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시적 학습법과 슈퍼 러닝
(테이프를 들으면서 호흡에 집중)
(숨을 들이쉬고 2초간 멈춘다)
“보이”, “소년”
(숨을 내쉰다)
(숨을 들이쉬고 2초간 멈춘다.)
“데스크”,“책상”
(숨을 내쉰다)
일간 신문 광고란에 큼지막하게 쓰인 ‘슈퍼 러닝’이라는 네 글자가 눈에 띄었다. 혼자 버스를 타 본 적도 없었던, 중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엄마와 함께 그 영어 학원을 방문했다.
영어와 우리말이 번갈아 나오는 테이프를 편안히 듣기만 하면 80개 단어가 순식간에 암기가 된다고 했다. 한 단어를 읽어 주는 시간은 약 10초, 15분이면 80개를 듣는 것이 충분했다. 3~4번 반복해서 듣고, 잘 외워지지 않는 단어는 녹음기를 끄고 조금 더 암기한 후,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앉아계시던 선생님께 검사를 맡고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모든 단어가 기억나는 건 아니었지만, 매일 학원에 나갔고 5일에 한 번 정도는 주요 단어를 복습하는 날도 있었다.
영어교육학 교과서에도 나오는, 로자노프(Georgi Lozanov) 박사의 ‘암시적 학습법(Suggestopedia)’이라는 것이 있다. 스트레스 없이 편안한 상태에서 학습 내용을 받아들이게 하는데, 이완된 마음 상태에서 긍정적인 암시, 음악, 미술적 요소, 스토리텔링 등을 활용한다.
‘슈퍼 러닝(Super Learning)’이라는 용어는 로자노프 박사가 사용한 명칭은 아닌데, 1970~80년대에 서구권에서 로자노프 박사의 이론을 소개하거나 변형하는 과정에서 등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매력적인 명칭으로 포장되면서 암시적 학습법의 원류와는 다른 모습으로 변형되거나 단순화된 방식으로 대중에게 전달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테이프로 단어를 주입했던 학원의 방식도 사실 로자노프의 암시적 학습법에서 나온 그 슈퍼 러닝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학원의 분위기는 체벌이 만연했던 학교와 달리 훨씬 편안했고, 좋은 기억으로만 남아 있다. 손바닥을 맞는 일도 없었고, 잘 안 외워지면 조금 더 공부하고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모든 단어를 기억하지 못해도 괜찮았고, 가끔 복습도 했다. 어떠한 불안감도 없었고 편안하게 눈을 감고, 때론 졸면서 듣기도 했으니, 어쨌든 기존 방식보다는 편안하게 단어가 흡수된 것은 사실이었다. 물론, 매일 80개를 암기하지는 못했지만, 그냥 그 정도로도 충분히 칭찬을 받았다.
학부모님들은 모르고, 선생님들은 어쩔 수 없이 방치하고 있는 어휘 암기의 관행이 있다. 많은 중고등학생이 알파벳 리딩을 하는데, ‘wrong’을 ‘우롱’, ‘psycho’를 ‘프시초’, ‘bone’는 ‘보네’, ... 대충 그런 식으로 외운다. 철자도 수능에 출제되지는 않지만, 수업 운영상의 편의 때문에 그런 식으로 어휘 교육이 망가져 간다.
입시 학원에서 입으로 읽고 귀로 들으며 단어를 외울 기회는 많지 않다. 단어 테스트에서 철자를 틀리지 않게 쓰면 그만이다. 통과를 못 하면 무한 재시험을 보는 등의 벌칙을 주니 시험에 나오지 않는 발음보다는, 단어의 ‘모양’을 빨리 익혀야 한다. 대학에 들어가 다시 배우더라도 지금은 제대로 발음을 익힐 시간은 없다.
간혹 어린 시절의 파닉스 교육으로 해결이 된 줄 알고 있는 학부모님들도 있다. 중고등학교 과정에서는 듣거나 발음기호를 익혀 발음하지 않으면 정확히 발음할 수 없는 단어들이 많다. 아이들이 조금만 더 편안한 환경에서 단어를 듣고, 읽고, 말장난도 하고, 지피티에게 어원도 물어보면서, 최소한 영단어 시험보다는 조금 더 즐거운 추억을 쌓았으면 한다.
Ghoti is pronounced as 'fish'.
(Ghoti는 fish와 발음이 같다.)
* ‘ghoti’는 영어 철자법의 불합리성을 꼬집기 위해 만든 가상의 단어.
- gh (enough에서의 'f' 발음)
- o (women에서의 'i' 발음)
- ti (nation에서의 'sh' 발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