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iraeth Dec 08. 2022

서른, 첫 회사를 5년 만에 퇴사하다.

찰나의 결심이 아무도 없는 낯선 곳에 나를 7년째 머무르게 하고 있다.

정확히는 4년 8개월이다.

 

2년만 버티고 그만두겠다는 첫 회사에 입사해서 퇴사하기까지. 4년 8개월.

나의 20대 중후반을 한 회사에서 보냈다.


회사가 싫다기보다 IT 쪽 일이 싫어서 "2년만 다니고 그만두자"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막상 2년이 되어보니 조금만 더 다니면 '대리'를 달 수 있었다. 어릴 적부터 그렇게 드라마에서 보던 "대리님"이라니, 놓칠 수 없지. 그렇게 조금 더 다녔다. 3년쯤 되었을까? 나를 관리하는 사람이 바뀌면서 사는 게 조금 더 피곤해졌다. 그래도 그 전엔 함께 버텨주던 선배들이 있어서 힘들어도 가끔 재미있었는데, 바뀐 관리자는 하나부터 열까지 나를 피곤하게 했다. 옆자리까지 퍼지는 담배 찌든 내부터 험담하기 좋아하고 일보다 정치질이 우선인 그와 나는 물과 기름보다 더 섞일 수 없는 존재였다.


회사의 문제일까, 나의 문제일까 아니면 이 부서의 문제일까. 우리 회사는 큰 기업 계열사에 IT 담당부서로 파견 나가 일하는 회사여서 부서 이동이 가능했다. 마지막으로, 1년만 더 다녀 볼 생각으로 전배를 신청했다. 전 부서 관리자가 하도 나를 여기저기 욕하고 다녀서, 새로 옮긴 부서 사람들도 다 나를 알고 있었다. 다행인 건 이상한 사람이 욕하는 사람은 그래도 좀 불쌍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덕분에 선배와 동기들과  지내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새로 옮긴 곳이 조금 더 젠틀하긴 했다. 적어도 그곳에선 회식 때 내가 앉을자리를 배치해준다던가 하는 건 없었다. 하지만 할 일을 다 해도 정시에 퇴근하지 말고 한 시간 정도 더 있다가 가라는 건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내겐 오히려 느릿느릿 커피 마시고, 틈나면 나가서 담배 피우면서 일을 밤늦도록 지지부진하게 하는 게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디든 똑같구나라는 생각'과 '나는 어딜 가야 할까'라는 생각이 뒤섞였지만 쉽사리 퇴사를 해야겠다는 결정이 서지 않았다. 그때 나는 그래도 꽤나 안정적인 삶이었기 때문이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내가 회사를 당장 그만둬야만 하겠다고 생각한 건.


인터넷을 하다가 '만 서른까지 할 수 있는 것들'이라는 글을 보게 되었다. 글이라기 보단 캡처된 사진이었다. '워킹홀리데이' 이거다! 대학생들만 갈 수 있는 건 줄 알았는데, 나도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갑자기 가슴이 막 뛰기 시작했다. 그게 2015년 6월이었다. 워킹홀리데이가 내 가슴을 뛰게 했지만, 굳이 워킹홀리데이에 지원해서 일정을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어학원 등록하고 학생비자를 신청했다. 2015년 9월 말에 미국 여행 일정이 잡혀있어서 당장 퇴사는 못하고 9월 말 퇴사로 회사에 이야기를 했다. 물론, 엄마는 노발대발하며 내 이야기를 들으려고도 안 했다. 괜찮았다. 지금 전셋집을 빼서 이 돈을 들고 가면 되니까. 친한 친구에게 돈을 빌려 급한 초기 자금들을 해결했다. 심지어 그 친구는 그게 결혼자금이었다. 물론 전세금을 받고 바로 갚았다. 어느 정도 준비가 되니 부모님은 그냥 포기하고 너 하고 싶은걸 하라고 하시며 오히려 내가 가는 걸 도와주셨다.


그렇게 2015년 10월 마지막 날 나는 토론토행 비행기를 탔다.


어학연수를 가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부터 나는 심각하게 재거나 고민하지 않았다. 미국으로 가고 싶은데 비싸니까 캐나다를 선택했다. 어학원을 알아보다 보니 토론토에 더 좋은 딜이 있어서 밴쿠버가 아닌 토론토를 선택했다.


내가 어학연수를 계획했을 때 사람들은 거기서 살 생각이냐고 나의 장기적인 계획을 묻곤 했다. 일단 가봐야 알 것 같다고 대답했다.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왜 가는 거냐고 묻는 질문에 너무 철없고 생각 없어 보일까 봐 그때그때 생각나는 여러 가지 이유를 덧붙여서 내가 가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도 했다. 근데 사실 그냥 난 다른 나라에서 살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워킹홀리데이 나이 제한'이 뭔가 내게 '아직 늦지 않았어', '서둘러'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나는 1년 공부할 계획으로 왔다. 그리고 어느새 나는 7년째 토론토에 머무르고 있고, 공부가 아닌 일을 하고 있으며 이제 학생비자가 아닌 영주권을 소유하고 있다.


만약, 서른의 내가 깊이 고민하고 치밀하게 분석하고 하나하나 꼼꼼하게 따지고 실행하는 사람이었다면 주저주저하고 이것저것 알아보다가 이곳에 못 왔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는 주변에서 서른에 가기엔 좀 늦었다고 이야기들 했지만, 지금은 그 사람들이 내게 어릴 때 갔구나라고 이야기한다. 물론 내가 상상하던 것과 많이 다른 해외 생활이지만, 적어도 나는 나중에 "그때 가 볼걸"이라는 후회는 앞으로도 평생 안 해도 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하기 싫은 일로 10년(+α) 먹고 살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