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하고, 내려놓고 나니 나를 옳아매던 사슬이 조금은 느슨해졌던 걸까,
그동안 고집 부려오던 것들도 조금씩 덜어놓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컸던 것이 바로 필리핀으로의 어학연수였다. 부모님께서는 환경을 바꿔보는것이 내게 도움이 될거라 생각하셨고 그러한 이유로 인해 단기어학연수를 제안하셨었다. 그저 나를 보기 싫어서 멀리 보내버리는 거라는 왜곡된 어린 생각에 매번 거절해왔던 그 제안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어쩌면 정말 환경이 나를 변화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어학연수를 마음먹고 일주일 뒤, 나는 바로 필리핀으로 떠났다. 부모님 없이 해외로 나가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조금의 불만과 조금은 큰 기대를 품고 코로나 사태 이후 처음으로, 새로운 땅을 밟았다.
낯선 환경, 낯선 사람들. 그곳의 모든 것이 낯설었고 나 또한 그곳에서는 낯선이였다. 나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난생 처음 느껴보는 편안함을 느꼈다. 그 누구도 나를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변했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곳에서의 나는 그냥 '나' 였다.
내 생각보다 환경이 가져다주는 변화는 컸다. 환경이 한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침대에서 몇발자국도 움직이기 힘들어했던 내가,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매일같이 운동을 하고 음식을 먹거나 먹지않거나 극단적이었던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즐겁게 음식을 먹고 있었다. 자기 전에 매일 같이 울었던 내가, 저녁이 되면 밖으로 나와 선배드에 누워 별을 지켜보곤 했다.
'아, 행복하다.'라는 감정이 스쳐지나가는 순간이었다.
이상했다. 어색했고, 또 한편으로는 놀랐다.
몇 년 만에 느낀 감정이었다.
또 하나 아이러니한 것은, 필리핀에서 지내는 동안 내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바로 "You always look happy" 였다는 것이다. 가장 힘든 순간에 도망치듯 온 도피처에서, 나는 가장 행복해보인다는 말을 듣는다. 거창하진 않았지만 내게 찾아온 그 찰나의 행복들은, 생각보다 큰 영향을 미쳤고 더 나아가 한 사람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