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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오 May 13. 2024

“쓰이지 않은 책.”

MOLESKINE | 몰스킨

브랜드는 가장 먼저 자신들의 말에 귀 기울일 사람을 찾는다. 한 브랜드가 전하는 가치가 관심 없는 사람들에겐 아무리 훌륭한 브랜드텔링도 소음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찾는 데 성공했다면, 그들이 가장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을 중심에 두고 소통을 시작해야 효율적으로 브랜드텔링 할 수 있다.

몰스킨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 집단은 자신의 분야에서 무언가 만들어 낸 ‘창조하는 사람들’이었다. 몰스킨은 ‘Unwritten book | 쓰이지 않은 책’에 자신의 것을 채워가라고 이야기한다.


사라진 공책이 창조자들을 사로잡다.

⟨송라인 The Songlines⟩은 호주 원주민들이 자신의 땅에 남긴 노래를 엮은 책이다. 원주민 애보리진 Aborigine들은 땅을 문서로 소유하지 않고, 대신 아름다운 노래로 자신이 소유한 땅을 기억했다. 토지문서가 없는 탓에 백인들의 논리에 너무도 쉽게 땅을 빼앗기고 말았지만, 호주를 여행하던 브루스 채트윈 Bruce Chatwin은 아름다운 가치에 끌려 애보리진을 찾아가 그들의 노래를 검은색 공책에 수집했다.


“나는 주머니에서 검은색 공책을 꺼냈다. 기름을 먹인 천으로 감싸고

페이지를 고정할 수 있도록 고무줄을 달아놓은 공책이었다.”

송라인, 1987. 브루스 채트윈


채트윈의 책은 유럽인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고, 그가 저술한 여행기만큼이나 기록에 사용한 공책 역시 주목받았다. 기름 먹인 천으로 감싼 표지가 있는 공책을 프랑스어로 까르네 몰스킨 Carnet moleskine이라 불렀고, 채트윈은 호주로 떠나기 전 파리의 한 문구점에서 이 공책을 100권이나 구매했다. 여기에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표면이 부드럽고 질긴 면직물’이란 뜻의 몰스킨은 채트윈뿐만 아니라 고흐, 헤밍웨이 등 벨 에포크 예술가들이 널리 사용한 노트였다. 당대 인기에 힘입어 여러 공장이 비슷한 모습으로 까르네 몰스킨을 생산했지만 안타깝게도 1986년 마지막 공장이 문을 닫으며 프랑스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송라인의 독자였던 이탈리아 디자이너 마리아 세브레 곤데 Maria Sebregondi도 이 검은색 공책에 끌렸다. 마리아는 여행용품을 만드는 디자이너들을 찾아가 예술가들이 열광했던 ‘몰스킨’을 부활시켜 보자는 제안을 한다. 그들은 프랑스 전역을 뒤져 몰스킨을 만들던 공방을 찾았다.

잡을 때마다 부드러운 촉감을 선사하는 둥근 모서리의 검은색 표지, 어떤 펜으로도 훌륭한 필기감을 주는 미색의 중성지, 180도 펼쳐지도록 만든 사철 제본과 사용하지 않을 때 페이지를 고정할 수 있는 고무밴드, 뒤쪽엔 메모와 사진 혹은 영수증을 넣을 수 있는 주머니. 채트윈이 사용한 까르네 몰스킨은 옛날의 특징을 담아 다시 태어난다. 프랑스에서 사라졌던 노트가 1997년 이탈리아에서 부활했다.

‘나는 쓰이지 않은 책’입니다.

몰스킨은 서점에서 노트가 아닌 책으로 취급받는다. 몰스킨이 도서에. 부여하는 고유한 국제 표준 도서 번호 ISBN을 새겨 판매하기 때문이다. 몰스킨은 아직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빈 공책이 곧 ‘책’이 되길 바란다. 제목도, 지은이도 아직 없었지만 그것은 몰스킨을 구매하는 사람의 몫이다.

몰스킨은 배너에 헤밍웨이, 반 고흐, 피카소의 사진을 넣어 그들이 사용했던 공책이라는 문구를 새겨 사람들에게 영감을 선사한다. ‘당신 역시 이 공책과 함께 충분히 명작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입니다.’라는 메시지다. 표지 안에는 그 옛날 채트윈이 약속했던 것처럼, 공책을 잃어버렸을 때 찾아준 이에게 보상을 약속하는 기록란이 있다. 스스로 자신의 기록에 가치를 부여하는 행위는 창작물에 대한 자신의 목표를 뚜렷이 그려내어 나만의 몰스킨을 가치 있는 책으로 만든다.


우리 모두는 기록하는 인간이다.

메시지 ‘쓰이지 않은 책’에 공감한 사람들은 즉각 반응했다. 사람들은 이 공책에 짜임새 있는 기록을 정성껏 담고, 멋진 그림을 그리고 심지어 공책을 활용해 조형물을 만들었다. 몰스킨이 헤밍웨이와 반 고흐 등 예술가들의 영감의 원천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에 사람들은 더 큰 힘을 얻었고, 몰스킨은 전 세계 창조하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

다. 사람이 만든 브랜드가 다시 창조하는 사람들을 만든 셈이다.

몰스킨은 이들의 열정을 위해 ‘디투어 detour’라는 전시를 열었다. 글 쓰는 사람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글을 읽어주길 바라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을 기억해 주길 원한다. 내 창작물이 그 자체로 인정받는다면 창작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다. 몰스킨은 창작물로 가득 채워진 공책 콘테스트에서 선정된 공책

들을 전 세계 유명 도시에서 훌륭한 공책들을 전시했다. 전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참가하며 ‘디투어’는 성공적으로 개최되었다. 뉴욕, 파리, 베를린 등 세계의 유명 도시를 돌며 예술 작품이 된 몰스킨 공책들이 다른 사람들을 만났다. 이 전시에서 사람들은 직접 누군가의 기록이 담긴 몰스킨을 만져볼 수 있었다. 아크릴 박스로 만든 입체적인 액자 속에서 사람들은 중성지의 부드러움과 창조자들이 남긴 손길을 촉각으로도 체감할 수 있었다. 2006년 런던에서 시작한 ‘디투어’는 이스탄불과 도쿄로 이어져 전 세계적인 창조 열정을 퍼뜨렸다.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진화시키는 힘

몰스킨이 말한 ‘쓰이지 않은 책’은 하나의 모토가 되어 사람들을 움직였다. 몰스킨은 책상 위에서 창조의 흔적을 담은 기록이자 책꽂이에서 우리를 응원하는 관객이 되었다. 아직 채워지지 않은 몰스킨을 보고 있자면 무엇이라도 써야 할 것 같은 강박까지 느껴진다. 쓰이지 않은 책과 그것을 쓰는 사람 사이 흐르는 긴장감은 언젠가 작품이

으로 변할 소중한 잠재성을 갖게 된다.

몰스킨은 자신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한 노력에서 성공했다. 그들은 우리 모두가 가진 본성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했고, 우리의 욕구를 채워주는 방식으로 말을 걸어왔다. 브랜드는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과 소통하여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받는다. 브랜드의 정체성은 나 홀로 주장하는 것이 아닌, 그 시대에 걸맞은 사람들의 욕구를 관통하며 공감을 얻을 때 만들어진다. 몰스킨 말에 공감한 이들은 움직였고 세상은 그만큼 창의적인 결과물로 채워진다.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진화시키는 것은
말 잘하는 브랜드가 갖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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