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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평화 Mar 05. 2024

아름다운 황혼

4. 엄마·아빠의 역할

나는 아이 둘이 잘 놀고 있는지 확인하고 운동장으로 달려갔다. 남편은 이미 도착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야, 네가 뭔데, 내 사생활에 간섭을 해. 나는 이제까지 내 멋대로 살아왔던 사람이야.”

 “너, 이렇게 망나니로 살 거야? 속 좀 챙겨. 아이 아빠야, 생각 좀 하고 살아라.”

 “나는 이렇게 살아왔어. 어쩔래, 나를 죽일 거냐?”

 “그래, 너 같은 인간은 죽어도 싸. 내가 죽여줄 거야.”

 “와서 죽여 봐.” 

 하더니 남편은 도망가기 시작했다. 나는 열심히 남편을 잡으러 다녔고, 남편은 숨바꼭질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운동장에 버려져 있던 나뭇가지를 주웠다. 남편을 쫓아다니기만 하고 잡지 못하자 분통이 터져 나뭇가지를 남편 쪽으로 팍 던졌다. 열심히 도망가는 남편 뒤통수에 맞았다. 남편은 뒷머리를 한 번 만지더니 계속 장난치며 도망 다녔다.

 나는 이렇게 장난만 칠 게 아니었다. 시동생과 아들이 걱정도 되고 화도 나서 신나게 도망 다니는 남편 몰래 집으로 왔다. 나는 분명히 문을 닫고 나왔는데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시동생은 얼굴이 빨개져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운동장까지 와서 우리가 싸우는 것을 보았을 것이고 내가 남편을 죽인다는 말을 들었을 거라고 추측했다. 막내 시동생은 중2라서 신경이 예민할 때였다. 아들은 먹다 남은 우유를 동화책에 나오는 개의 밥통에 부어주고 있었다. 아마 시동생이 우리를 미행하고 집에 가서 아들에게 우유를 준 것 같았다. 현관 바닥 카펫은 우유로 범벅되어 있었고 아들은 한 방울이라도 더 주려고 책의 개 밥통 위에 컵을 흔들다가 우유 잔을 떨어뜨렸다. 그 순간에 내가 들어간 것이었다. 깜짝 놀란 아들은 울기 일보 직전이었고 나는 아이를 달랬다. 아이는 글을 읽지 못했지만, 며칠 전 내가 읽어준 책이라 혼자 또 보고 그림을 보았던 것 같았다.  

 동화책 개의 이름은 진돗개 백구였고 먼 길을 돌아 다시 집을 찾아온 백구는 주인 할머니를 만나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였다. 아들은 웃으며 곤히 잠이 들었다. 딸은 방에서 혼자 놀다가 지쳐 잠이 들었다. 편안히 눕혀주니 ‘엄마구나’ 하며 살짝 웃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시동생에게 과일을 주고 부엌과 집안을 정리하고 내 시간을 가졌다. 아침에 적어놓은 노트에 이어서 내 마음을 적었다. 

 ‘미스 노에게 아이의 새 주민등록을 허락해 줄 것이다. 그러나 이 정신없이 놀기만 좋아하는 남편을 어찌할꼬?’ 낙서하다가 침대에 엎드려 깜빡 잠이 들었다. 

 남편은 운동장에서 갑자기 사라진 내가 처음에는 장난치기 위해 어디 숨은 줄 알고 찾아다녔다. 골목길까지 아무리 찾아도 내가 보이지 않자 숨다가 나쁜 놈한테 끌려갔나 생각까지 했다고 하였다. 화도 나서 파출소에 가서 신고할까 하다가 혹시 내가 도망갔나 생각하며 집으로 달려왔었다. 없어진 줄 알았던 내가 침대 모퉁이에 꼬부라져 잠이 든 것을 보자 화도 났지만 안심했다고 하였다. 남편은 나를 침대에 누이려고 하다가 무엇인가 낙서 비슷하게 씌어있는 것을 보았을 것이었다.   

 다음 날 아침, 남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콧노래를 부르며 출근하였다. 남편은 내가 주민등록을 허락할 마음이 있다는 것을 그 낙서에서 보았다. 그 기쁜 소식을 한시도 빨리 알리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퇴근 후, 미스 노를 만나 내가 주민등록을 허락할 거라는 말을 하였다. 그 말을 듣자 미스 노는 울음을 터뜨렸다고 하였다. 

 이 세상 누가 공짜로 주민등록을 해주겠는가, 그것도 같은 나이의 딸이 있는데. 남편은 눈물을 그치지 않는 미스 노를 두고 집으로 왔다고 하였다.

 다음 날, 미스 노는 딸과 함께 버스를 타고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던 친정아버지를 만나러 갔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장으로 퇴임하였다. 바르고 훌륭한 교육자로 소문난 아버지는 자식들을 지나치게 엄하게 키웠다. 그것이 자식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오빠는 공부를 잘하여 아버지와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자랐다고 하였다. 반면에 자신은 공부도 못하고 항상 혼나며 주눅 들어 살아왔다고 하였다. 오빠는 세 살 차이로 아버지의 스파르타식 교육을 잘 따라 하였다. 그런 오빠를 미스 노는 ‘모조인간’이라고 불렀다고 하였다. 

 대개 보통 엄마라면 자식이 둘 있을 경우, 아빠가 잘 나가는 자식을 좋아한다면 엄마는 무조건 좀 늦되고 어리숙한 자식 편에 서서 늦된 자식을 옹호하는 편인데 미스 노의 어머니는 그렇지 안 했다고 하였다. 어머니 역시 아버지가 하는 말을 그대로 따라 하며 자기만 혼냈다고 하였다. 오래간만에 만나 딸의 이야기를 다 들은 미스 노의 아버지는 눈물을 글썽이며 손녀딸을 자신의 주민등록에 넣자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미스 노는 설움에 바쳐서 한참을 울었는데 흐느끼는 소리를 멈출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 한 번도 손녀딸을 자세히 본다거나 안아준 적이 없는 아버지가 손녀딸을 다정히 안아주며 우리 아가 미안하다,라는 말을 몇 번이고 하였다고 했다. 

 다 남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남편은 세상을 살면서 거짓말 한 기억이 거의 없다고 하였다. 거짓말할 필요가 없이 살아왔다. 말이 안 되는 이 사건도 모두 남편 뜻대로 흘러갔고, 모든 일이 자기 생각대로 되니까 거짓말할 이유가 없었고 이렇게 살아온 것이었다. 그는 행복한 사람이었지만 철부지였다. 주위에 좋은 사람이 많이 있어 어려운 일 당할 때 서로 이끌고 도와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남을 잘 믿는 성격 때문에 사업에서 몇십억을 부도도 맞았다. 사업과 올바른 투자, 사람 보는 안목에 대한 수업료를 단단히 낸 셈이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시어머니가 갑자기 시골에서 올라오셨다. 우리 집 다 망했다, 하며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조상 볼 낯이 없다며 바닥을 치며 통곡하는 것이었다. 당장 미스 노의 집에 가서 머리채 흔들고 다 때려 부수자,라는 것이었다. 나는 어떻게 알고 오셨는지 조용히 물었다.

 “내가 앉아서 삼만 리, 서서 구만 리는 보는 사람이다. 내가 너희 일을 모를 줄 알았냐? 진작부터 다 꿰고 있었다.”

 “어머니, 큰일은 아니니까 마음을 가라앉히시고 지아비 오면 이야기를 들어보세요.”

 “야 좀 봐라, 왜 그게 큰일이 아니냐? 네 멋대로 호적 건드리지 마라.”

 마치 죽을죄라도 진 듯 말하는 어머니 말에 나도 은근히 화가 나서 대차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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