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초등학생 저학년 정도의 여자아이가 와서 말을 건다. 목소리도 작고 입술을 옹송거리며 말하니 아무리 입을 뚫어지게 쳐다봐도 무슨 말인지 도저히 알아들 수가 없다. 버스 정류장에 있는 사람이 나뿐이라 분명 도움이 필요한 거 같은데 아이가 자신감없이 우물쭈물하니 못 알아들어서 미안한 감정보다는 답답한 마음이 불쑥 튀어나왔다. 아이 입술 모양을 좀 더 잘 읽으려고 자세를 낮추었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났다.
난청인인 나는 꿈에서도 현실과 똑같이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꿈에서도 사람들 입모양을 보려고 애를 쓰고, 들리지 않아서 다시 한번 말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이어진다. 나는 꿈에서도 참 피곤하다.
한지민, 박형식 주연의 <두 개의 빛:릴루미노> 베리어프리 영화를 보았다. 시력을 차츰 잃어가고 있는 인수(박형식 역)가 사진 동호회에서 같은 시각 장애인 수영(한지민 역)을 만나는 이야기이다. 인수와 수영이 사진 출사를 갔다가 바닷가에서 나누는 이야기가 있다.
수영:인수 씨는 보이는 꿈 꿔요 안 보이는 꿈 꿔요?
인수:저는 보이는 꿈 꿔요. 왜요?
수영:인수 씨는 아직 멀었다~ 나는 이제 꿈속에서 소리만 들리거든요
이 대화를 듣고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내 꿈이 떠올랐다. 꿈속에서도 일상과 별반 다름없었던 나는 내가 꿈에서도 못 듣는다는 걸 한 번도 인지해 본 적이 없어서 약간 당황스러웠다.
‘아니.. 내가 꿈에서 조차 못 들어야 해?’ 나를 향한 애잔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꿈이라는 게 참 신기하게도 자면서도 여러 가지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심지어 꿈을 꾸면서도 '아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구나' 하고 인지한다는 게 너무 신기하다. 내가 꿈에서도 듣지 못 단다는 것을 인지한 뒤로는, 꿈속에서 듣지 못해서 눈치를 보거나 대충 알아들은 척해야 하는 것을 인지할 때 그런 민망하고 난감한 감정과 함께 내가 안쓰럽고 애틋한 감정들이 3인칭 시점으로 느껴진다.
꿈에서라도 내가 건청인처럼 들을 수 있다면 간적접으로라도 해보고 싶은 경험이 있다.
첫 번째는 강의를 진행하는 꿈을 꿔보고 싶다.
청중들의 질문을 한 번에 다 알아듣고 질문에 맞는 대답을 척척하는 내 모습을 가끔 상상해보곤 한다. 청중들이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청중의 목소리가 내게 명확하게 전달되는 것, 넓은 강의실에 마이크를 사용해서 울리는 말도 내게 명확하게 전달되는 것,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시원해진다. 현실에서의 나는 마스크를 쓴 다수의 관중들이 이야기를 하면 지금 이 목소리가 누구에게서 나오는지 조차도 파악이 힘들다. 인공와우를 한 왼쪽으로만 소리가 더 크고 잘 들어와 어느 쪽에서 소리가 나든 나는 항상 왼쪽으로 돌아본다.
두 번째는 사람들과 무언가를 하면서 대화하는 꿈을 꿔보고 싶다.
예를 들면 지금의 나는 김장을 하거나 설거지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 입을 봐야 대화를 할 수 있는 나는 무언가를 하면서 추가로 대화를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모든 이야기는 ‘나’ 기준에서 그렇기에 모든 인공와우 사용자가 ‘나’와 같지 않다는 걸 말씀드립니다.) 다들 고개 숙이고 김치 속을 버무리면서 하하 호호 이야기가 오갈 때, 나는 이야기에 관심 없는 듯, 그저 일만 묵묵히 할 수밖에 없다.
인공와우를 하기 전에는 뒤에서 누가 말을 걸어도 못 듣는 게 다반수였고, 인공와우를 한 지금은 뒤에서 거실에서 누군가가 말을 해도 들리긴 한다. 다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서 하던 일을 멈추고 입을 보러 가야 할 뿐. 입을 보지 않아도 티카티카가 되는 대화를 해보고 싶다.
난청인인 나는 꿈에서조차 잘 듣지 못 하지만, 여전히 자면서 꾸는 다양한 꿈들을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