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움이 없어도 꿈을 실현하다
아버지는 호남정맥 자락 순창에서 태어난 이후 줄곧 53년을 보냈다. 호남정맥은 내장산권에서 장군봉, 연자봉, 신선봉, 까치봉을 지나며, 내장산과 백양산의 길목인 소둥근재와 순창새재, 백양산권의 상왕봉, 도집봉을 거쳐 내 고향 복흥면으로 향한다. 어은 마을 뒤로 돌아서 금방동 마을에 이르는 험난한 산자락이 펼쳐지고, 이어서 추월산, 가마골 같은 500~600M 고지와 크고 작은 골짜기를 여럿 지나며 길게 이어진다.
금방동은 현재도 군내버스가 아침저녁으로 두 번만 다녀갈 만큼 오지 마을이다. 내가 태어난 1967년 이래 2000년대 초까지 버스라곤 없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니던 9년간의 학창 시절, 도보와 자전거로 통학했다.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책을 조금만 더 보아도 나 혼자서 어두운 밤 길을 걷거나 자전거를 타야 해서 두려움에 떨었다. 어찌나 무섭던지 아찔하면서 가슴 조였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아버지는 이러한 두메산골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군대를 다녀온 20대 이후 고을을 떠나본 적이 거의 없다. 아마도 10대 후반부터 농사일을 천직으로 여겼던 것 같다. 두세 군데의 밭을 일구었고, 마을 뒤쪽으로 큰 산을 넘어 위치한 전남 담양 소재 논 300평 정도를 구입해서 밭과 벼농사 관리로 청춘을 보냈다.
매일 고된 노동을 하면서도 어쩌면 숙명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나마 본인 소유의 땅들이 존재하여 조금의 소득이라도 올릴 수 있고, 산자락이지만 논과 밭이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 덕분에 자녀들(4명)을 먹고 입히며 초등학교도 보냈다. 그래서 내 아버지의 사고 범주에는 고향을 떠날 수 없고, 버릴 수도 없었다. 또한 고된 농사도 매 순간을 참아내고 견디는 것이 당연했다.
사실 나도 집념이 강한 편이다. 공부든 일이든 운동이든 시작하면 거의 끝자락까지 끌고 가는 집요함과 끈기를 가진 것이다. 이러한 '집요함과 끈질긴 마음들은 어디서 왔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아버지가 말씀으로 전하진 않았지만 몸으로 실천하여 보여주신 것을 배운 것이란 생각이 든다.
나는 시골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을 떠나 경북 구미시의 공업고등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이후 기숙사 생활과 군대 5년 부사관 복무 등이 지속되면서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과 단절된 삶이 시작되었다. 철이 들기 전 이미 아버지 곁을 벗어났다. 군 전역 이후 노량진에서의 고독한 재수 생활과 지방대학 진학, 그리고 결혼과 직장 생활로 연결되면서 일찍 독립했다. 그래서 아버지의 꿈과 소망을 들어본 적이 없다.
청년 시절, '대학에 진학해서 수준 높은 어떤 분야를 공부해야겠다.'. 30대에 접어들기 전, '공무원이 되어 국민과 시민에게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겠다.' 직장인으로 '근면한 생활과 함께, 주어진 역할에서 책임을 다하며, 업무 고찰을 통해 문제점을 발굴하고 제도를 개선하여 상관으로부터 인정받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표창을 받아 조금 더 빠르게 승진하고, 한 분야의 전문가로서 자리를 굳건히 잡는다.' 또한 '주말이나 야간 등 여가 시간을 이용하여 공부를 지속하면서 자기 계발에 집중하고, 마라톤과 등산 자전거 등으로 체력을 관리하며, 아내와 자녀 등 가족 친지들과 소통하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실천한다.'
위 내용들은 내가 지나온 길이며, 지금도 즐기는 것들이다. 이렇게 사는 모습이 어쩌면 아버지의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는 청년이 되기 전에 이미 절망했다. 자녀의 학교 진학이나 배움에 관심이 전혀 없는 부모님(나의 조부모님), 고되고 빈틈없는 노동의 시간으로 이어진 어린 시절을 가진 아버지는 무엇인가를 새롭게 시도하며 미래를 대비한다는 생각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유교 문화가 뿌리 깊이 자리한 시기여서 부모님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고, 일찍부터 농사를 천직으로 생각했기에 주변 동년배들이 학교에 다니는 모습을 보고도 안타까운 마음을 어찌하지 못했을 듯하다. 그냥 참고 또 참아내며 마음을 짓눌렀을 것이다.
지금의 나도 초등학교조차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면, 미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중고등학교 진학도, 도시의 직장인이 되기 위한 그 어떤 시도도 할 수 없다. 아무런 대책이 없을 듯하다. 그런 가운데서 자녀들은 성장해 가며, 나날이 씀씀이가 커져간다. 정말 당황스럽고 고민스러운 일이다.
나의 아버지는 대학 진학에 대한 꿈 자체가 불가능했고, 공무원의 삶을 알지 못했다. 승진이란 개념도 없으며, 표창장 수여도, 전문가적 식견이나 제도 개선, 여가 생활, 자기 계발, 운동 등에 대해 단 한 번도 생각해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도 꿈이 있었다. '자녀를 기르면서 그 자체가 행복인 삶'. 나와 다르지 않은 소소한 꿈을 꾸셨다. 아이들의 성장을 보면서 시시때때로 느끼는 기쁨, 이런 일들도 꿈으로서 충분하다는 것, 그리고 소중하다는 것을 50살이 훌쩍 넘은 지금에서야 이해하고 있다.
대학 4학년 때, 인천의 교육행정직(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했더니 "잘했다!"라며 크게 기뻐하셨다. 그다음 해에는 형까지 기술직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면서 친지분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랑하셨다. "우리 아들들은 둘 다 인천의 공무원이라네"
공무원으로 일하는 것이 한동안은 내가 선택한 일들 중 가장 잘한 선택이라고 여겼다. 공무원의 삶이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아버지의 즐거워하시던 모습이 오래도록 머릿속에 남았기 때문이다.
대학원에서 공부와 모임이 이어져 귀가가 늦은 어느 날, 집으로 가는 대신 부모님 댁에서 잠을 자고 출근한 적이 있다. "밤늦게 웬일이냐?"라는 말씀에 "요사이 대학원 공부를 하는데요. 모임이 늦게 끝났고, 아침에 일찍 출근해야 해서 왔습니다"라고 답변드렸다. "나이 먹고 대학원 공부라니 고생이 많구나!"라며 격려해 주셨다. 두 자녀를 둔 성인이 된 아들이지만 공부의 끈을 놓지 않고 계속 노력하는 나의 모습에 내심 기쁘셨던 마음을 에둘러 말씀하셨다.
누구나 행복한 미래를 바라며,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한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 배움의 기회를 단절당했고 평생 노동에 시달렸지만, 행복한 가족을 꿈꾸며 여생을 보내셨다. 당신 스스로 글씨로 적거나 노래로 만들며 표현할 수 없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