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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과 군국일본-⑦'조슈 정벌'과 '삿쵸 동맹'

by 김성웅

'존왕양이'의 '조슈 번'과 대립하는 새로운 실력자 '사쓰마 번'


일본 서남부 지역의 여러 번 중에서도, 1592년 임진왜란으로 조선을 침공하였던 ‘모리 데루모토’의 ‘조슈’와 ‘시마즈 요시히로’의 ‘사쓰마’ 번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을 섬기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한 이후, 어쩔 수 없이 적이었던 ‘도쿠가와’ 막부에 복속하여 260여 년간 침묵을 지켜왔지만, 조상 대대로 이어져온 번주의 생각은 막부의 ‘쇼군을 대체하여 천황을 옹립’하려는 존왕파 입장이었다.


막부의 쇼군 거처 '니조성' 외곽

1863년 8.18일, 교토에서는 조슈의 급진적인 '존왕양이' 파가 고메이 천황의 경호를 담당하다가, 천황을 옹립하여 막부를 토벌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막부는 사쓰마, 아이즈 번과 연합하여, ‘천황을 끼고도는’ 조슈번의 급진 양이파를 몰아내는 ‘8.18 정변’이라 불리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조슈번과 사쓰마번은 둘 다 ‘존왕양이’를 외쳤지만, ‘8.18 정변’은, 교토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존왕파와 조슈번에 대항하던 막부에게 사쓰마번이 ‘조슈번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며’ 존왕의 반대 입장인 막부를 지원하였던 것이다. 결국, 조슈번은 막부, 사쓰마번, 아이즈번 연합부대와의 전투에서 패하고 교토에서 추방당하였다. 이 사건 이후, 아이즈번, 사쓰마번과 조슈번은 앙숙 관계가 되었다.


이처럼, ‘8.18 정변’으로 ‘조슈’는 ‘아이즈’ 번에게 앙심을 품었던 상태인데, ‘아이즈’ 번 번사들이 일부 조슈번 인사들을 살해되자, 조슈번은 ‘아이즈’ 번을 응징한다며, 다시 병력을 일으켜 교토로 향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사쓰마의 지원군이 발목을 잡았다. 사쓰마의 참전으로 불리해진 조슈 군은 마지막 수단으로, ‘천황에게 호소하겠다’며 막부군을 돌파하여 천황이 있는 ‘고쇼’로 돌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슈 군이 천황의 ‘고쇼’ 안으로 포격하는 일이 생기자 조슈는 ‘조정의 적’이 되었고, 곧이어 천황도 ‘조슈 정벌령’(제1차)을 내렸다.


천황어소(고쇼)

그런데, '존왕양이'로 비슷한 입장이던, 사쓰마가 조슈에 대적한 것은, 몇 개월 전 사쓰마군 사령관으로 복귀한 ‘사이고 다카모리’가 번주 '시마즈 히사미츠'에게 “조슈를 그대로 두면 급진 양이론자들로 인하여 일본의 미래가 크게 위험해질 것”이라고 건의한 때문이었다. 오래 전, 사쓰마 번주 ‘시마즈 히사미스’는 ‘사이고 다카모리’를 유배시켰지만, 1863년 ‘8.18 정변’ 결과로, 교토에 권력공백이 생기자. 자신을 보좌하던 ‘오쿠보 도시미치’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배 중인 ‘사이고 다카모리’를 사면하고 ‘가고시마’로 복귀시켜, 사쓰마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였었다.



막부의 제1차 '조슈 정벌'과 급진개혁파 ‘기도 다카요시’의 등장


에도 시대의 번은 하나의 국가처럼 번주가 모든 권한을 갖고 번을 다스렸다. 막부 말기, 조슈번 번주 ‘모리 다카치카’는 정치적 감각은 별로였으나, 후덕한 인격으로 가신들과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들을 신뢰하여 믿고 일을 맡겼고, 신분과 연령을 가리지 않고 널리 능력 있는 사람을 중용할 줄 아는 번주였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슈는 1864년 8월에 이미 4개국 연합함대에게 대패하였는 데다가, 비슷한 시기에 교토로 다시 쳐들어갔다가 조정에 포격을 가한 사건으로 다시 ‘조정의 적’이 되었다. 이에 막부가 ‘천황의 윤허아래 1864년 7월에 전국에 동원령을 내리고 15만 병력을 앞세워 조슈번 정벌에 나서자, 조슈는 막부군이 압박에 중과부적으로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게 되었다. 결국, 항전이냐, 항복이냐? 오랜 내부토의 끝에 조슈는 막부에 항복하였고, 항전파 ‘스후 마사노스케’ 등 존왕파 가로들은 ‘사죄한다’며 배를 갈랐다.


1864년 10월, 제 1차 조슈정벌시 막부 연합군 참모였던 ‘사이고 다카모리’는, 조슈의 항복을 주선하고 전쟁을 종결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막부군이 진주하자, 조슈번 내부적으로 ‘존왕양이’ 파는 권력을 상실하고 보수파가 집권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조슈의 급진개혁파는 열정과 무력에 의한 ‘양이’의 시대가 아니니, 양이를 포기하고 천황 중심으로 ‘존왕의 새 시대’를 여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고잔지‘ (공산사) 입구와 경내에 있는 '다카스키 신사쿠' 동상, 그리고 본당

그러려면, 무엇보다 보수파에 장악된 조슈번의 정권을 되찾아야 되는데, 보수파가 개혁파 인물들을 거의 죽이거나 숙청하여 개혁파는 사실상 소멸 직전이었다. 이처럼, 막막한 상황에서, 권력을 상실하고 번외로 숨었던 ‘쇼카손주쿠’ 출신의 ‘다카스기 신사쿠’가 시모노세키로 돌아와 1865년 12월 15일, 시모노세키 근교 ‘고잔지’(공산사)에서 거병을 하였다. 시작은 초라하기 그지없어 쿠데타군은 ‘이토 히로부미’가 데려온 84명의 ‘역사대(力士隊)’가 전부였다.


'다카스기 신사쿠'는, ‘기습임무를 수행한다’는 ‘기헤이타이’(奇兵隊)라는 농민군을 창설하였던 인물이다. 그런 연유로, ‘다카스기 ’는 같은 '쇼카 손주쿠'출신으로 그가 지휘권을 물려준 부대 지휘관 ‘야마카다 아리모토’에게 쿠데타 합류를 요청하였다. 하지만, 믿었던 ‘야마카다’는 ‘아직 시기상조’라며 합류에 반대하였다.


조슈번의 농민군 '기헤이타이'

이처럼, '다카스키'에 대한 반응은 조슈 번 동료조차도 승리를 확신하지 못하고 시큰둥한 편이었다. 그런데, 막부의 조슈번 정벌 전쟁에서 막부와 타협하고 저항하는 과정에서, 조슈번의 인재들을 단합시킨 인물은, 1843년 ‘모리 다카치카’에 의해 조슈번의 번정을 맡아 번의 경제회복을 주도하다 물러난 ‘무라타 세이 후’(寸田靑風)였다. ‘무라타’는 오래 전에 번의 경제를 위해 노력하다 상인들의 반발로 사임하였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도 그를 흠모하는 자가 많았다.


게다가, 쿠데타군이 시모노세키 주변의 관청을 습격하고 함선을 탈취하는 등 점점 성과를 올리고, 이에 고무된 농민지원병이 들어오고 상인의 군자금 지원 등이 이어지자, 사태를 관망하던 ‘이노우에 가오루’와 ‘야마가타 아리모토’ 등 ‘쇼카손주쿠’ 문하생들이 ’ 무라타‘의 권유로 재합류하여 순식간에 병력이 3천을 넘어섰다.

이에, 조슈번의 급진개혁파 ‘다카스기’ 군은 1866년 1월, ’오오다‘ 전투에서 조슈번 보수파를 격파하고 다시 조슈 번의 정권을 잡았다. 승리한, '다카스기'는 '쇼카손주쿠' 선배로서 1862년 이래 급진파 개혁론자로서 널리 알려지고, 검술에도 조예가 깊고 서양 정보에도 밝은 ‘가쓰라 고고로’ (‘기도 다카요시’)를 조슈번 정계를 이끌도록 모셔왔다. 그리고, ’다카스기 신사쿠‘ 자신은 그 밑에서 군사부문을 담당하였다. 여기에 등장하는 '가쓰라 고고로'는 ‘기도 다카요시’는, 훗날 ‘삿-쵸맹약’ 때 조슈의 대표자로서 ‘막부 타도’ 파의 리더였다.


한편, 조슈번 내 보수파가 쿠데타로 정권을 잃자, 그동안 보수파를 지원해 오던 막부가 조슈 번주에게 "에도로 와서 정권이 바뀐 이유를 설명하라"고 명령하였지만 조슈번은 "알겠다"면서도 막부의 정벌에 대응할 군비, 군제 개혁을 준비하는데 필요한 시간을 얻으려, 여러 가지 핑계로 시간을 끌었다. 약 1년 반의 시간이 지나도록 조슈번의 대응이 없자, 막부는 조정의 허가를 얻어, 1866년 6월 제2차 조슈번을 정벌할 군대를 파견하였다.


삿-쵸동맹 (사쓰마-가고시마현, 조슈-야마구치현)과 '사카모도 료마'


‘8월 18일 정변’에서 막부와 손을 잡고 조슈 군을 제압한 1등 공신은 사쓰마 번이었다. 사쓰마번은, 일단 조슈의 과격한 존왕양이파를 제거하기는 했지만, 조슈번을 아예 멸망시키려는 막부의 의도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조정의 적'을 징벌한다는 '제1차 조슈정벌' (1864년 10월)에는 동참하였지만, 조슈를 완전히 무력화시키려는 '제2차 조슈정벌' (1866년 6월)에는 불참을 선언하며 오히려, 반막부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이런 입장에는 역시 사쓰마번의 군사령관 ’사이고 다카모리‘가 있었다. 당시, 사쓰마번에 바짝 붙어 있었던 '토사번' 출신의 낭인 협상가 ’사카모도 료마‘는 ’사이고‘를 만나자, 영국, 프랑스 등 외세의 개입을 우려하고 "막부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당시, 막부를 제외하고 가장 강력한 사쓰마와 조슈가 손을 잡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역설하였다. 남들은 무심히 지났지만, '료마'는 막부가 가장 우려하던 바를 꿰뚫고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사카모도 료마'는 막부의 제2차 조슈정벌 출병지시를 사쓰마번 수뇌부가을 거부하는 결의 현장에 있었는데, 그가 보기에는, 원래부터 라이벌 의식이 강했던 조슈와 사쓰마가 ‘1863년 8.18 정변’ 등 교토에서 벌어진 몇 차례 정변에서 서로 반대편에 서서 군사적 충돌까지 빚으며 앙숙이 되어 버렸지만, '료마'에 설득된 ‘사이고’가 제2차 조슈 정벌을 준비하는 막부에 대해, '사전(私戰)'이라고 조소하며, 사쓰마가 ‘조슈 2차 정벌’에 가담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모습에서, 조슈와 연대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졌다.


그때부터, ‘사카모도 료마’는 양 번이 화해하고 연대할 방안을 찾다가 마침내, 사쓰마가 막부와 조슈 사이의 딜레마를 역이용하여 서로 화해하도록 중재에 나섰다. 사쓰마 입장에서는 조슈가 서양식 신무기 도입으로 부국강병으로 가는 신세력의 라이벌이었지만, 만약 막부를 도와 조슈를 처단할 경우, 막부가 그다음 처단 순서로 노릴 대상은 사쓰마인 것은 너무나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사쓰마로서는 이미 조슈를 공격하여 나락으로 빠뜨리는데 일조하였으니, 조슈에게 섣불리 손을 내밀수도 없었다.


이런, 딜레마를 잘 알던 ‘료마’는, 마음속에 막부를 버린 ‘사이고’가 조슈번의 지도자인 ‘가쓰라 고고로’ (훗날 ‘기도 다카요시’로 개명,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와 함께 '유신 3 걸'로 불린다)를 만날 수 있도록, '가쓰로'를 찾아가서 사쓰마의 입장을 전달하였다. 합의는 되었지만, 조슈와 관계개선을 위해 시모노세키를 방문하기로 했던 ‘사이고’가, 다른 일로 인해 조슈를 방문이 불발되면서 '료마'의 1차 중재는 실패했다.


’사이고‘를 기다렸던 조슈번 지도자들은 화를 삼키지 못했지만, 현실적으로 '조정의 적'이 된 조슈는 서양 상인들과 접촉을 통제당하여 각종 무기 조달이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를 간파하고 다시 ‘사이고’를 만난 ‘료마’는 “조슈가 조만간 닥쳐올 막부의 침공을 대비하는데, 가장 절실한 것은 ‘신식 서양무기’라며, ‘사쓰마번의 명의’로 함선과 총포를 구입해서 조슈에게 넘겨주자”는 제안을 했다. 물론, 막부에게 발각되면 사쓰마마저 전화에 휩쓸릴 수도 있는 위험한 제안이었지만, ‘사이고’는 “막부 타도를 위해서 라면...”하고 수락하였다.


사쓰마와 거래하던 영국인 무기상 ’토마스 글로버‘로서는 조슈나 ‘료마’가 아닌 사쓰마번의 명의로 대량으로 무기를 구입한다 하니, 이를 마다할 이유도 없는 셈이었다. ‘글로버’는, 무기구입을 위해 사쓰마번의 나가사키로 간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와는, 2년 전 영국 유학을 주선해 준 인연으로 이미 구면이었다. 그는 이제 막 영국 유학에서 복귀한 조슈번의 청년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에게 중국 '상하이'에서 구입한 ’미니에‘ 총 4천 정, ‘게벨’총‘ 3천 정 등 많은 총포는 물론, 일부 함선까지 넘겨주었는데, 비밀리에 이를 조슈까지 운송한 해운사는 '료마'의 소유였다.


'삿-쵸' 동맹 회의가 열렸던 침류정 외견

이처럼, 양 번 지도자들이 만나기 전에 신뢰 조성을 위해 조슈의 '무기구입'까지 주선하였던 ‘료마’는, “막부가 조슈를 칠 경우, 군량미도 사쓰마가 지원하고, 대신 조슈는 교토에 주둔하고 있는 사쓰마군에게 군량미를 지원한다”는 약속까지 양쪽으로부터 받아내어, 이제부터는 정말 양대 번이 화합할 순간이라고 생각하였다.


무기구입과 군량미 교환합의로 화해 분위기가 무르익자, ‘료마’는 조슈번 야마구치 근교에 위치한 모리 가문의 별채였던 ‘침류정’에서 조슈와 사쓰마번의 지도자들을 만나도록 주선하였다. 역사적인 현장의 참석자는,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등 사쓰마번 주역과 ’가쓰라 고고로(기도 다카요시)‘ 등 후일의 '유신 3걸'외에 ’이토 히로부미‘ 등 조슈번과 사쓰마의 지도자들이었다.


침류정 소개 현판

하지만, 이들은 밀담을 나누면서도 여전히 상호불신하여 누구도 먼저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고, 속내를 드러내지 않아 회담은 결렬 직전으로 갔다. 그때 양 번 지도자들 모두와 친근한 ‘사카모도 료마’가 나타나, 서로에게 ‘응어리를 풀고, 일본의 장래를 위해 손잡을 것’을 간청하여, '가쓰라 고고로'는 그동안 사쓰마에 갖고 있던 울분을 모두 토해냈다. 이에, '사이고'는 바닥에 손을 짚고 머리를 숙였다. 양측의 마음이 움직였다. 그리고, 1866년 1월 21일, 메이지 유신에서 큰 전환점인 삿-쵸동맹이 결성되었다.


침류정에서 보이는 ’류리광‘사 5층 목탑

협상 주선자 ‘사카모도 료마’는 고향인 토사번을 일찌감치 탈번한 낭인의 신분이라 번의 제약을 받지 않고 여러 동지를 모아 반막부 운동을 펼쳤다. 그는 힘든 낭인 신분이었지만 오히려, 다양한 인사와 횡적 연대를 광범위하게 가졌고, 그로 인해 여러 번 권력자들의 도움을 받았다. 이 모양은, 고지식한 ‘요시다 쇼인’이나, 달변과 외교적 수완으로 근대 일본의 초석을 놓았던 ‘오쿠보 도시미치’의 중간지점으로서 ‘타협의 달인’이라 불릴 수 있었던 이유였다.


‘사카모도 료마’에 얽힌 내용을 보면, 그는 메이지 유신 당시의 여느 청년들과 달리, 해군 육성과 무역확대 등은 주장하고 국제적 마인드를 중시하였지만, 해외 침략에는 적극적이지 않았다. 이는 일본 민족주의를 강조하고 해외 평창론을 주장한 ’요시다 쇼인‘과도 결이 다르다. 뿐만 아니라, 막부 타도에 대해서도 ‘무조건 타도’가 아니라 공적은 인정할 건 인정하고 평화적인 정권 교체를 주장했다. 이 점 또한, 다소 음험하게 여겨지는 ’요시다 쇼인‘과 그 제자들이 주장한 '막부타도'론이나, '존왕양이'론과는 많이 달랐다.


참고로, ‘삿-쵸동맹’의 주요 내용은; 막부-조슈전의 전황의 유리, 불리에 무관하게 사쓰마는 조정에 상주하여 전쟁 중지와 조슈번 죄의 사면을 위해 진력한다. 막부군이 지금처럼 조정(천황)을 끼고 정의를 거부할 경우 결전한다. 황국을 위해 황위가 빛을 발하게 한다. 외압으로 기울어져 가는 일본 부활을 위해 진력한다는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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