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성’이란 단어는 매력적이다. 짧은 시간 안에 무언가를 이루어 내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지고, 남들보다 앞서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 부족함을 만회할 수 있다는 안도감을 동시에 선사한다.
시간이 많아져도 어차피 일의 총량은 변하지 않고 주어진 시간에 맞춰 일이 끝난다는 ‘파킨슨의 법칙’이란 것이 있다. 단기간에 무언가를 해내겠다는 명확한 목표는 집중력을 극대화하고, 제한된 시간이 주는 압박감이 때로 삶의 변화를 만들어 내는 강력한 동력이 되기도 한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대구에서 가장 번화한 ‘동성로’라는 곳에 있던 건물 2층 유리창에는 ‘속성’, ‘1주일 완성’,‘문법’,‘독해’라는 광고 문구가 큼지막하게 붙어 있었다. 유흥가 한복판에 영어 학원이 있었던 것을 보면, 법이 지금처럼 엄격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교실은 1개뿐이었다. 교재로 나눠 준 B4 용지 1장에는 ‘n+v+ad’, ‘n+v+n’ 같은 영어 품사로 된 공식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수업은 ‘문장의 5형식’ 같은 걸 몰라도 영어를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동사를 중간에 두고, 앞에는 명사, 뒤쪽에는 명사 아니면 형용사 정도가 온다는, 문장의 골격을 이해시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속성 영어 학원의 1장짜리 교재
1시간의 문법 강의가 끝나면, 영남대학교에 다니던 대학생 선생님이 몹시 어려운 10줄 정도의 독해 지문 하나를 1시간 동안 단어 하나하나 분석해 가며 천천히 해석해 주셨다. 일본 동경대 입시에 대비해 공부한다는 전설의 "1200제"에서 가져온 지문인 것은 몇 달 후에 알게 되었다. 당시 학력고사의 난이도를 훌쩍 뛰어넘는 교재였지만, 전교 상위권 학생들은 "성문종합영어"나 "1200제"를 당연한 듯 들고 다녔다.
1200제. 개정판.
‘1주일 완성’이라는 약속대로 하루 1시간 6일(주 6일 등교 시절) 후에 모든 진도가 끝났다. 원하는 사람은 다음 주에도, 그다음 주에도 수강료를 더 내지 않고 같은 수업을 반복해서 들을 수 있었는데, 나는 수업을 한 주 더 듣고 학원을 그만두었다.
이후로 늘 좋은 시험 점수가 나왔던 것은 아니었지만, 성취감은 컸고 고등학교 시절 내내 영어 과목에 대한 자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영문법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훑었다’는 안도감이 있었고, 성문 영어처럼 두꺼운 책을 완독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사라졌다. 사전에서 모르는 단어의 뜻만 찾으면 학원에서 배웠던 문법 지식 정도만으로도 웬만한 지문은 읽을 수 있다는 확신도 생겼다. 하지만 ‘성문 영어’라는 시대의 아이콘은 의무처럼 들고 다녔고, 내신과 모의고사를 준비하면서 교과서에 나오는 영문법도 아주 오랜 시간 ‘수련’하게 되었다.
2002년 월드컵의 열기 속에서 영어 강사로 첫발을 내디뎠을 때, 전공도 하지 않은 이과 출신 선생이 분필 하나만 들고 교실에 들어가도 영문법이라는 것에 대해 대충 이것저것 떠들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 시절 쌓았던 내공 덕분이었다.
훗날 영어를 전공하면서, 학교에서 배웠던 문법은 언어학에서 배우는 문법과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고등학교에서 배웠던 것은 ‘학교 문법(school grammar)’이라고 불리는, 학생들을 위해 실용적인 체계로 단순화해 놓은 것일 뿐 완벽한 이론 체계는 아니었다. 5형식 대신 7형식이 더 타당해 보이기도 했고, 언어학의 체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바로 그 ‘촘스키’님의 문법과는 아예 그림이 달랐다.
절대 진리처럼 믿고 있던 문법 지식이 그렇게 ‘고급’ 지식은 아니었다는 충격도 있었고, 언어라는 것이 분명 끊임없이 바뀌고 있을 텐데, 학교 문법의 체계와 내용이 1950년경부터 수십 년간 큰 변화 없이 공교육, 사교육 할 것 없이 가르쳐져 왔다는 것도 놀라웠다.
성문 종합 영어는 "정통 종합 영어"라는 이름으로 먼저 출간되었다. 1976년 판.
한국의 영어 교육에서 문법은 유창성을 위한 도구라기보다 언어학적 지식으로서의 의미가 더 강하다. 원어민과 대화하며 영어를 배우는 것을 더 좋아하는 아이들도 있지만, 문법 항목을 정확하고 체계적으로 익히며 영어를 배우는 것을 선호하는 아이들도 있다. 그러니 어떤 방법이 좋다 나쁘다 쉽게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아이들이 너무 어려서부터 어려운 문법 용어를 사용하는 수업을 받거나, 너무 많은 시간을 문법 공부에 할애하는 것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물론 영어 선생님이 되겠다는 꿈이 있거나, 영문법의 매력에 일찌감치 눈을 뜬 학생이라면 두꺼운 문법책이든 종이 사전이든 마음껏 탐독해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