전한 피신처를 제공한 든든한 후방기지였다. 1950년 4월, 중공을 방문한 김일성의 요청에 '마오'는 '미국이 참전할 경우, 중공도 참전하겠다'라고 약속했다. 또한, 북한은 중공의 입장에서 외세를 차단해 줄 완충지대였다. '마오'는, 북한의 남침을 묵인하였던 전쟁을 지켜보다 북한이 밀리자, ‘순망치한’을 내세우고, 미국에 기습적으로 덤벼들었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은 한국 전쟁을 '남의 전쟁이 아니라, 나의 전쟁으로 여긴다'는 영토보존'의 수단 이어서일까? 중공군은 참전 초기에 수차례의 기동전으로 전술적 우세를 거두고도, 보급품 제한을 이유로 38선 근처에서 종종 공세를 멈추었다. 보급도 큰 이유였겠지만, ‘한반도 적화통일’보다, 미군 등을 중국 국경으로부터 '가급적 멀리' 떼어 놓고, 북한을 완충지대로 만들어 ‘피해 최소화’라는 ‘정치적 목표’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막대한 인적, 물적 희생을 치르고도 ‘정전’을 ‘승전(?)’으로 알고 만족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런데, 사상 처음으로 미‧중이 정면으로 맞붙은 한국 전쟁의 흐름을 바라보면, ‘전장의 주도권’은 기동과 화력이 우세한 미군에게 있었던 게 아니라, ‘항미원조’를 내세우며 대규모의 병력을 출병시킨 ‘마오쩌둥’에게 있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여러 관점에서, '마오쩌둥'의 전략적 유연성과 용병술이 ‘한국전의 흐름을 좌우하였다’는 평가다. 그래서일까? ‘마오쩌둥’의 참전 결정으로 엄청난 중공군이 희생되었지만, 그에 대한 후세 중국인의 평가는 부정적이기는커녕, 오히려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다진 계기로 보는 견해가 많다..
사실, 한국전에 참전하자, ‘마오쩌둥’은 북경 근교의 전쟁사령부 지하벙커에서 수시로 ‘펑더화이’에게 직접 전쟁지휘를 하였고, 중공군 사령관 ‘펑더화이’도 몇 달간 평안북도 지하동굴에서 기거하며 목욕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전황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결국 ‘펑더화이’는, 이런 게으름(?) 탓으로 피부병에 걸려 임무 도중에 본국으로 소환되기도 하였지만… 이념이나 피‧아를 막론하고, 전쟁지휘의 열정(?)만큼은 대단한 군인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마오'가, ‘펑더화이’를 지원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기 전, 제13병단 사령관 ‘덩화’를 지원군 제1 부사령관으로 임명하고, 6‧25 전쟁 개전 초부터 만주에서 미군을 연구하게 하여, ‘기동전’의 개념을 발전시키게 한 것은 놀라운 예지력이었다. 중공군이 참전 이후 5차례 대공세를 펼쳐 유엔군을 38도선 이남으로 몰아내었으니, ‘덩화’와 ‘워커’의 싸움은 ‘덩화’의 승리였던 셈이다.
그러나, '기동전'에서 중공군에게 형편없이 밀렸던 유엔군이 '밴플리트'의 '무제한 화력전'으로 적의 기세를 꺾고 가까스로 전선을 수습하며 군수전과 제공권 등으로 강력하게 반격하자, 38도선 어간에서 힘의 균형이 맞추어지며 51년 7월부터 전선이 교착상태로 '지구전'에 빠졌고, 정전협정이 시작되었다. 이에, ‘마오’는 지금껏 공세적 기동전의 주역이었던 제1 부사령관 ‘덩화’를 정전회담 대표로 임명하여 정전협상을 전담하도록 하고, 대신, 51년 7월부터 ‘갱도전’의 대가라는 ‘천껑’을 제2 부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지구전’에 대비하였다.
'마오'의 기대에 부응하듯 ‘천껑’은 부임하자마자, ‘기동전’ 위주 전술개념에서 탈피하여, 38도선 전역에 엄청난 ‘지하갱도’를 건설하여 ‘지구전’이라는 변화된 전쟁 양상에 대비했다. 특히. 그가 주창한 ‘지하 갱도’는 미군에게는 굉장히 낯선 전술로서 유엔군의 화력 우세를 상쇄하고, 고지 쟁탈전에서도 중공군의 생존성을 향상시켰다. 그리고, 이렇게 구축된 갱도 진지는 휴전 이후에도, 군사적으로 북한 정권 유지의 버팀목이 되었다.
한편, 중공군은 기동전을 성공적으로 펼치며 전과를 올렸지만 열악한 병참지원 능력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이에, 마오는 ‘펑더화이’의 건의로 개입 초기 제2 부사령관이던 ‘홍쉐즈’를 후방근무(군수지원업무) 전담토록 승인하였고, ‘마오’의 승인으로 경제 사정이 어려웠던 만주로부터도 군수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병참으로 대표되는 군수전에서 미국과 중국 간의 엄청난 국력 격차는 물론, 중국의 미약한 물자 생산능력 이외에 공급 및 수송과정에서도 제공권을 가진 유엔 공군에게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 중공은 미국에 혼쭐이 났다.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적응해 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중공군은 후방근무 부사령관 ‘홍쉐즈’가 전구급 ‘군수전’을 치르며 중공군의 전투지속 능력을 확충하면서 처음으로 현대전을 경험하였던 셈이다.
그런데, 이런 용병술은, ‘마오쩌둥’이 전황을 잘 예측하였다기보다, 결과적으로 ‘마오’의 결심이 상황에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셈이었다. 하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까?” 한국전 개입을 놓고, 실리파와 강경파의 논쟁 끝에 전쟁을 택할 때, '미군이 개입하면, 우리도 개입한다'는 게 ‘마오’의 생각이었다. 그는 미군의 능력이나, 지휘관 경력, 성격은 물론, 한반도 지형까지 꿰뚫고 있을 정도로 주도면밀하게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
특히, 작전적인 면에서 '장진호'에서 미 해병 1사단을 전멸시킬 작정을 한 것이나, 2차 공세 이후 지속적으로 38선 돌파를 독촉하였던 여러 지시를 보면, 군사 작전에 대한 그의 동물적인 감각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중공군의 군수물자 부족 사태에 대한 전방 지휘관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미그-15 기와 자동소총 및 기타 전투 장비에 대한 '스탈린'의 약속 이행을 독촉하여 받아내기도 하였다. 이처럼 작전 외적인 환경까지 조성해 주는 섬세함 덕분에, ‘마오’가 임명한 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는 1950년 10월 참전이래 1954년 9월까지 4년간 여러 부사령관들과 함께 변화하는 전쟁의 양상에 맞추어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게 지휘하였다는 평가다.
이런 중국 지도부의 열정에 비해, 미국 전쟁 지도자들의 자세와 리더십은 많이 달랐다. 6‧25 전쟁을 돌아보면, 미국 지도부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국제 정세변화에 무척 둔감하였다. 중국에서 국공내전이 한창이던 1947년 돌연, 미국이 장졔스에 대한 군사, 경제 원조를 중지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나, 정치, 경제, 사회 전반이 활기에 가득 차 있는 미국으로서는 부패, 무능한 국민당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굳이 미군을 파견하거나 원조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미국이 지원을 중단하자, 곧바로 전세는 중공으로 기울었다.
1949년 6월 미군이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철수할 때 미국은 신생 한국 정부의 군사원조 요구에 냉담했다. 아마도, 중국의 국공내전에서 부패하고 무능한 국민당 정부를 경험한 데 대한 불신의 연장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1949년 8월 소련이 원폭실험에 성공하고, 1949년 10월 중공이 대륙을 장악하고 공산 정권을 수립해도 여전히 일본과 유럽에만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급기야, 1950년 1월 '에치슨' 라인을 발표하였다. 아마도, 국민당에 대한 지원 중단과 대만을 '에치슨 라인'에서 배제하는 제스처로 중공의 환심을 사려한 모양이었을까?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로 남침을 준비하는 적들에게 멍석을 깔아준 꼴이었다.
미국은, 전쟁이 터지자 신속하게 유엔 안보리를 소집하였지만, 마지못해 참전한 분위기가 역력했다. 이에 대해, 나중에 밝힌 미국의 변명은 미 국내법으로 참전을 결정하려면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려, 급한 대로 안보리 결정에 따르려 했다는 것인데... 안보리 이사회에서 소련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어쩌려고 그랬을까? 혹자는 미국은 소련의 거부권 행사를 기정사실로 알았슴에도 안보리 소집을 요구한 것은, 안보리에서 거부될 것을 기대하였다는 평가다. 어차피, 한국은 '에치슨 라인'에서 제외되어 지켜도 되고, 안지켜도 되는 지역이었으니까..그런데, 이런 미국의 의도(?)와 달리, 우리에게 다행이지만, 소련의 뜻밖의 '기권'으로 유엔파병은 결정되었다.
북한을 지원해온 소련의 뜻밖의 '기권'은 유럽지역 위성국가들의 '공산화'를 더욱 공고히 할 시간을 벌기위한 묘책(?)이었다고 스탈린 스스로가 그로부터 2개월 후에 밝힌 바가 있다. 미국은 피할려다 덮어쓴 꼴이었을까? 안보리에 한국문제를 상정한 만큼 안보리 결의안이 통과되었으니, 미국은 '한국전'에 어떤 형태로든 기여해야 했다. 미국이 '허겁지겁' 한국전에 달려들며 보인 소극적인(미국은 매우 적극적인 조치였다고 항변하지만) 태도는, 애초부터 소련과의 갈등을 원치 않았던 ‘트루먼’ 대통령이, 서구에 대한 소련의 위협을 내세우며, “유럽방위에 우선하기 위해, 한국에서 국력과 군사력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견지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정치적 계산결과, 미국의 선택은 한반도 ‘분쟁 당사자’로서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보다, 그저 유엔의 일원으로서 ‘공산주의의 세계 적화전략을 막고 현상을 유지한다’라는 명분에 집착하였다. 미군이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유엔의 깃발' 아래 참전하자, 미군에게 한국전쟁은 ‘미국의 전쟁’이 아니고 ‘유엔의 일부로 싸우는 전쟁’이었다. 당연히, ‘주인 정신’과 ‘소통 원활’이라는 문제가 뒤따랐다. 유엔 깃발 아래의 미국은, 전쟁 내내 '38선 회복'이라는 ‘현상 유지’에 매달리며 ‘전쟁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하였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원자폭탄을 보유한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으로, 막강한 육‧해‧공군력을 지닌 초강대국이었지만, 정치, 외교, 군사적 우위를 살리지 못하고 허둥대었다. 대통령의 국가전략이, 처음부터 ‘비기는 것’이 ‘전쟁목표’였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국가전략이 이렇다 보니, 합참 등 한국전 관련 미군 수뇌부의 군사전략도 ‘38도선 회복’이었다. 다만, 전쟁 초기부터, 전쟁에 소극적인 통수권자 ‘트루먼’ 대통령과 미 합참에 비하여, 공산주의자 퇴치에 군사작전을 적극 주장하던 야전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한국전쟁의 군사적 승리가 바로 유럽방위”라며, '원자폭탄 사용', 만주 폭격, 중국 해안봉쇄, 중국 국민당군 투입 등의 강력한 대응”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트루먼’과 합참은 중국 본토 공격을 포함한 군사적 승리는 너무나 큰 대가가 따른다며, '맥아더' 장군과는 ‘소통’ 부재와 감정적인 대립이 이어졌다. 당연히, 국가전략과 군사전략이 방향성을 잃고 군 지휘체계도 혼선을 빚었다.
'트루만' 대통령은 전쟁에 일일이 간섭하는 '마오쩌둥'과 많이 달랐다. 변호사로 민간인 정치가 출신인 ‘트루먼’ 대통령에게는, 비록 미국이 많은 병력과 물자를 제공하던 한국전쟁이었지만, 이 전쟁은 수많은 일상 업무 중의 하나에 불과하여, 미 합참을 통한 전황 보고만 간간히 보고 받을 뿐이었다. 또한, 전쟁을 수행하는 연합국 지도자와의 소통도 중요한데, 트루먼은 한국의 이승만과는 별다른 소통수단도 강구하지 않았다. 반면, ‘북진통일’을 추구하던 이승만과, 공산군에 대해 ‘완벽한 승리’를 추구하였던 ‘맥아더’는 이상적(?)인 파트너였다.
이에 비해, 김일성이나 중공의 ‘저우언라이’는 전쟁의 주요 국면마다 수시로 ‘스탈린’을 찾아 후원자인 소련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마오쩌둥’은 ‘펑더화이’에게 ‘김일성’과의 관계를, “좋은 관계를 유지하라”라고 당부할 정도로 성질 급한 ‘펑더화이’의 인내를 요구하며 연합국 파트너를 세심하게 배려하였다. ‘맥아더’나 ‘펑더화이’ 모두 각국 군의 최고 계급인 ‘원수’급이었던 걸 고려하면, 미국은 민간 정치인 이승만에게 공식적으로, 중공은 소련군 소좌(소령) 출신에 불과한 김일성에게는 공식, 비공식적으로 나름대로 예우(?)를 해 준 셈이었다.
그런데, 전쟁을 지휘하는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은 ‘일본은 본부, 한국은 야전’이라는 개념으로, 한국 전선에서 1,000km 떨어진 도쿄의 극동군사령부에서 일상업무로 전쟁을 수행하였다. 총사령관이라면 당연히 지형은 물론 예하 지휘관과, 그곳에서 싸워야 하는 상대 지휘관 및 그 부대의 상황을 알아야 했지만, 너무 정보가 부족했고 멀리 있었다. ‘지피지기 백전불태’라는 말이 무색했다. 그 결과, 전쟁의 복잡다단성에 비추어 볼 때, 총사령관의 지리적 분리로 인한 현장 감각부족으로 오판하거나 현장과 동떨어진 지휘 결심을 내리기도 하였다. 전반적으로, ‘전략적 유연성’이 결여된 '맥아더' 등 미군의 대응은 공산 측에 끌려가는 모습이었다. 승리에 길든 자만은 사고의 경직을 가져온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맥아더’의 해임은 너무 늦은 측면이 있었다.
당시, 미 국방부는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에 대해 높게 보지 않았지만, 미 국무부는 동서 이념대결에서 한국전쟁의 ‘정치적 가치’를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미군이 소련이 아니라 2~3류 정도인 중공과 북한에게 밀린다는 사실이 곤혹스러웠다. '트루만'은 중공군이 한국전쟁에서 연승을 올리자, “한국전에서 결정적인 군사적 승리를 갖는 것도 어렵고, 또, 그럴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맥아더는 “승리에 대신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승리의 대신’을 모색하던 ‘트루먼’은 1951년 4월 11일, ‘맥아더’를 해임하였다. 이는, “전쟁은 조건 없는 승리로 끝나야 한다”는 전통적 견해에 반하여, “전쟁은 조건 있는 휴전으로 끝날 수 있다”는 새로운 ‘전쟁과 승리에 대한 견해’를 갖게 해 준 사건이었다.
맥아더의 뒤를 이은 '리지웨이'는, 세계 제1, 2차 대전 등에서 보인 총력전의 개념과 달리,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제한전이란 개념에 익숙하게 되었다"라고 기술했다. 그는 완전한 승리나 무조건 항복을 추구하는 무제한전쟁은 다수 국가가 핵무기 제조 기술을 가진 상황에서 상호 공멸할 수 있다며, 국익과 군사력을 고려하여 목표를 분명하게 제한하는 '제한전'의 개념을 내세웠다. 결국, 트루먼 행정부는 ‘결정적인 승리’가 아닌, ‘명예로운 휴전’ 정도로 전쟁을 종식시키기로 결정하였다. ‘맥아더’의 역할은 거기까지였다.
사실, '맥아더'보다, '리지웨이'의 결단력과 혜안이 더 날카로웠다. 중공군이 서울을 목표로 제3차 공세를 감행하자, 그는 과감하게 서울을 포기하고 병력을 보존하여, 단계별 '위력수색'으로 역전을 도모하였다. 그동안, '지평리' 전투를 치르며, 적의 약점을 간파한 리지웨이는, “…‘영토회복’보다 적의 ‘역량파괴’에 주력하라”라고 지시하였다. 굳이 38선 이북까지 밀고 올라가 북한 영토를 회복하는 것보다, 오히려 38도선까지 신장된 적의 병참선을 끊임없이 공중폭격하여 물자 부족을 유도하고, 수시로, ‘강습 위력작전(위력수색)’으로 전장을 초토화시키고, 파상공세를 펼치는 중공군을 강력한 화력으로 타격하여 인원, 장비 피해를 강요하려 하였다.
그의 전술은, 적 수뇌부로 하여금 “미국과 전쟁을 마냥 지속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하려 하였는데,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리지웨이’는 유엔군의 사기 회복과 전술적 승리로, ‘트루먼’ 대통령의 지시인 ‘38도선 이남 수복지침’을 지키면서 중공군에게 휴전을 강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북진통일을 염원하던 국군의 ‘38선 이북 전진’을 제한하며, ‘트루먼’의 의도대로 ‘현 전선에서 휴전’으로 ‘분단을 고착화’시켰다.
'리지웨이'에 이은 '밴 플리트' 장군은, 전임자 ‘리지웨이’와 달리, 한국인의 정서를 존중하여 수도 서울의 방위에 치중하였다. 그리고, '밴 플리트'는 적의 '인해전술(?)'에 대해서, ‘밴 플리트 탄약량’이라는 무제한의 화력지원을 가동하여 중공군이 다시는 기동전을 감행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한국군 재교육과 재무장을 주도하였다. 화력전 수행에 비록 엄청난 비용이 들었지만 적의 피해로 그 효과를 입증하였고, 한국군 10개 보병사단을 장비하는 지원책도 엄청난 물동량과 예산이 요구되지만, 군 내부의 이견을 누르고, “한국군을 훈련시키고 장비시켜 전장의 주역으로 활용한다”는 대명제로 모두의 동의를 구하였다.
‘펑더화이’가 한국전쟁 3년 내내 전략적 책임을 지고 전쟁 양상에 따라 부사령관들을 유연하게 운용한데 비해, 유엔군/극동군 사령부는 지휘부가 자주 교체되었다. 그렇지만, ‘맥아더’가 해임된 이후 ‘리지웨이’나 ‘클라크’ 등 현장 지휘관들은 주요 전장사태 대응 시 미 합참과 협조하며, 중공군의 거친 공세에도 ‘군수전’이나 ‘화력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며 확전보다 ‘명예로운 휴전’을 위한 ‘트루먼’의 지시에 충실하였고, 전쟁의 흐름을 비교적 긍정적으로 유지하는 모습을 보였다.
6.25 전쟁 3년 중 2년 8개월간 전쟁의 주역으로서 총부리를 맞대었던 미, 중 양국은 한국전쟁에서 “무엇을 위해?” 그렇게 피를 흘리며 치열하게 싸웠을까? 그리고, 미국과 중공은, 계가(計家) 결과, “누가, 무엇을 얼마나 더 잃고, 얻었을까?” 결과적으로, 전쟁은 ‘의지와 능력’의 조합물인데, 한국전쟁의 주역들은 전쟁의 목표인 ‘승리’라는 목표에 대해 미군은, “현실적인 능력에 비해 의지가 없었다”면, 중공군은 ‘의지에 비해 현실적인 능력이 없었다.’ 마치, 양쪽 다 치열한 전투로 확보한 바둑판의 수많은 사석(捨石)을 가지고 있지만, 초반의 판세에서 확보한 지역마저 상쇄하고 나면 남는 게 하나도 없는 것처럼….
참전을 계기로, 공산주의 체제를 보호하려는 '마오'의 ‘정치적 목적’은 어느 정도 달성하였다. 또한, 참전으로 희생된 많은 젊은이의 대가로 소련으로부터 군사, 경제 원조를 받고, 내부결속을 다지며 공산당 체제 안정을 이루며 그야말로, 중국 통일의 뒷수습 감당에 크게 일조하였고, 소련의 항공기 등 장비 지원으로 엄청난 군사력 증강도 가져왔다. 하지만, 수많은 인명을 희생시킨 책임은 피하기 어렵다. 더욱이, 유엔으로부터 ‘불법 침략자’로 낙인찍혀, 수십 년간 ‘죽의 장막’ 속에 갇혀 고립무원의 상태로 지내는 동안 3등 국가로 전락하였다.
소련은, 한반도를 아시아와 전 세계의 골칫거리로 만들며, 자신의 조국이 향후 붕괴될 때까지 서구 제국과 40여 년 간 냉전으로 극한대치를 이어갔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불필요한 인원, 물자의 엄청난 낭비가 있었다. 전 인류를 불편하게 만든 그게 그들이 원하는 진정한 공산주의 이상향의 실현이었을까?
미국은 “세계 공산주의의 침략을 막고, 자유 진영의 안전’을 위해서 참전하였다”라고 하였지, 한국의 통일이나 한국민의 평화와 안전을 염두에 두었던 것은 아니었다. 미 대통령 ‘트루먼’은 전쟁 초기부터, 한반도에 대한 전략적 가치를 철저히 무시하고, ‘자유 진영’ 수호라는 추상적인 명분에 집착했다. 그러니, 한반도 통일이라는 한국민의 염원 따위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때문에, ‘승리’ 추구보다 그저, ‘38선 회복’이라는 ‘비김-무승부’에 만족하며 허겁지겁 물러나려 했다. 그러다가, 농민군 수준의 약체로 평가받던 신생 중국의 거센 도전에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으로서의 정치적인 체면을 구기고, 군사적으로도 호되게 당하였다.
특별히, 전쟁의 주역 노릇을 하였던 미, 중에 끌려다니던, 한국이나 북한은 제 땅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서로 간에 큰 생채기를 내며 감정의 골과 적대감만 더욱 깊어졌다. 뿐만 아니라, 한반도를 휩쓸고 지나간 전쟁의 참화 속에 양측은 오랫동안 엄청난 전쟁 후유증에 시달렸다. 북한의 기습으로 시작된 전쟁은 '이승만'에게는 정치적 위기를 넘긴 호재(?)였지만, 전쟁이 남긴 폐허 속에 엄청난 인명 희생과 사회, 경제적 손실, 그리고 수십 년의 역사적 퇴보를 망연자실한 채 받아들이며, 전후 복구라는 큰 고통을 감당하여야만 하였다. 전쟁을 일으킨 북한 '김일성' 역시, 잿더미만 남은 현실을 피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남한 적화'라는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위해 외세를 끌어들여, 전쟁으로 수많은 인원을 살상한 역사적 책임을 결코 면치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