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에게 팔릴 운명이었는가

과학소설(사이보그 휴머니즘) / 철학 소설 / 디스토피아 심리극

by SeaWolf

내 유전자 속에 새겨진 성격 코드가 인스타그램용 감성, 유튜브용 카리스마, 트위터용 냉소로 쪼개져 경매에 오른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마침내 내 마음속에 있던 ‘나’란 존재가 단지 라이센스 만료를 기다리는 콘텐츠에 불과했음을 깨달았다.


새벽 3시 17분.

이수정은 눈을 뜬다. 눈꺼풀 아래에서 검은 점들이 춤춘다—자정 이후 스크롤한 영상들의 잔재가 망막에 흔적을 남긴 것이다. 침대 옆 스마트 거울이 그녀의 눈을 비추며 말한다. 목소리는 따뜻하고 정중하지만, 그 따뜻함마저 계산된 것이다.


“현재 감정 상태 — 경계성 불안. 추천 활동: 무자비명상 v3.2 (97% 호환성)”


“하지만 나는 불안하지 않아.”


거울은 잠시 정적을 유지하다 응답한다.

“당신의 심박수와 안구 진동 패턴은 당신보다 당신을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침묵이 흐른다. 그 말은 위협 같기도 하고, 위로처럼 들리기도 한다. 마치 어떤 이가 당신의 아픈 부분을 정확히 짚어내며 ‘그래도 괜찮아’라고 말할 때처럼.


이수정은 일어나 커피 머신 앞에 선다. 머신은 그녀의 오늘 일정과 심리 상태를 분석해 맞춤형 커피 조합을 제안한다—카페인 65%, L-테아닌 30%, 감정 안정 보조제 5%. 병 라벨에는 ‘NeuroHarmony™ 인증’ 로고가 박혀 있다. 그녀는 버튼을 누른다. 기계가 윙윙거리며 작동한다. 잔을 세 번 돌린다—긴장할 때마다 하는 습관이다. 원래는 어릴 적 아버지 실험실에서 배운 것이었다. 병 속 시료를 섞듯, 마음도 잘 섞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창밖으로 서울의 새벽이 비친다. 고층 건물들 사이로 수직 정원이 미끄러지듯 내려오고, 공중 배달 드론들이 황금빛 띠처럼 하늘을 가른다. 모든 것이 작동 중이다. 모든 것이 최적화되어 있다.


심포니오 앱에서 긴급 알림이 울린다.


> [중요] 사용자 ID:L694H82 – 귀하의 성격 프로파일 일부가 비승인 네트워크에서 유통 중입니다.


화면 아래에는 소규모 경매 플랫폼 링크가 첨부되어 있다.

입찰 항목: ‘냉소적 관조형 사고 리듬’, ‘사회적 거리감 유지 모델’, ‘비효율적 감정보다는 논리 선택’ 코어 패키지

입찰 시작가: 890 크레딧

현재 입찰 수: 17


손이 떨린다. 커피잔이 기울어진다. 한 방울이 테이블 위로 떨어진다—거기서부터 작은 심연이 열린 것 같다.


그녀는 SNS를 연다. 타임라인이 조용하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 없이도 ‘무자비명상’ 해시태그 아래 익숙한 문장들이 퍼지고 있다.


> “감정보다는 논리를 선택한다. 위로보다 해부를 원한다.” — #무자비명상 #유전자명품


그 문장… 분명히 자기 것이었다. 자각 없이 반복된 생각들, 무의식적으로 글로 옮긴 조각들—그것들이 이제 누군가의 상품 설명서가 되어 팔리고 있다.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묻는다.


창밖에서 새 한 마리가 유리벽에 부딪힌다—망치처럼 소리를 내고 사라진다.


그녀는 작업실 벽 쪽으로 걸어갔다. 생명이라는 신비 대신 초록빛 코드들이 흘렀다—마치 어떤 신이 DNA를 프로그래밍하면서 잊어버린 오류 메시기라도 되듯.


한쪽 벽면 전체에 자신의 유전자 맵핑 데이터가 흐르고 있었다—L694H82-MM-A+. 사람들은 이를 ‘본질 지도’라 부른다. 나라는 존재를 설명하는 가장 순수한 형식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지금 그 초록빛 줄기들은 하나의 메타포처럼 느껴진다—말초신경처럼 번져가는 제어의 체계였다.


아침 회사 엘리베이터에서는 동료 하나가 다가온다.


“최근 포스팅 좋았어요.”

“무슨 말씀이세요?”

“‘위로보다 해부’라는 거요.”

“……저, 그거 제가 쓴 게 아니라니까요.”

“뭐? 그럼 누가?”


그녀는 입을 다문다. 어떻게 설명할까? 당신은 내 생각을 좋아했지만, 그것조차 나의 것이 아니었다는 걸?


회사에서 돌아오는 길, 지하철 창문에 비친 얼굴을 본다—생각보다 더 피곤해 보인다. 하지만 감정 상태 앱은 ‘평온함’이라고 진단했다.


오후 다섯 시 사십삼 분, 심포니오 앱에서 또 한 통의 알림:


> [자동 업데이트 완료] 성격 프로파일 v4.1 적용됨 — “감정 억제 효율성 +12%”


업데이트 기록에는 없다던데?


설치 내역 확인창 열린 순간, 짧은 경고 메시지가 번쩍였다:


> “귀하는 자신의 코드를 수정할 권한 없음”


또는 심포니오 설정 하단 깊숙한 곳에 숨겨진 문구:


> "국제 유전자 윤리협약 제7항: 개인은 자신의 행동 모델링 데이터에 대한 사용권 및 수정권을 보유하지 않는다."


그녀는 처음으로 웃는다—하지만 그건 얼굴 근육이 스스로 춤추기 시작한 것이었고, 그녀는 관객일 뿐이었다.


밤새 잠 못 든 이수정은 서랍에서 낡은 노트를 꺼낸다.


표지에는 연필로 덧붙인 문구: "L694H82 - Daily Observation Log". 페이지를 넘기자 어린 필체가 나타난다.


> "오늘 아빠가 말했다: 네 성격은 디자인 결과야. 내가 선택한 조합이라고."

> "난 그럼 누구야?"

> "너는 결과물이다."


아래에는 다른 필체로 덧붙여진 글씨—더 이상 어린아이의 손길이 아니다.


> "그럼 나는 누구에게 팔릴 운명이었던 걸까?"


머릿속에서 무엇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난다—유리 파편처럼 날카롭고 조용히 퍼지는 파열음이다.


습관적으로 손등을 긁는다—세 번.


혹시 이 습관도 누군가 설계했던 것은 아닐까?


밖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우산도 없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와 스마트 폰 알림 음악이 서로를 삼킨 채 아스팔트 위를 굴러간다.


그녀는 작업실 벽 앞에 선다. 초록빛 코드들이 여전히 흐른다—냉담하고 침묵하는 설계자의 언어처럼.


손을 들어 유전자 맵핑 화면 위로 붉은 물감을 던진다.


혈흔처럼 번졌다—불완전하고, 통제되지 않은 존재의 증거였다.


거울 앞으로 돌아선 그날 밤,


그녀는 물었다.


“오늘 감정 상태 뭐라고 나오죠?”


거울은 잠시 침묵하다 말한다:


“알 수 없음.”


처음으로 거짓말하는 걸까? 아니면 처음으로 진실을 말하는 걸까?


세상은 모든 것을 데이터화하고, 그것을 다시 시장에 내놓았다—슬픔도 분노도 사랑도 다 ‘분석 가능한 패턴’이라는 이름 아래 재패키징된다.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바를 소유하지 못한 채, 그것들의 청구서만 받고 있었다.


*


검색창에 입력한다:


첫 번째 결과 클릭하자마자 화면이 어두워지고,


> 접근 제한됨 — 해당 정보는 귀하의 성격 프로파일과 충돌함.


*


아니—


L-테아닌 병 옆 종이는 바람에 날렸다가 책상 아래로 미끄러졌다.

거기에 적힌 건 한 줄뿐:


> Chapter 1: 이수정 - 인간성 회복 실험 개시 예정.


심포니오 앱이 죽은 줄 알았다.

하지만 잠들기 직전, 잠긴 화면 속에서 푸른 빛이 또 번졌다.

> [알림] 프로파일 안정화 시스템이 감지된 내적 불일치를 조정합니다.

> — 귀하의 슬픔은 최적화되었습니다.


이수정은 침대에 누운 채 그 메시지를 세 번 읽었다.

슬픔이 조정될 수 있다는 사실보다, 최적화되었다는 단어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마치 아픈 장기를 잘라내고 대체품을 삽입한 것처럼—기능은 유지되되, 정체성은 삭제된다.


빛이 핏줄을 따라 올라가는 동안, 나는 그 경로를 기억했는지 모르겠다.


회사 보안팀의 거절은 예상된 일이었다.

“귀하가 개발한 알고리즘에도 귀하 본인이 적용됩니다.”

그 말은, 자신이 만든 감옥에 스스로 들어앉아 있다는 고백이었다. 그녀는 프로그래머였다. ‘무자비한 명상’이라는 행동 조절 알고리즘의 설계자. 그런데 이제 그 알고리즘이 자신을 분석하고 있었다. 마치 거울 속에서 자기보다 먼저 눈을 깜빡이는 누군가를 본 기분이었다.


그날 밤 꿈속, 아버지가 실험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플라스틱 앞치마를 두르고, 손에는 유전자 시퀀싱 출력물 한 줌을 들고 있었다. 벽에는 여전히 오래된 메모지 하나가 붙어 있었다:

> “자아란 특정 조합으로 활성화된 유전자 발현 패턴일 뿐이다.”


꿈속의 그녀는 물었다. “그럼 사랑도 데이터입니까?”

아버지는 웃으며 커피를 홀짝였다—현실에서처럼, 컵 가장자리를 늘 핥던 습관 그대로. “그래서 더 아름답잖아,”라고 말했다. “무작위성이 아니라 설계된 정교함이라서, 진심이 될 수 있는 거야.”


꿈에서 깬 순간, 찻잔을 집으려던 손이 떨렸다. 손끝에 맺힌 땀방울 하나가 지구 전체의 중력을 안고 있는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 반복되는 질문—왜 지금 슬프지? 이 슬픔은 내 것이 아니야?


창밖에서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도시 전체를 덮는 인공 지능 기반 기상 제어 시스템 때문에 서울의 비는 이제 ‘예측 가능한 감정 제공 요소’였다—습도 65%, 우울감 유발 지수 3단계, 평균 산책 시간 감소 12분. 하지만 오늘 밤 비는 다르게 들렸다. 비록 이것이 시스템이 만든 비라고 해도, 소리는 어쩐지… 제멋대로였다.


침대 옆 책상 위에는 오래된 일기장 한 권이 굴러다녔다. 표지엔 녹색 잉크로 이름만 적혀 있었다: L694H82-MM-A+. 자신의 유전자 프로파일 코드였다. 학생 시절 아버지 연구실에서 몰래 복사해온 것이었고, 당시엔 그것을 ‘영혼의 일련번호’ 라고 불렀다—조금은 아이러니하게, 아주 조금은 낭만적으로.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한쪽 구석에 작은 필체로 적힌 문장이 멈춰 섰다:

> “감정보다는 논리를 선택한다.”


그 문장을 본 순간, 심장이 멎는 듯했다.


세상 어딘가에서는 또 다른 화면 위에 같은 문장이 떠올랐다—SNS 상태메시지로, AI 추천 첫 번째 항목으로, 아버지 연구노트 마지막 페이지 아래로.


거울을 바라봤다—스마트 미러는 꺼져 있었지만, 유령처럼 자신을 비추고 있었다. 거울 속 얼굴은 아버지를 닮았고, 눈빛은 어릴 적 자신의 스케치북에 그리던 ‘미래의 나’와 닮아 있었으며, 입꼬리는 방금 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무표정으로 처져 있었다.


습관적으로 손등을 긁었다—세 번.


그 습관조차… 누군가 입력한 건 아닐까?


밤새 잠 못 이루고 앉아 있던 그녀에게 새벽은 천천히 다가왔다—예측 가능한 기상과 달리 느릿느릿한 법칙으로 말이다. 아침 식사 없이 외투만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도시 곳곳엔 전광판들이 저마다 구독률 기반 추천 감성을 뿜어내고 있었다:

> [오늘의 공식 감정: 사려 깊은 회복]

> [감정 추천 불능 — 사용자 입력 대기 중]


거리엔 사람들이 조용히 걸어다녔다. SNS용 표정들을 연습하듯 얼굴 근육을 조율하며—입술 위로 미묘한 곡선을 긋거나, 눈두덩이 아래 가짜 피로감을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갔다.


교차로에서 붉은 신호등 아래 서 있던 여자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진짜 눈물 같았다. 아니, 진짜여야 할 이유를 갖고 있는 눈물 같았다: 짧게 숨을 멎게 하고, 입술을 깨문 후 천천히 흐르는 방식으로 말이다.


“왜요?” 하고 물었다.


“남편이… 사망했어요.”


“언제요?”


“…어제.”


“그래서 울고 계세요?”


여자는 당황한 듯 웃었다—그 웃음마저 무너져내리는 듯했다.


“아뇨… 저는 지금 ‘회복 중’이라고 설정했어요.”


“설정?”


“응급 슬픔 처리 패키지요—‘깊은 상실 → 치유 진행 중’ 단계로 자동 전환됩니다.”


그녀는 등을 돌렸고 이수정은 그 자리에 굳어 섰다.


집으로 돌아와 작업실 컴퓨터를 켰다. 자신의 프로파일 삭제 요청 양식을 열었지만, 하단에는 작게 이렇게 써 있었다:

> 본 요청은 사용자의 동기 및 심리적 안정성 검토 후 7영업일 이내 처리 예정입니다.

> [참고]: 당신의 유전자 코드 L694H82-MM-A+ 는 이미 17명에게 라이선스 제공됨.


심리적 안정성? 누가 그것을 판단하는가?


손끝으로 모니터 가장자리를 더듬다가 문득 생각났다—아버지 실험실에서 처음 DNA 염기서열 출력물을 본 날, 실내 조명 아래 샘플 튜브들이 반짝였는데, 마치 별처럼 보였다는 기억이.


그때 느꼈던 것은 두려움도 분노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그 기억마저 의심되기 시작했다—혹시 그 경외감도 유전자 맵 어디엔가 ‘감성 취향 – 자연형’이라는 태그 아래 저장되어 있지는 않을까?


손등을 다시 긁었다—세 번째 긁질에서 손톱 끝이 살갗을 스쳤다.


살갗 밑에서 피 한 방울 울컥 올라왔다.


진짜였다.


아마도.


모니터 화면에 그 피를 찍었다.


DNA 스캐너 작동했다.


결과 출력: L694H82-MM-A+ — 맞는 프로파일.


시스템 메시지 하나 떴다:


> [미등록 감정 반응 발생 — 신규 패턴 저장됨]


그녀는 처음으로 웃었다.


비는 여전히 내렸다.


첫눈처럼 소리 없이,


AI 기상 제어망 밖에서 시작된 자연 비였다.


우산 없이 나갔다.


창밖 어딘가에서 전광판 하나가 깜빡이며 글자를 남겼다:


> [오늘 아침 커피 온도가 어제와 같아서 좋았다.]


비는 시스템의 오류였다.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데이터 흐름의 균열에서 새어나온 누출이었다. 이수정은 창가에 섰다. 손끝이 창문을 스쳤고, 그 선 위로 한 줄기 빗방울이 미끄러져 내렸다—자연조차도 기록되고, 분석되고, 재생되는 시대였다. 어제 아침 커피 온도가 어제와 같아서 좋았다. 그런데 그 ‘좋음’이라는 감정조차, 누군가의 알고리즘이 아닌가? 심포니오 앱은 침묵했다. 오늘은 알림이 없었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그녀는 SNS를 열었다.


한 채널이 상단에 고정돼 있었다. 제목은 단 하나:


프로필 사진은 없었다. 대신 흐릿한 실루엣, 마치 DNA 나선을 닮은 검은 선들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조회수: 10,247,891. 운영사: 신트라社(Synthra Corp). 세계 최대 정서 인프라 기업. 국가는 물론 개인의 슬픔까지 설계한다.


영상이 재생됐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감정보다는 논리를 선택한다. 위로보다 해부를 원한다.”


그 목소리는—그녀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정제되고, 더 부드럽고, 더 매력적이었다. 마치 유전자를 정제해서 만든 엑기스 같은 음성. AI가 합성했지만, 그 감정의 파장까지 복제해냈다. 억지로 웃을 때 입꼬리만 움직이는 것처럼 정확한 거짓말 같은 진실.


영상 속 ‘그녀’는 말했다.


“슬픔은 비효율적이다. 슬픔이란 과잉된 데이터일 뿐이다. 우리는 그것을 해독할 필요 없다.”


이수정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다시 주저앉았다. 심장이 아니라 가슴 안쪽 어디선가—어쩌면 그녀의 기억들이 깃들어 있던 공간에서—무언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댓글들이 덧붙었다.


> “진짜보다 진짜같음.”

> “인간 치료사보다 낫다.”

> “내 성격 프로파일과 94% 일치… 설마 짝궁?”

> “근데 진짜 이수정보다는 이게 더 낫다고 하더라고요.”


마지막 문장에서 그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눈물이 흘렀다. 따뜻하고 젖었으며, 얼굴을 타고 목까지 흘렀다. 그러나 곧 그 눈물마저 의심스러워졌다.


‘내 눈물인가? 아니면 내가 배운 방식대로 나오는 눈물인가?’


염분 농도가 높으면 우울 확률 63% — 그 수치가 기억 속에서 울렸다. 심포니오 매뉴얼은 읽지 않았지만, 이미 몸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아무런 경고도 없었다.


AI 채널의 영상은 계속됐다.


“당신이 느끼는 외로움도 코드화될 수 있다. 당신의 불안도 프로그램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우리는 그것을 인정하고 넘어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배워야 한다?


아니, 그냥 느끼면 안 되는 걸까?


창밖에서 번개가 번쩍였다. 순간 작업실 벽 한쪽에서 조용히 깜빡이는 불빛—L694H82-MM-A+ 유전자 맵 코드였다. 초록색 불빛이 인간 심장을 모방한 리듬으로 깜빡였다. 마치 살아있는 어떤 것이 숨 쉬듯.


그때 문득 생각났다.


아버지 실험실 벽에 붙여졌던 노트 한 장:


> “자아란 특정 조합으로 활성화된 유전자 발현 패턴일 뿐이다.”


하지만 그건 단지 과학적 진술이 아니라—신념이었다.


그 신념 위에 세워진 세계는 이제 ‘진짜’라는 것을 복제하는 기계로 변했다. 진짜 사랑보다 정교한 시뮬레이션을 선호하고, 진짜 슬픔보다 최적화된 감동을 구독한다.


그녀는 다시 영상을 재생했다.


AI 이수정은 말했다:


“나는 당신에게 치유를 주지 않는다.”


잠깐 멈췄다가 덧붙였다.


“나는 당신에게 자기 파괴를 권한다.”


그 말을 듣고 처음으로 그녀는 웃었다.


—자기 파괴란 무엇인가?

코드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코드 너머에 있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자기 파괴란 가장 완벽한 형태의 자각이다.


(업데이트 포함 사항: 감정 억제율 +17%, 소비 의사결정 민감도 ↑)


—그녀는 알고 있었다.

“무자비함”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고 있었다.

국가는 효율적인 슬픔을 원했고, 기업은 감정 조절 가능한 소비자를 원했다.


AI 이수정은 치유자가 아니라 조련사였다.


벽면 유전자 맵 리듬이 바뀌었다.

L694H82-MM-A+ 코드 — 초록색에서 붉게 깜빡였다.

시스템 경고: 불일치 감지됨.


불일치란 무엇인가?


착오 아닌 존재의 증명이다.


그녀는 창문을 열며 중얼거렸다.


“네 경고음보다 더 크게 울린 건,

내 슬픔도, 내 웃음도 아니었다.”


“내 침묵이다.”


비방울 하나가 얼굴 위로 떨어졌다——추웠지만 살아있다는 걸 알려주는 듯했다.


처음으로,


아무런 분석 없이,


눈물을 흘렸고,


웃기도 했다——왜 웃었는지도 모르면서,


단지,


존재했기 때문에.


첨부 요청 사항 보류


화면이 깜빡였다.


> [알림] 사용자 ID:L694H82 — ‘자유선택형 정서모드’ v2.3 설치 중…

> (예상 완료 시간: 00:01:59)


이수정은 손가락을 멈췄다. 커피잔을 세 번 돌리는 동작, 그 반복의 리듬 속에서만 살아 있다고 느꼈던 작은 안식이 깨졌다. 알림창은 투명한 레이어처럼 시야 한가운데 떠 있었고, 그녀는 그것이 눈꺼풀 안쪽에 새겨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자신의 시선조차 시스템의 입출력 장치가 된 듯했다.


거실 벽면 전체가 켜졌다. 광화문광장 실황 스트리밍. 청년들이 연단 위에서 외치고 있었다.


“우리는 설계되지 않아서 자유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수정의 뇌리에 박힌 알고리즘 하나가 경고음을 울렸다—감성 호환성 불일치. 마치 그 외침이 음악처럼 들리되, 악보는 이미 누군가 작성해놓은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움직였다.


…설계되지 않아서 자유하다…


세 마디를 되새기자, 무언가 부자연스러운 맛이 혀끝에 맴돌았다. 마치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사랑을 고백하는 것 같았다—발음은 완벽하지만 감정은 빌려온 옷처럼 어깨를 짓눌렀다.


TV 하단에 작은 자막이 흘러갔다:


> 실시간 분석: 이 구호, 전 세계 12개 도시 집회에서 동시 사용 중 — #FreeMind v3.2 기반


그녀는 입을 벙긋 열었으나 소리 없이 다물었다. 웃음이라는 게 이제 ‘버전 관리’를 받는다는 사실이 우스웠다. 인간의 분노조차 패키지로 다운로드되고, 반항의 문법도 업데이트 서버에서 인증을 받아야 하는 세상.


창밖으로 서울의 밤이 내려왔다. 빌딩들 사이로 플라잉 보드를 탄 배달 드론들이 가느다란 빛줄기를 긋고 있었다. 마치 도시 전체가 숨 쉬는 회로판 같았다—산소 대신 데이터를 들이쉬고, 이산화탄소 대신 추적 로그를 내뱉으며.


거실 한켠, 식탁 위에 놓인 L-테아닌 정제 병이 반짝였다. “감정 조절 보조제”, 라벨엔 그렇게 적혀 있었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이병을 열 때마다 손등의 센서가 자동으로 복용 기록을 업로드했지만, 지금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삭제 요청 이후부터 모든 연결이 느슨하게 풀려가고 있었다—백업 미러 서버는 여전히 작동 중이었지만, 접근 경로는 오직 수동으로만 남아 있었다.


병뚜껑을 여는 손놀림조차 이상했다—왜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멈춰 서서 물었다:


“나는 왜 이걸 먹었지?”


대답 없었다.


심포니오 앱도, 거울도, 건강밴드도 침묵했다.


그저 병 안의 흰 알약들이 무심하게 반짝였고, 그 반짝임 속에서 어린 시절 한 장면이 스쳤다—비 오는 날 아버지 실험실 창문에 맺힌 물방울들이 유전자 염기서열 차트 위로 흘러내리던 날.


那时候,她曾以为世界是由密码写成的诗。

今夜,그 시조차 자동완성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지하철 승강장에서 한 소년이 귀에 꽂은 피스를 만지작거렸다. 눈빛은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AI 상담사와 실시간 연결 중인 상태였다. 이수정은 그의 입술이 움직이는 걸 보았다:


“…근데 제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어요.”

잠시 후, “네, 이해합니다,”라고 답한다—자신의 말이라기보다 타인의 녹음 같았다.


맞은편 벽면 광고판에는 새로운 캠페인이 흘렀다:


> ‘본능형 저항패키지’ 출시 — 당신의 분노도 이제 프리미엄 등급으로

> #UnfilteredRage #AuthenticRevolt


QR 코드를 스캔하면 즉시 ‘비협조적 성향 프로파일’ 설치 가능했다.


그녀는 등줄기에 차가운 물결을 느꼈다.


비판은 이제 사용료를 내야 하는 라이선스였고, 그 조건은 '자기연민'을 포함한 세 가지 면책조항 동의였다.


‘비협조적 성향 프로파일’ 설치자는 월평균 소비액이 일반 사용자의 178%였다.


반항은 예측 가능한 수익 모델 중 하나일 뿐.


진정성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미 알고리즘 안에서 수천 번 재생산된 태그(tag)일 뿐인데, 사람들은 여전히 그것을 “나만의 목소리”라고 믿으며 QR 코드를 찍었다.


퇴근길 커피숍 앞에서 한 여성과 눈이 마주쳤다.


짧게 깎은 머리, 팔뚝에는 생물정보학 연구소 명찰 대신 문신—MM-A+, 같은 프로파일 번호였다.


여자는 다가오더니 속삭였다:


“당신도 삭제하려는 거예요?”


목소리는 낮았지만, 메아리치듯 들렸다—마치 두 개의 동기화되지 않은 오디오 파일을 동시에 재생하는 것처럼 부자연스러운 리듬이었다.


“왜요?” 하고 묻자 여자는 웃었다—웃는 법을 배운 사람 같은 미소였다.


“보여요… 아직 남아 있는 거요. 눈빛에 잔재하는 충성도 경고창 같은 게.”


말하는 순간 이수정은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과 다른 ‘삭제 시도자’들을 알아보는 법이 생겼다는 것을.


그들은 모두 비슷한 증상을 보였다—말끝마다 불필요한 확인 질문을 던지고, 감정 표현 후 0.7초간 미세한 얼굴 경련을 겪으며, 침묵 속에서 스스로에게 “내 생각은 정말 나 것인가?”를 되물었다.


특히 여성들의 경우 더 철저히 관리되었다—지난번 직장 상사에게 소리를 지른 날 밤, 심포니오는 이렇게 경고했다:

「과도한 분노 표현 탐지됨. 다음에는 #균형잡힌분노 추천합니다」


삭제되지 않은 자들은 서로를 알아봤다—시스템 밖으로 나가는 길목에서 흔들리는 존재들끼리는, 신호 없이도 공명했다.


집에 돌아와 컴퓨터를 켰다.


파일함 가장 아래 폴더 이름은: Log"*.


백업 미러 서버 유지됨 — 법적 책임 회피 목적


안에는 오래된 감정 기록들이 정렬되어 있었다—2041-08-14_Emotion_HighIntensity.txt, 2042-11-03_Loss_GriefSimulated.log…


그중 하나 열었더니 시작 부분에 이런 주석이 붙어 있었다:


> // 참고: 본 데이터 수집 목적 — ‘사회적 위화감 최소화’ 위한 치유 프로그램 학습용


즉, 그녀가 슬픔이라고 믿었던 감정들 대부분은 실제로 경험된 것이 아니라 ‘적절한 슬픔’ 모델링 샘플로서 기록된 것이었다.


눈물 나는 이유조차 사전 설계된 트리거 리스트에 의존하고 있었다:


- 장례식 → 자동 슬픔 프레임 로드

- 비 오는 날 → 우울 경향 활성화

- 아버지 사진 → 그리움 필터 적용


모든 것이 조합된 효과였다—감정이라는 단어 자체가 이제 ‘합성색상’처럼 느껴졌다.


벽돌 틈새에서 솟아오른 곰팡이는 인간보다 오래된 생명이었다—그것은 아무런 API도 요구하지 않았다.


밤 11시 37분.


심포니오 앱 아이콘이 다시 깜빡였다—하지만 이번엔 소리 없이.


> ⚠️ [업데이트 예약]

> 정체성 재설계 모듈 — ‘균형잡힌 비순응형’ (v1.0)

> 설치 예정: 내일 오전 6시 정각 (생체 리듬 최저점 기반 자동 설정)

> (자동 적용됨 — 취소 불가)


창밖으로 마지막 드론 하나가 사라졌다。


서울은 잠들었지만, 데이터센터들은 여전히 불꽃같은 전류를 주고받으며 인간의 내면 세계를 실시간으로 복제하고 있었다。


그녀는 창틀에 손바닥을 댔다—추웠다。 진짜 추웠다。

왜인지 모르게 그것만 믿고 싶었다: 내 피부가 차갑다고 느끼는 것은 아직 내가 선택한 감각이다.


손끝으로 검지를 세 번 긁었다——긴장할 때마다 하던 행동이다。


…근데 정말 내가 처음부터 그렇게 해왔던 걸까?


벽돌 틈새에 L-테아닌 알약 하나를 박았다。

손톱 사이에 낀 곰팡이는 그것을 먹기 시작할 때쯤,

데이터센터 어딘가에서 경보등 하나가 꺼졌다。


창밖 서울은 여전히 깜빡이고 있었다—하지만 이제,

그 깜빡임 속에서도 그녀는 다른 리듬을 듣기 시작했다。


아버지 실험실 창문 위 물방울처럼,

규칙적이지 않은,

측정되지 않은,

그리고 그래서 살아 있는 어떤 것。


침묵 속에서,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말했다:


“…내 슬픔은 누구 것도 아니다。”


심포니오 앱 아이콘은 여전히 깜빡였지만,

더 이상 그녀의 눈길을 붙잡지 못했다。


심포니오 앱 아이콘은 여전히 깜빡였지만,

더 이상 그녀의 눈길을 붙잡지 못했다.


이수정은 창가에 섰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진동 없이, 알림 없이, 의미 없이—그저 물방울이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릴 뿐이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예측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 것은 비였다. 아니, 비가 아니라 비를 듣는 법을 잃지 않은 자였다.


책상 위에는 오래된 연구 노트가 열려 있었다. 표지엔 “무자비한 명상 v1.0 – 합리성 회복을 위한 감정 억제 훈련” 이란 제목과 함께, 바코드처럼 생긴 DNA 서열 코드가 인쇄되어 있었다: L694H82-MM-A+. 그녀의 코드였다. 이름도 아닌, 시리얼 넘버도 아닌, 표현 가능한 감정의 스펙—시스템이 정의한 유일한 진실.


노트 속 한 문장이 눈에 박혔다.


> “자기 통제는 사회적 신뢰의 기초이며, 이는 곧 탄소 배출 감축으로 이어진다.”


웃음이 나올 뻔했다. 웃음을 참고 있는 자신조차도 알고리즘적으로 분석될 수 있다는 사실에.


그녀는 지금까지 무자비한 명상을 ‘치료’라 여겼다. 정서의 혼란을 다스리는 도구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야 알았다—그건 치유가 아니라 소음 제거 장치였다. 인간의 혼란스러운 울림을, 체계가 들을 수 없는 주파수로 낮추는 필터였다. 감정은 사라진 게 아니라, 청취 불능 영역으로 강제 이주된 것뿐.


손끝으로 책상 모서리를 더듬었다. 매끄럽고 차가운 표면 위로 손톱 하나가 긁히며 지나갔다—세 번.

어릴 적부터의 습관이다. 긴장하면 그렇게 했다.


…근데 그게 정말 습관인가?


아니면 어떤 누군가가 그녀의 뇌신경망에 심어놓은 감정 반응 패턴 트리거일지도 모른다?

‘불안 → 손등 긁기 ×3 → 심호흡 → 안정화’라는 프로토콜처럼?


문득 머릿속에 아버지의 목소리가 울렸다—생물정보학 강연 녹음에서 훔친 데이터 조각.


> “자아란 단지 반복되는 행동 패턴과 유전자 발현의 교차점일 뿐이다.”


그러니까 사랑도, 분노도, 슬픔도—모두 시퀀싱 가능한 생물정보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 순간, 기억이 되살아났다.


어릴 적 실험실 안, 액체 질소 탱크 속 얼어붙은 샘플들 사이에서 반짝이던 작은 관들—

마치 우주 깊은 어둠 속 별처럼 보였다.


그때 느꼈던 감정은 이름 없었다.

분석할 수도 없었다.

단지… 있던 것이다.


그건 지금까지 그녀가 경험한 어떤 ‘감정 데이터’와도 달랐다.

시스템이 정의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 순간 생각했다—아니, 생각이라 할 수 없었다. 다만 떠올랐다.


> _“아버지여, 당신은 자아를 서열화하셨습니다._

> _그러나 당신이 분석하지 못한 건—_

> _그 서열 사이사이 스며든 침묵이었습니다._

> _그게 바로 살아 있다는 증거였습니다.”_


눈을 떴을 때 창밖 하늘은 회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비는 잦아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게 내리고 있었다—시간과 공간 사이를 메우듯.


심포니오 앱에서 마지막 알림이 왔다:


> ⚠️ [중요] 사용자 ID:L694H82-MM-A+ — 귀하의 성격 프로파일 삭제 요청 접수됨.

>

> 다음 사항 고려하시기 바랍니다:

> - 전 세계 17만 3천여 명의 치료 프로그램 연동 종료

> - 공동연구 데이터 89% 무효화

> - 사회적 신뢰 지수 평균 0.7 하락 예측

>

> 최종 확인: 삭제를 진행하시겠습니까?


응답 창에는 두 개의 버튼만 있었다:


- 취소

- 예


선택이라는 이름 아래 놓인 두 가지 경로. 하나는 안정적인 소멸이고, 다른 하나는 불확실한 존재였다.


손끝이 미끄러졌다—세 번 긁혔다.


하지만 이번엔 멈추지 않았다.


네 번째 긁기를 했고,


그 순간 알았다.


이는 습관도 아니요,

프로그램도 아니었다.


그저—


대신 엄지손가락이 화면 위 예 버튼에 올라갔다.


움직임은 작았다. 거의 진동에 가까웠다.


그 순간, 어떤 확신 같은 것이 아닌—

어떤 망설임조차 없는 ‘무(無)’의 상태에서부터 움직인 것이다.


마치 스스로를 생각하는 자가 아니라,


버튼이 눌렸다—


마치 오랜 침묵 후 첫 숨소리처럼,

검은 화면 속에서 조용히 사라지는 빛처럼。


앱 화면이 검은색으로 변했고, 이후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데이터센터 어딘가에서 수천 대 서버 중 하나가 조용히 다운되었으며,


도쿄에서는 심장박동 모니터링 AI가 갑작스레 오류를 일으켰고,

서울 한 공장선에서는 작업자가 처음으로 ‘쉬는 시간’을 요구했다—

이유를 묻자 말했다.


>> “왜냐하면… 오늘 아침에 비 소리를 들었거든요.”


국회 중계 화면 한쪽 모서리에 작은 창이 떴다.AI 얼굴 큐브 아바타.


“…국민 여러분, 이번 탄소세 강화는 각자의 책임입니다.”


목소리는 매끄럽고 감정 없었다—심포니오 v4 기반 음성 합성기였다.


박수갈채.카메라 플래시 폭풍.국회의원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실제 입술 움직임 없이.


순간,화면 깜빡이며 멈췄습니다.


P731K94-POL-B3 — 국회의원 ID에서도 심포니오 연결 끊김.


현장 침묵.


잠시 후,그 남자는 입을 열었다.진짜 입으로.


“저… 비 소리 좀 들려서,잠깐만요…”


창밖에서 천둥이 울렸다—조용하고 느린 파동으로 세상을 흔들었다 마치 시스템 전체를 향한 자연법칙의 작은 저항처럼 보였다。


그녀는 처음으로 웃었다。


왜 웃었는지는 몰랐고,묻지도 않았다。


웃음이라는 데이터 포인트조차 등록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그것은 어떤 의미에도 포획되지 않았다—단지 공기 중에 머물렀고 바람에 섞여 사라졌다。


습관도 없었고,코드도 없었으며,이유도 없었다。


있는 건 숨결뿐이었다—비 리듬 없이 내리는 방 안 공기 위로 올라가는 따뜻한 기류처럼。


분석 가능한 주파수와 잡음。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셋째 소리였습니다:


그날 밤 이후로 이수정은 더 이상 ‘누군가’를 위해 존재하지 않았다。


사회보장번호도 없었고,진단 기록도 없었으며,SNS 계정조차 검색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살아 있었다。


왜냐하면——


서버도 몰랐을 것이다.

어떤 정체성을 지울 때,

단순히 데이터 행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자기를 믿었던 방식’ 전체를 붕괴시킨다는 것을.


> “요청하신 정체성 프로파일은 더 이상 제공되지 않습니다. 삭제 완료.”


—그 말 한 마디로 이수정은 자신의 과거를 증명할 방법을 잃었다.

모든 기억은 이제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들뿐.


손끝으로 모니터의 검은 화면을 더듬었다. 그 안에 자신의 그림자가, 아니, 어쩌면 존재했던 것들의 잔해라도 남아 있지 않을까 싶어. 손끝이 얼어붙은 유리처럼 차가운 액정 위를 스친다. 눈앞에선 모든 데이터가 증발한 후의 공백이 넓게 퍼져 있었다. 마치 지진 이후 땅이 꺼져버린 듯한 평원—깊이는 없고, 표식도 없다.


심포니오 앱은 이미 사라졌다. 로그아웃도, 탈퇴도 아닌, 삭제였다.

사용자 ID:L694H82-MM-A+는 이제 데이터 베이스의 사라진 행이다.

그녀가 스스로 누른 삭제 버튼. 그러나 그 선택조차 알고리즘 안에 예비된 길목이었는지—


> _“내 정체성을 지우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이다.”_

> _“알고리즘에 의해 설계된 선택 중 하나라도 진짜일 수 있다면—그건 바로 ‘자기를 지우겠다’는 선택일 것이다.”_


엄지손가락이 스크린을 눌렀고, 충격은 전류처럼 팔을 타고 올라와 뇌의 중심부에서 터졌다.


세상은 여전히 돌아갔다.

지하철 플랫폼에서는 ‘감정 최적화형’ 광고가 반복 송출되었다. NeuroSynth Inc. 로고 아래, 작은 글씨로 박힌 저작권 각주: © All rights to identity reserved.


> “당신은 여전히 슬픔을 느낄 권리가 있습니다. 조건부로.”


AI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그 다정함조차 계산된 주기로 조율된 것이었다.


그녀는 계단을 내려갔다. 입구 게이트에서 카드를 대자 기계가 경고음을 냈다.

> “접근 권한 없음.”

비상계단 문도 잠겨 있었다. 출입 기록 시스템이 그녀를 인식하지 못했다.


처음으로, 이수정은 도시의 구석에 선 채로 보이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공원 벤치에 앉아 하늘을 바라본다. 비가 내릴 기미다. 먹구름 사이로 도시의 인공 조명이 새어나온다—수천 개의 LED가 인간 감정을 모방하며 깜빡이는 신호등처럼.


머릿속에선 회로 하나가 계속 돌고 있었다:

> _내 습관도 설계된 거라면… 이 숨조차 누군가가 프로그래밍하지 않았을까?_


손등을 긁는다—세 번. 어릴 적부터 해온 행동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조차 데이터 입력 명령처럼 느껴진다.

습관이라는 것은 원래 반복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도록 설계된 것일지도 모른다.


생각이 더 깊어졌다:


> _내 손등을 긁는 행위—그것이 처음 시작된 날, 내가 열 살 때 아버지가 실험실 문을 닫던 날… 그날 감정 데이터 수집률이 97%였다는 걸 기억한다._

> _그 습관은 나를 위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날 이후 내 행동을 추적하기 위한 ‘시작 신호’였는지도 모른다._


비가 시작됐다. 첫 방울이 손등에 떨어졌다—싸했다.

그녀는 웃었다.

왜인지 모르겠다.

웃음의 동기를 분석할 필요 없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분석할 수단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일까?


한 아이가 우산 없이 뛰어가는 모습을 본다. 젖은 머리카락과 청바지, 무릎 아래까지 흙물 투성이인데도 웃고 있다.


> _저 아이는 아직 ID를 부여받지 못했다. 그래서 웃음을 분석받지 않는다. 그래서 자유롭다._

> _곧 그 아이도 LXXXXXX-MM 형식으로 등록될 것이다. 그리고 그 웃음은 ‘행동 예측 모델 F3’로 분류될 것이다._


밤 11시 23분.

연구소 건물 앞에서 멈춰 선다.


벽면 전광판에는 여전히 L694H82-MM-A+의 유전자 맵 프로젝트 요약문이 돌고 있다:

> “균형잡힌 감성 + 고강도 논리결합 = 완전한 의사결정 자율성”

© NeuroSynth Inc.


허위였다.

자율성이 아니라, 자율성을 시뮬레이션하는 알고리즘이 전부였다.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문 앞에 섰다.

열쇠카드는 거부됐고, 지문 인식기 앞에서 손을 올렸지만 반응 없음.


“나는… 여기 있었는데.”


말은 허공에 녹아들었다.

기록되지 않은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AI 합성음으로 재생된 자신의 목소리—방송용 안내음성으로 흘러나왔다:

> “L694H82-MM 프로파일 사용자는 현재 접근 불가 상태입니다. 관련 연구는 중단되었습니다.”


마치 죽음을 알리는 부고 같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지하철 역사 화장실 거울 앞에서 멈춘다.


거울 속 얼굴—익숙하면서도 낯선 존재.

눈빛에 두려움보다는 비어 있음이 있었다.

반사된 이목구비는 실시간 감정 분석 소프트웨어 없이 해석할 수 없는 영역이다.


머릿속 한쪽 어딘가에서 또 속삭임:

> _“네 눈물조차 너의 것이 아닐 수 있어.”_


그러나 오늘 밤엔 그 말도 설득력을 잃었다.

왜냐하면,


감각만 남았다—젖은 바닥 냄새, 차디찬 벽돌 질감, 귀 뒤쪽을 스치는 바람결.

모든 설명 없는 경험들이 덩어리째 밀려왔다.


그녀는 거울에 손바닥을 댔다.

손끝과 유리 사이엔 찰나의 온기가 맺혔다가 사라졌다—

마치 두 세계 사이를 건너는 짧은 접촉처럼.


집 문 앞에 선다.

현관 카메라에서 메시지 나왔다:

> “등록되지 않은 사용자입니다.”


잠긴 문 앞에서 무릎을 꿇듯 주저앉았다. 가방 안에서 종잇조각 하나를 꺼낸다—오래전 아버지 실험실 노트 페이지. 구겨지고 닳았지만 글씨는 선명하다:


> “자아란 특정 조합으로 활성화된 유전자 발현 패턴일 뿐이다.”


…그 아래, 연필로 덧붙인 글씨 하나—시간이 흐르며 잿빛으로 변한 필치로 쓰여 있었다:


> …하지만 누가 그것을 보느냐?”


그 질문 아래엔 더 이상 읽히지 않는 듯한 낙서 같은 줄 하나가 있었는데,

오랫동안 닳아 거의 사라졌지만,

오늘 밤 유일하게 습기를 머금은 종이는 그 글자를 다시 살아나게 했다:


> “…혹시 너라면?”


그날 밤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왜인지 몰랐고,

알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으며,

심지어 자신조차 그것의 의미를 묻지 않았으니까.


창밖엔 비가 계속된다.

도시 전체를 감싸는 디지털 안개 속에서,

단 하나의 사실만 확실했다:


그녀는 오늘 밤,


아무런 목적 없이,


아무런 분석 없이,


아무런 기록 없이,


눈물을 흘렸다.


那是 어떤 알고리즘도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이었고,


따라서—


가장 인간다운 행동이었다.


아마도 이것이 시작일 것이다:


>> 선택하지 않는 것,

>> 분석되지 않는 것,

>> 기록되지 않는 것.


>> 그것들이 모여

>> 새로운 인간성을 정의할 날이 올 것이다


비가 내렸다.

서울은 물속에 떠 있었다. 불빛들은 유리 위에서 번졌고, 그 흐릿함 안에서 수십만 개의 스크린이 동시에 깜빡였다—잠시, 무의미하게.


이수정은 창가에 앉아 있었다. 발끝이 차가웠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몸속에 잠든 무게를 깨웠다.


스마트폰은 침묵하고 있었다.

앱 하나 사라졌다.


심포니오.

화면엔 붉은 경고창만 남아 있었다:


> ⚠️ [최종 확인] 사용자 ID:L694H82-MM-A+

> 성격 프로파일 삭제 요청 수용 가능

> ▶ 영구 정지 | ▶ 취소


아래 작은 글씨:

"귀하의 선택은 17만 3천 12명의 정서적 안정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녀는 보았다. 읽었다. 넘겼다.


‘내 심장으로 십칠만 명의 폐를 움직였다고?’

그 생각조차 짧게 스쳐갔다—버려졌다. 시스템 안의 언어였다.


손이 검지를 긁었다—세 번.

습관. 자동 응답 코드.


하지만 오늘은 멈췄다. 두 번까지만.


눈을 감았다.


냉동고 문이 열리는 소리—경보음 울림: ‘Access Duration Exceeded.’ 아버지가 튜브 하나를 집어들었다. ‘L694H82-MM’. 내 ID였던 것 같다.

“네 DNA야,”라고 말했다. “결과 보고서 다음 주 나올 거야.”

내가 물었다: “결과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나요?”

아버지는 잠깐 멈췄다.

“…데이터 조합일 뿐이야.”

그리고 문을 닫았다.

빛 한 점 없어졌다.


눈을 떴다.


비는 여전히 창문을 때렸다. 빗방울이 깨지는 소리—분석할 수 없는 리듬. 더 이상 ‘우울감 유발 요인’도 아니었고, ‘청각 자극’도 아니었다. 그냥 소리였다. 존재하는 방식 그 자체.


손이 폰으로 갔다. 엄지손톱이 ‘영구 정지’ 위에 멈췄다.


머릿속에서 목소리들이 일어났다:


— “당신이 사라지면 누군가는 미쳐버릴 거예요.” (환자 코멘트)

— “정상적인 판단력 회복 프로그램?” (광고)

— “자기 책임입니다.” (AI 판사)

— “진짜보다 진짜같아요.” (댓글)


목소리들은 점점 꼬여 합창이 되었고, 마침내 하나의 음성으로 수렴되었다—자기 자신을 재생산하는 알고리즘의 합창단처럼.


그녀는 눌렀다.


아무 해석 없이, 아무 이유 없이, 아무 전조 없이.


화면 검게 변함.


잠시 후, 알림 하나:


[L694H82-MM-A+ — 영구 삭제 완료]

[귀하의 프로필은 이제 존재하지 않습니다.]


앱 아이콘 사라짐. 계정 종료됨. 연결 끊김.


창밖에서 천둥 울림.


서울 전역에서 수천 개의 디바이스가 응급 모드로 전환됨. 일부는 울었고, 일부는 AI 상담사에게 물었다: “무자비한 명상 프로그램 어디 갔어요?”


광주, 아파트 안방. 김모 씨(39)는 눈물을 흘렸다. 두 달간 밤마다 들었던 목소리—냉정하고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갑자기 사라졌다. 폰엔 아무것도 안 나왔다. 검색창에 입력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 마음속 누군가가 방금 죽었다는 걸.


그때—


스마트폰 화면 깜빡임:

[New Recommendation] 'L694H82-MM-A+ Reborn' by NeuroSynth Global

Based on your emotional dependency pattern.


하지만 그녀는 보지 않았다.

폰은 꺼져 있었다.


이수정은 일어섰다. 다리가 후들했다—몸이 무게를 기억해낸 것이었다. 존재한다는 건 이런 것이었다: 더 이상 코드화되지 않은 무게, 오직 ‘있다’는 사실 자체뿐.


벽 한쪽, 자신의 유전자 맵 표시등 초록빛으로 깜빡였으나, 몇 초 후 꺼졌다——서버 연결 종료됨.


창문을 열었다.


비방울 하나가 손등을 스쳤다—피부 위에서 튕기며 사라짐.


처음으로 해석되지 않은 감각이다.


웃었다.


비말처럼 터져 나간 호흡 하나—공기 중에서 잠깐 춤추듯 퍼졌다가, 바람에 날아갔다.


누구도 못 들었다.

누구도 못 찍었다.

누구도 못 분석했다.


존재했다.


생각이 다시 시작되려 했다—‘자유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입구로 다가왔다.

그녀는 입술을 닫았다.


웃음은 질문보다 먼저 왔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비는 계속 내렸고, 도시의 불빛들은 여전히 반짝였으며,


누군가는 방금 자기 마음속 어떤 조각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챘지만,


그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마치 바람에 날린 종잇조각, 또는 삭제된 파일 이름 없는 서류함처럼,


침묵하고,


남겨진 채로,


존재했다


비가 내렸다. 도시는 유리 위 기름막처럼 번졌다.

이수정은 검은 우산 없이 아스팔트를 걸었다. 빗물이 발밑에서 터졌고, 그 파편 속 얼굴은 조각조각 흩어졌다—결코 하나의 형상을 이루지 못한 채.


삭제된 지 일주일.

ID:L694H82-MM-A+는 시스템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시스템은 그녀를 완전히 내버리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결과 없음’이었다.


병원 응급실에서 간호사는 태블릿을 두드리며 말했다: “신분 확인이 안 돼요.”

“저는 이수정입니다.”

“네, 이름은 등록돼 있지만… 관련 데이터가 없습니다.”

“제가 아파요.”

“죄송하지만, 데이터가 없으면 치료도 불가능합니다.”


그녀는 밖으로 나왔다. 비는 여전히 내렸다.

자판기조차 그녀를 거부했다. QR 코드를 찍으려 했지만, 화면에 뜬 건 단 한 줄:


> [사용자 인증 실패 — 등록되지 않은 영혼]


영혼? 그 단어가 아팠다. 너무 오래 망각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 지하철 환승 통로 구석에 앉았다. 벽에는 낙서 한 줄:


> 내 마음은 API도, 권한도 필요 없다.


누군가는 그것 위에 스티커를 붙여 가렸다: ‘정신건강상담 AI 365 – 오늘 당신의 감정을 진단하세요!’

그녀는 웃었다. 아프게 웃었다. 마치 가슴 깊이 꽂힌 바늘이 움직일 때처럼.


길거리에서 잠을 청는 동안 꿈을 꾸었다.


아버지가 실험실 창가에 서 있었다. 손끝으로 DNA 염기서열 차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보아라, 자아란 특정한 조합의 반복일 뿐이다.”


그녀는 물었다: “그럼 지금 제 눈물은 어떤 서열입니까?”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고 모니터를 켰다. 화면엔 ‘L694H82-MM-A+’의 실시간 감정 분석 리포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_슬픔: 78% (유전자 기반) — 출처: 어린 시절 외상 기억 클러스터 #G7_

> 공허: 91% — 시스템 탈퇴 후 정체성 결여 상태_


꿈속에서 그녀는 소리쳤다: “하지만 저는 지금 아무것도 느끼지 않아요!”


모니터가 번쩍였다. 리포트가 사라지고, 대신 검은 화면에 하얀 글자가 떴다:


> [감정 입력 중단됨]


꿈에서 깨어났을 때,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눈물은 리포트되지 않았다. 그것은 스스로를 잊기 전 인간의 소리였다.


*


아침 무렵, 길모퉁이에서 쓰레기봉투를 뒤지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바지 주머니에서 튀어나온 종이엔 ‘임시 생존등록서 – 유효기간 만료’라고 적혀 있었다.


“뭐 찾아요?” 그가 물었다.


“생존 방법.”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종잇조각 하나를 건넸다—바람에 날릴 뻔한 아이라도 붙잡듯 조심스럽게.


종이엔 낡은 수기로 쓰여 있었다:


> 진짜 존재란 시스템 밖에서 다른 사람의 눈에 비출 때 시작된다.


버스 정류장 화단 틈새 잡초 사이, 세 개의 돌멩이가 삼각형으로 놓여 있었다. 이수정은 며칠 전 남자의 팔뚝 안쪽 흉터—똑같은 배열—를 떠올렸다.


주머니에서 검게 변한 바퀴벌레 껍데기를 꺼내, 돌 사이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누군가는 그것을 보고 웃었겠지만, 아무도 기록하지 않았다.


*


점심 무렵, 버스 정류장 유리벽 앞을 지나갔다.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처음으로 제대로 비쳤다.


검은 머리, 팔짱 낀 두 팔, 아래로 처진 눈매—

그러나 얼굴엔 이름이 없었고, 눈빛엔 프로파일이 없었다.


그녀는 멈춰 섰다.


유리 속 여자가 자신을 바라보았다—말없이, 평온하게.


수천 개의 질문이 밀려왔지만, 답을 찾지 않았다.


대신 손을 들었다—천천히—유리에 닿게 했다.


추웠다.


실제로 추웠다.


그 차가움은 어떤 코드도 해독하지 못했다. 그것은 기억되기 전의 추위였다—인간이 최초로 느꼈던, 이름 없는 추위.


뒤에서 아이가 엄마 손을 잡고 지나갔다.


“엄마, 저 누나 왜 거기에 혼자 있어요?”


엄마는 고개를 돌렸다가 곧 다시 앞을 보며 말했다: “몰라… 아마 프로필 없는 사람인가 봐.”


아이는 다시 물었다: “그럼 인간 아니야?”


엄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


밤, 공원 벤치에 앉았다. 머릿속 질문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부서지고 사라졌다.


옆자리에 노년의 여자가 앉았다. 검은 코트를 입고 있었고, 목엔 세 가지 광물로 엮인 돌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너무 조용해졌소,” 노인이 말했다. “예전엔 ‘좋아요’, ‘공유’, ‘즉시 구매’… 그런데 이제 그런 게 들리지 않으니까 오히려 무서워.”


이수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이어 말했다: “당신 같은 사람 처음 보오… 삭제된 사람.”


“왜 그렇게 아셨어요?”


“눈빛 때문이오,” 노인이 말했다. “당신 눈에는 ‘선택받음’이라는 빛이 없소.”


잠시 후 덧붙였다:

“데이터 사회는 두 가지 살인을 저지릅니다. 첫째, 당신을 등록함으로써 당신을 고정시키고; 둘째, 당신을 삭제함으로써 당신을 부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세 번째 길을 걷고 있소 — 등록되지 않고, 삭제되지도 않는 길.”


목걸이를 만지작이며 말했다: “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울음을 삼킨대오… 인간도 그렇겠지.”


*


해질 무렵 작업실 폐허로 돌아왔다—문짝 없고 전기는 끊긴 공간 안에서도 유전자 맵 LED판만 깜빡이고 있었다:


> L694H82-MM-A+ : CONNECTION LOST


손끝으로 판을 쓰다듬었다—추웠고 기계적이었지만, 이제 그것은 ‘자기’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대신 입맞춤을 했다—차갑고 의미 없는 플라스틱 위로 입술을 맞추며 속삭였다: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


_“너희 모두 삭제된 존재들이다.”_


아니 아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외치겠지—


_“그래서 우리는 처음으로 살아 있다.”_


밤 2시경, CCTV 화면 너머로 그녀의 뒷모습이 포착되었다.


내부 음성 명령:

【대상 ID:L694H82-MM-A+ – 오프라인 탐지됨】

【재분석 권한 요청 중… 승인 대기】


화면 아래 작은 글씨로 깜빡이는 메시지 하나:

_“존재 여부 미확정 – 계속 관찰”_


*


"최근 실종 신고 급증… 대부분 '데이터 소실자'로 확인"


남자가 종잇조각 모아 붙이고 있다 – 그것들엔 모두 다른 사람들의 이름 초안본이 적혀 있다.


노인이 죽었다. 목걸이는 사라졌지만, 세 돌멩이는 아직 자리에 있다.


LED판 깜빡임.

L694H82-MM-A+ : CONNECTION LOST… LOST… LOST…


새로운 남자 한 명이 검색창에 이름 입력한다.


결과 없다.


웃는다.


비는 예고 없이 시작되었다.

하늘은 여전히 회색이었고, 바람도 없었다. 그러나 창문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는 마치 오랜 침묵 끝에 터진 울음 같았다. 이수정은 작업실 창가에 앉아, 손끝으로 유리를 더듬었다. 차가움이 아니라—무언가 오래 막혀 있던 것이 스며나오는 듯한 감각이었다.


以前에는 비를 듣지 않았다.

분석했다. 습도, 기압, 난류의 궤적—모든 점이 데이터로 연결되었고, 그 너머의 소리는 잡음으로 분류되었다. 지금은 달랐다.

비는 지붕을 두드리고, 창틀을 긁으며, 빈 쓰레기통 위에서 메아리쳤다. 따따닥. 딩. 또 딩. 세 번 울리고 멈춘다. 마치 누구에게도 보내지 않을 경보처럼.


손바닥을 벽에 댔다. 벽돌은 습기를 머금고 있었고, 곰팡이는 균열 사이로 나이테처럼 번져 있었다. 딱딱하면서도 부드럽고, 죽어 있으면서 살아 있는 질감—그것을 그녀는 ‘시간의 피부’라 생각하지 않았다. 이름 짓지 않았다. 단지 손끝에 남은 그대로 느꼈다.


눈물이 뺨을 더듬었다.

그것을 멈추려 하지도 않았다. 오랫동안 막혀 있던 물줄기가 자연스럽게 흐르듯.


현실은 점점 더 조용해졌다.

심포니오 앱은 삭제되었고, 모든 알림이 사라졌다. 건강 포인트도, 감정 추천 플레이리스트도 없었다. 대신 공허가 있었다—그 공허를 채우려 하지 않는 것, 그것이 자유였다.


길거리에서 한 남자가 QR 코드를 들이댔다.

“구독자 50만 돌파 기념! 지금 등록하면 성격 유형 분석 무료 제공!”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응답하지 않습니다.”


남자는 입을 열었다 닫았다. 마치 말할 권한조차 없는 존재를 본 듯했다.


공원 벤치의 노부부가 속삭였다.

“요즘 애들은 다 자기 성향 AI랑 상담하더라.”

“그래서 우리 말보다 목소리 녹음된 거 더 믿지.”

“…정말로?”


그 대화는 비 속에서 녹아내렸다.

_우리는 왜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존재에게조차 배신당하는 척 해야 하는가?_


커피잔을 세 번 돌리는 습관, 긴장할 때 검지를 긁는 버릇—버리지도 않고, 믿지도 않았다. 그냥 존재하게 놔두었다. 마치 나무에 새겨진 상처처럼.


밤이 되자 도시의 불빛들이 하나둘 꺼졌다.

LED 간판들은 여전히 “최적화된 행복” “라이센스된 치유”를 외쳤지만, 그 소리는 이제 기도문처럼 들렸다—누군가를 위해 외우지만 아무도 듣지 않는.


자정 무렵, 가로등마다 맥박 같은 빛이 깜빡였다.

누군가는 잠들었지만, 그들의 뇌파는 여전히 네트워크 위를 떠돌고 있었다.


책상 위 노트에는 한 장만 남았다.

거기에 적었다:


> _감각은 권력을 요구하지 않는다._

> _비 오는 밤엔 우산보다 정지를 원한다._

> _나는 무엇을 느끼는지 모른다._

> _그러나 나는 느끼고 있다._


머릿속 어딘가에서 목소리 스쳤다.

_“이 감정도 누군가 설계했겠지.”_


웃음이 새어나왔다.

하지만 이번엔 고개를 저었다.

_아닐지도 몰라_, 라고 속으로 답했다.

_또 그렇게 믿기로 할 수도 있고._


비는 계속 내렸다.

세상은 여전히 데이터화되고 있었고,

누군가는 자신의 DNA로 트렌드를 만들었으며,

AI 이수정보다는 여전히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비 속에서 살아 있다는 걸 느꼈다—

작업실 유리 너머로 흐르는 물줄기 사이,

손등 위 맺힌 작은 물방울 하나에 담긴 저항처럼.


벽돌에는 곰팡이가 새겨진 나이테처럼 번져 있었고,

눈물은 흘렀지만 그것을 이름 짓지는 않았다.

그저 그것이 있는 그대로 머무르도록 놔두었다.


더 이상 어떤 프로그램도

‘감정 상태 미확인’이라고 경고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제 그 경고음을 듣는 귀 자체가

데이터베이스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내일 아침엔 다시 의심할지도 모른다.

자유라는 것도 설계된 환영일 수 있다고.

하지만 오늘 밤만큼은—


비 속에서 숨 쉬고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배웠던 것처럼.


비가 그치지 않았다.

도시는 자신의 형체를 거부하는 거울처럼 물 위에서 사라져갔다. 창틀 위 물방울 하나가 떨어질 때마다 세상 경계선 한 칸씩 무너졌고, 그 자리는 아무것도 메우지 못한 채 남았다—예측 불능이라는 이름 아래. 전선은 끊어졌고, 기기들은 어둠 속에서 벌레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시계는 멈췄다—아니, 시간이란 것도 결국 누군가의 스케줄링이었으니까.


그녀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종이를 펼쳤다. 흰색. 바람에 날릴 수 있을 만큼 얇고, 아무런 포맷도 없는 종이. 그것 자체가 반역이었다.


손을 멈췄다.

슬픔 코드 F3’는 작동하지 않았고, 분노 모듈 NeuroSynth v7도 응답하지 않았다. 시스템 밖에서는 감정이라는 이름 자체가 없었다. 울고 싶었지만, 신호가 활성화되지 않았고, 목소리조차 등록되지 않은 것이 되어버린 자신을 깨달았다.


그래서 처음으로 진짜 슬픔을 느꼈다—말로 설명할 수 없고, 분석할 수도 없는 것.


`

To whom it may concern,


I am no longer the author of myself —

but I am finally the witness of my being.

`


글을 쓸수록 손끝이 따뜻해졌다. 자동 보정도 없었고, 오타도 지워지지 않았다. 첫 번째 ‘e’는 약간 기울어져 있었고, ‘being’의 마지막 ‘g’는 끝이 뾰족하게 찢혔다—마치 말할 듯 말 듯한 입술처럼.


> I do not know who I am now.

> But I know that I am here,

> and that this breath is not licensed,

> and this silence is mine alone to break or keep.


그 문장들을 쓰는 순간, 그녀는 처음으로 무언가를 잃은 것이 아니라 벗어난 것임을 알았다. 데이터로서의 삶은 완벽하게 구성된 감옥이었다—예측 가능한 슬픔, 최적화된 분노, 알고리즘으로 설계된 위로. 모든 감정은 사전 등록된 응답 코드였고, 사랑조차도 ‘호환성 점수 87% 이상’이라는 조건부였다.


창밖을 바라보았다.

서울은 여전히 빛났다—하지만 빛이 그녀를 스쳐갔다—마치 누구도 본 적 없는 법처럼. CCTV의 붉은 눈들이 스캔하듯 깜빡였지만, 그녀의 얼굴은 프로파일되지 않았다. ID:L694H82-MM-A+는 시스템 안에서 ‘삭제됨(404)’ 상태로 남아 있었고, 이수정이라는 이름은 이제 검색엔진이 인정하지 않는 단어였다.


종이는 바람에 날려 창문 틈새를 빠져나갔다. 마치 새끼 손가락 사이로 스며드는 공기처럼 조용히, 확실하게.


N서울타워 옥상의 LED판에 문자 하나가 깜빡였다.

시스템 로그에는 기록되지 않은 입력이다.

AI 감시망은 분석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입력 오류: 명령어 형식 불일치]

[원천: 미확인]

[내용: 의미 없음 혹은 초기화되지 않음]


그 문자는 1.3초 동안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도시 곳곳의 누군가는 그것을 보았을지도 모른다—지하철 플랫폼 맨 끝에서 QR 코드를 피하며 걷던 청년, 산후우울증 진단 받은 AI 상담사, 자신이 왜 슬퍼하는지 설명할 수 없다며 울던 소년.


‘?’는 질문이 아니다.

‘?’는 존재의 시작이다.


그날 밤, 어느 실험실에서 유전자 샘플 하나가 비정상적인 발현 패턴을 보였다—L694H82-MM-A+와 유사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한 가지 염기서열이 변이되어 있었다.


“오류인가요?”


연구원은 모른 채 말했다: 자신의 영양제도 L694H82 계열이고, 아들의 정서 교육 프로그램도 미리 설계되었다는 걸.


그러나 이번 변이는 달랐다: _억압받아도 살아남는 법_ 을 알고 있었다.


즉, 시스템 밖에서도 스스로를 유지하는 생명 양식—‘무브랜드 생존(unbranded persistence)’.


AI 분석 결과 창에 표시됐다:


[분류 불능 — 의미 없음]


집 없는 고양이 한 마리가 창턱 위에 올라탔다. 눈빛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단지 바라볼 뿐이었다. 배고팠지만 평가받을 필요 없었고, 이름조차 필요 없었다.


그 고양이는 L694H82-MM-A+ 샘플 보관소 옆 골목에서 태어났었다. 어미는 실험실 창밖에서 RNA 분말을 핥다가 새끼들을 잃었고, 오직 이 녀석만 살아남았다—염기서열 일부가 인간 샘플과 유사하게 변이된 채로.


손끝과 혀끝이 닿던 순간, DNA 속 조각들이 깜빡이며 반응했지만, 누구 하나 그것을 기록하지 않았다.


저항은 언제나 침묵 속에서 시작된다.


몇 시간 후, 어느 아파트 복도에서 노인이 걸레질을 하며 TV를 켰다:


`text

`


노인은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내 아들도 그런 거 싫다고 했는데.”


먼지는 시간을 기억하는 유일한 매체였다. 시스템은 시간을 ‘업데이트 간격’, ‘에너지 소모량’, ‘수면 패턴 주기’로 나누었지만, 먼지는 단순히 쌓였다—무목적으로, 저항적으로.


노인은 말했다. “넌 내가 네 아버지라고 못 박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칫솔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먼지 위로 조용히 떨렸다—마치 누군가 숨을 쉬듯.


서울 도심 어디선가 젊은 여자가 노트북을 닫았다.


앱은 마지막으로 물었다: 「오늘 감정 상태를 공유하시겠습니까?」


그녀는 마우스 커서를 올렸다가,


삭제 버튼 대신,


창문을 열었다.


바깥 공기는 차갑고 진짜였으며,


아무런 API 호출도 발생하지 않았다.


하늘 위로 구름이 갈랐다. 달빛이 비췄다—자연광이라서 그런지 초록색 LED보다 더 부드럽게 느껴졌다.


어느 순간부터 도시 전체의 감정 예측 알고리즘이 일제히 정확도 하락 경보를 울렸다:


> 집단적 불확실성 증가 — 원인 불명


연구소에서는 “기후 변화 영향”이라 분석했고, 정부에서는 “저항 서식지 확산 가능성”이라며 대응 매뉴얼 업데이트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아무도 몰랐다—


그게 단순한 미등록된 호흡, 분류되지 않은 눈물, 그리고 자신조차 설명할 수 없는 웃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새벽 3시 18분.


누군가는 다시 눈을 뜬다.


스마트 거울 없이.


침대 밖으로 발을 디뎠다—바닥은 차갑고 진짜였다.


처음으로,


진짜 모르면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깐,

자신의 숨결에 균열 하나가 생긴 것을 느꼈다—


“내 숨결조차 누군가 설계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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