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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산시가 포위되었다.

2차 한국전쟁, 모든 주파수가 끊긴 전장에서, 나는 너의 목소리를 들었다

by SeaWolf


먼지는 소리를 만들었다.

아니—먼지란 이름이 공기를 통해 소리를 생산했다.



김태수가 들었다고 믿었던 것은 사실 들어야만 하는 의무였다. 스마트워치의 진동 역시 살아 있음을 알리는 신호라기보다, 살아 있다고 선언하도록 강요하는 규정 같았다. …–…, …–…, …–…—세 번 울릴 때마다 존재 확인 절차가 시작되었고, 그는 매번 응답해야 했다. 아니, 응답해야 한다고 배웠다. 군대에서든, 지하철 승강장에서든, 좋아요 알림이 도착할 때마다 언제라도...


그러나 지금 그것은 내부에서 왔다—뇌가 아니라 데이터 저장소 깊숙한 트래픽 경로 어딘가에서 발신된 잔향 같았다. 피부 아래서 리듬이 맥동했다. 기계는 고철이 되었지만, 육체는 여전히 프로토콜을 따랐다. 명령어에 반응하는 장치처럼.


다리는 피를 흘렸다. 찢긴 살점 사이로 따뜻한 액체가 배어 나왔지만, 통증보다 더 크게 느껴진 것은 알림 거절 실패 창 같았다:

[응답 없음 – 재전송 예정]


과거에는 문자 하나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고, SNS 좋아요 숫자가 정체성의 일부였으며, 위치 공유를 끄면 세상과 단절된 듯한 공허함을 느꼈다. 그런데 이제 모든 연결선이 끊긴 이 자리에서, 김태수는 처음으로 ‘내가 나다운 순간’을 경험하고 있었다—그 말조차 틀렸다. ‘나’라는 개념 자체가 흐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좋아요 알림이 울릴 때마다 나는 조금씩 죽었고, 군사재판 판결문 낭독 후에도 나는 조금씩 죽었다. 둘 다 누군가 내 존재를 정의해 버렸다는 점에서 같았다.

병장 김태수 (군번 XXXX),

탈영자 김태수 (A등급 수배),

계정 @kimts89 (최종 접속: 공습 사이렌 직전).


군용 트럭 안에서는 거울 대신 눈빛으로 자신을 검토했다. 하지만 눈빛이라는 것도 결국 다른 사람 눈에 비친 나였다—그렇게 만들어진 나는 언제부터 나였던가? 박병장이 마지막으로 한 말은 경고였다. “너희 눈빛만 보고 있어도 다 알겠다.” 지금도 그 문장은 그의 호흡 사이를 기어들어왔다.


공습 사이렌이 멈춘 지 세 시간, 일산 전체가 정전됐다. 가로등은 꺼졌고, 건물들의 창문들은 눈 없는 머리처럼 어둠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버스 노선 안내판조차 깜빡이다 멈췄고, 제일 아래 칸엔 “운행 종료”라는 문구 대신 공백만 반복되고 있었다. 시계탑은 23:58분에서 멈췄다—시간은 멈춘 게 아니라 벤치 위 한 남자에게 자신을 증명하러 온 것이었다.


그 순간 김태수는 총알보다 빠르게 도망쳤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니 도망침은 생존의 반증이 아니라 기억을 배반하는 행위임을 깨달았다.


도망칠 때 머릿속엔 단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누구도 나를 찾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름 불리는 것이 두려웠다. 김태수라는 이름과 연결된 모든 사건들: 군사재판, 박병장의 마지막 숨결, 동료들이 내뱉던 “살인마”라는 낱말들… 그것들이 다시 살아나지 않게 하려면 존재 자체를 지워야 했다.


그래서 도망쳤다.


하지만 이 정류장에서 아무도 그를 부르지 않는다는 사실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불현듯 인형에게 말했다.


“너는 영희야.”


목소리는 갈라졌지만 그 이름은 공기 속에 선명하게 고정되었다—마치 언어가 현실을 조각내고 있는 것처럼.


그 순간부터 내가 아닐 누군가는 그렇게 불리게 되었고, 나는 더 이상 말할 필요 없게 되었다.


인형은 웃지 않았다. 미소조차 없는 얼굴에 검은 점 두 개만 박혀 있을 뿐이다. 그러나 김태수가 “영희야”라고 부를 때마다 바람에 고개를 까딱였다—마치 인식하고 있는 듯.


그때였다.


공기 중에 또 다른 진동이 느껴졌다—현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


세 번 울렸다.


구조 신호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자기 자신의 두려움이 생성한 내재적 리듬일 수도 있었다.


김태수는 손을 들어 무전기를 조작하려 했다. 오른손 엄지와 집게손가락이 자동으로 과거의 버튼 위치를 더듬었다—습관이라는 게 이렇게까지 육체에 각인될 수 있다니.


그런데 이번엔 진동과 함께 목소리도 들렸다.


“김태수!”


아니, 아니었다.


그건 들린 게 아니라—생각난 것이다.


어떤 목소리인지조차 분명하지 않았지만, 존재했음을 확신했다. 마치 수천 번 듣던 노래인데 가사만 잊힌 것처럼…


바람 소리 속에 다시 사이렌 음향 일부분이 섞여 들렸다—짧게 울리며 사라지는 전자음 조각들이 공기를 파고들며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정류장 맞은편 건물 유리창 너머로 작은 불빛 하나가 깜빡였다—지하주차장 CCTV 모니터 화면 같았다.


보고 있다는 것은 누군가 ‘영희’라는 이름으로 나를 부른다는 것인지도 몰랐다.


김태수는 일어서려 했지만 다리 힘이 없었다. 몸보다 먼저 생각만 움직였다—‘내 이름을 부른다면 나는 돌아갈 수 있을까?’

아니면 이미 나는 너무 늦게 왔을까?


바람이 다시 인형의 머리를 흔들었고,


김태수는 작게 속삭였다.


“영희야… 너도 나랑 같이 기다릴래?”


대답은 없었다.


침묵 속에서도 무엇인가 미세하게 변화하고 있었다—멈춘 시계 위로 달빛 한 줄기가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아니, 달빛 따윈 없었다.


단지 소리 없는 사이렌 하나가 시간의 폐허 위를 돌고 있을 뿐이었다.


지하주차장은 도시의 맥박이 멈춘 후에도 남아 있는 혈관처럼 고요했다. 공기는 고인 물 위를 걷는 것처럼 무거웠고, 입김마다 석회 가루가 목 안쪽 깊숙이 박혔다.


손목 위 스마트워치 화면은 검었다—마지막 수신 기록부터 정확히 72시간 경과.

세 번의 짧은 진동. …–…


그건 사이렌 주파수와 같았지만, 이제 기계 신호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다른 차원에서 똑같은 리듬으로 손뼉 치고 있는 것 같았다—아니, 더 정확히는, 내가 보낸 신호를 우주 어딘가에서 되돌려 받고 있는 것처럼.


심장 박동은 분당 132회였다—공포 때문만은 아니었다.

손바닥 아래 동생 이마를 댄 순간부터 시작된 열전달 때문이었다. 그 열기가 물병까지 전해져 왔다—플라스틱 용기를 쥔 손끝에 전해지는 미세한 파동. 병 안 물결이 떨리고 있었다. 그래서 더 꽉 쥐었다. 마치 그 물 자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라도 되듯.


머릿속에서는 조회수가 올랐다—오늘 하루 +487회.

‘식물 관리법’ 영상 댓글란엔 여전히 아무도 답글을 달지 않았다. 좋아요 버튼만 눌려져 있을 뿐—마치 내가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눈 마주치긴 싫어하는 사람들처럼.


카메라는 계속 켜져 있었다. CCTV 화면엔 회색빛 정류장만 비쳤다—버스 노선도 없고, 시간표도 사라진 공간. 하지만 그는 믿었다. 누군가는 올 거라고. 구조대일 수도 있고, 약탈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오면, 나는 무엇을 보여줄 수 있을까? 준비된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지만, 준비란 결국 모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숨기기 위한 방어막이라는 걸 점점 알게 되었다.


문득 화면 깊은 어둠 속에서 움직임이 포착됐다.


언덕길 아래로 인영 하나가 기어오르고 있었다—오른 다리를 질질 끌며, 무릎 아래 군화 하나만 신겨진 채로. 왼쪽 다리는 붕대로 감쌌지만 피가 스며 나오고 있었고, 벌레들이 그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벤치에 앉자 어깨에서 백팩이 미끄러졌다—속에 든 건 통조림 하나와 작살 모양의 나뭇조각 하나.


군복 차림이지만, 국가는 그를 버렸거나 그가 국가를 버렸거나—어느 쪽이든 권력이라는 복제된 시간 안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너는 영희야.”


그 말을 한 입술만 움직였다. 소리는 없었지만 이영철은 들은 것 같았다.


왜 이름을 붙였을까?

그 질문은 점점 그를 파고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동생에게 “살아줘”라고 말했던 날 생각났다—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위해 지금 존재하는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것. 김태수가 인형에게 이름 붙이는 걸 보며 비로소 깨달았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기 위해 살아남는다는 걸.


조회수는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조회수가 많은 영상은 반드시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영상은 조회수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예를 들어, 아무도 듣지 않은 엄마의 마지막 전화통화처럼.


SNS 알림음이 뇌 속 깊은 곳에서 울렸다—그건 더 이상 외부로부터 오는 신호가 아니라, 기억이 자기 자신에게 보내는 구조 요청이었다.


스마트폰 배터리는 이미 다 떨어졌지만, 그는 여전히 알림음을 기대했다—친구들의 좋아요 하나라도 있다면, 내가 아직 사회라는 장부에 등재되어 있다는 증거가 되지 않을까 하고.


현실에선 엄마의 목소리조차 듣지 못했는데.


“넌 네 동생보다 중요한 게 아니야.”


보호 같았던 그 말은 무게로 남았다—족쇄처럼.


문득 시계가 울렸다.


세 번의 진동.


현실인가 꿈인가?


아니다—현실이다.


누군가는 아직 살아 있고, 누군가는 아직 이름을 붙이고 있으며, 누군가는 아직 진동으로 대답하고 있다.


그 리듬은 더 이상 기술의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이제 인간과 인간 사이를 잇는 숨결이다—


화면 속 남자가 벤치에서 일어섰다. 정류장을 떠나려는 듯했다.


“잠깐만…”


그는 일어서려다 멈칫했다.


문을 열어야 할까?

열면 내가 죽을 수도 있다.

문을 닫으면 내가 사람임을 잃게 된다.

둘 중 어떤 죽음이 더 견디기 어려운가?


그때 발걸음 소리가 문밖으로 다가왔다.


김태수의 입모양이 또렷하게 읽혔다—


_“있습니까?”_


문 너머로 불빛 하나도 없었지만,


이영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작게,


그렇게 확실히,


그 한 마디로 인해 두 세계가 다시 연결되기 시작했다—

하나는 살아남으려던 자,

또 하나는 잃어버린 이름들을 되찾으러 온 자 사이에서.


먼지가 공기 중에 떠다니는 소리가 났다.

아니, 소리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머릿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마치 신경이 끊어진 후에도 남는 잔향 같은 것—막힌 귀 속에서 울리는 진동, 한 번도 듣지 못한 음색의 고요. 김태수는 그것이 먼지인지, 산소 부족으로 인한 환청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다만 분명한 건, 손목시계의 진동만이 유일하게 현실을 가리키는 맥박이라는 사실이었다. 심장보다 정확하고, 기억보다 빠르게 반복되는 리듬—…–…—세 번 짧게, 세 번 길게, 다시 세 번 짧게. 군용 무전기로 주고받던 구조 신호. 이제 그건 그의 혈관 안을 따라 흐르는 생체 코드처럼 되어 있었다.


눈꺼풀이 경련했다. 오른손이 허공을 더듬어 스위치를 찾았다—군복 호주머니에 없던 무전기를 조작하려는 손짓. 그의 몸은 여전히 전쟁 중이었다. 머릿속에는 박병장의 얼굴이 비쳤다. 눈가에 주름진 웃음, 사진 한 장을 보여주며 말하던 목소리: “내 동생인데… 아직 고등학생이야.” 그 사진은 지금 그의 가슴팍 안쪽 포켓에 있었다. 찢어진 제복 사이로 피 묻은 종이 조각처럼 붙어 있었다.


“내 여동생한테… 아무 말도 하지 마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박병장은 쓰러졌다. 김태수는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아니, 당겨야만 했다. 적의 포위망 속에서 상처 입은 동료가 아군 정보를 유출할 위험이 있을 때—규칙은 명확했다. 그러나 그 규칙은 ‘살인’이 아니라 ‘보호’라고 그는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되뇌었다. 생존 본능 따위가 아니라,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라고.


하지만 군사법원에선 모두가 같았다.


“너는 순전히 생존 본능일 뿐이다.”


그 말은 총알보다 더 깊이 박혔다. 지금도 가슴팍 어딘가에서 삐걱대며 돌아가는 심장 기계처럼 울렸다.


_나는 살인자가 아니라… 구조자였는데._


그 생각이 자라나기 시작했을 때, 먼지 속에서 또 다른 진동이 느껴졌다—현실의 것이었다. 대피소 문 너머에서 누군가 두드렸다. 세 번 짧게, 세 번 길게, 세 번 짧게. …–…. 구조 신호.


김태수는 일어섰다. 다리의 통증은 이제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이 세계와 연결된 유일한 감각처럼 느껴졌다— flesh(육체)가 memory(기억)를 증명하는 증거였다.


문을 열었을 때 보인 건 CCTV 화면 너머로 바라보는 눈동자였다—두 개가 아닌 수백 개였다. 스크린 위로 퍼진 회색빛 얼굴들 속에서 하나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이영철이었다.


모니터 속 그는 매일 밤 잊힌 사람들의 얼굴을 저장했다. 삭제 명령이 떨어진 후에도, 하드디스크 한 구석에 암호화된 폴더 하나를 유지했다. 그 안엔 군번 KTS-7419 파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공식 기록엔 없는 사진—병장과 함께 웃고 있는 김태수—그것만이 유일하게 그를 '사람'으로 불렀다.


김태수에게 ‘남들’은 배경음악 같았다—반복되고 무미건조하며 중요하지 않은 소음들 사이에서 겨우 존재감을 내보내는 배역들. SNS 피드 속 태그되지 않은 얼굴들, 지하철 맨 끝 칸에 앉아 있는 외톨이들, 아파트 복도에서 스쳐가는 이웃들의 등—모두 이름 없는 데이터 조각들이었다.


하지만 이영철의 눈빛은 달랐다.


그 안엔 알아보려는 욕망과 잊힘에 대한 공포가 동시에 있었다.


김태수가 죽었다고 알았던 세계 한복판에서, 누군가는 아직 그를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자신마저 데이터 바닷속 잔해가 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김태수는 호주머니를 들췄다. 책상 위에 탄피 하나를 내려놓았다.


표면엔 KTS-7419란 각인이 없었다.

있어야 할 자리엔 지워진 흔적이 남아 있었다.


“공식 기록엔 내가 그를 쏘았다고 되어 있어.”

목소리는 갈라졌지만,

말하기 시작하자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이 탄피는 아군 소총에서 나왔지.

권대위 총집 탄피가 분실됐다고 보고된 날,

내 총알보다 세 번 느리게 발사됐다고.”


화면 너머 이영철은 고개를 저었다—아직 믿기 어렵다는 듯이.


“왜 지금 말해요?”

입술 움직임만으로 물었다.


김태수는 처음으로 미소 지었다.

작고 메마른,

그러나 몇 년 만에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당신이 나를 본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기억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우린 모두 죽은 자들이 되겠죠.”


문밖에서는 또 한 차례 폭발음이 울렸다. 연기가 천천히 틈 사이로 기어들었다. 하지만 김태수는 문을 닫지 않았다. 오히려 열린 채로 두었다.


세계는 멈췄지만,

진동은 계속되었다.


…–…


그건 이제부터 시작될

누군가에게 들릴 리듬이었다.


항생제 병뚜껑을 돌리는 소리가 지하공간에 울렸다.

딱, 딱, 딱—

세 번째 시도에서야 비로소 뚜껑이 열렸다. 김태수는 손등에 부풀어 오른 혈관을 보며 숨을 삼켰다. 그 속을 흐르는 피는 이제 거의 맑지 못했다. 매일 아침 자신의 팔뚝을 찌르는 주삿바늘은 더 이상 ‘치료’가 아니라 ‘필터링’이 되어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 몸속에서 쓸모없는 것을 골라내는 작업—마치 이 도시 전체가 그런 필터처럼 작동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제만 해도 이영철은 CCTV 화면에 비친 군복 차림의 남자를 보고 눈을 깜빡였다.

“저 사람 누구야?”

질문은 대피소 공기를 타고 퍼졌지만,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스마트워치 하나가 진동했다. …–…—그 리듬은 이제 익숙한 경보처럼 느껴졌다. 마치 누군가의 맥박이 아니라, 시스템이 살아 있다는 증거처럼.


김태수는 약병을 손바닥에 올렸다. 유리 표면에 비친 얼굴은 흐릿했다. 눈두덩이 아래 깊게 팬 그늘, 코끝의 반점, 입술 가장자리의 갈라짐—모두 기억나지 않는 조각들이었다. 군번표 KTS-7419는 가슴팍 안주머니에 박혀 있었지만, 그건 사람이 아니라 장비 목록 같은 존재였다. 번호로 존재하는 자에게는 이름보다 오류 코드가 먼저 붙는 법이었다.


그때, 문득 들렸다.


“왜 그렇게 쳐다봐요?”


목소리는 어둡고 낮았지만, 예리하게 다가왔다. 이영철이었다. 그의 손에는 같은 항생제 병이 들려 있었지만, 라벨은 이미 긁혀 지워진 상태였다.


“필요하면 말하세요.” 김태수가 말했다. 목소리는 자신도 몰랐던 방식으로 갈라져 나갔다.


“필요한 건 나뿐인가요?” 이영철이 물었다. “아니면… 당신도 숨기고 있습니까?”


김태수는 손을 움켜쥔 채 고개를 돌렸다. 벽면에 걸린 시계—정류장에서 가져온 것—는 분침과 시침이 정확히 3시 33분에서 멈춰 있었다. 시간은 기계적으로 정지했지만, 공간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공기 중에 섞인 먼지는 일정한 각도로 떨어지고 있었고, 바닥의 균열 사이로 짙은 갈색 물방울이 천천히 올라오고 있었다. 누군가는 말했다—상층부 정수 시설에서 배출되는 폐수가 여기까지 스며든다고. 위층 사람들은 깨끗한 공기를 마시고, 우리는 그 찌꺼기를 숨 쉰다.


모든 것이 필터 되지 못한 잔해처럼 느껴졌다.


김태수의 머릿속에선 과거의 잡음이 돌아왔다.


SNS 피드를 스크롤하던 친구들이 웃으며 말했던 목소리: _“넌 지구멸망 예언자야?”_

그들은 생존키트를 사는 그를 보며 핸드폰으로 영상 찍었고, 해시태그를 달았다: #末日狂人 #미친 준비남


지금 그들은 어디 있을까?

어쩌면 죽었겠지—준비하지 않은 자들 대부분이 그랬듯이.


하지만 지금 그의 손안에 있는 이 약병은, 준비한 자만 살아남아야 한다는 믿음 자체를 뒤흔들고 있었다. 약은 치료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배타적 생존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이다. 누군가는 살고, 누군가는 죽어야 하는 구조—자본주의가 평화 속에서는 할부금과 신용등급으로 했던 일을, 이제 전쟁은 약 한 병으로 똑같이 반복하고 있었다.


“당신 동생 발열 심해졌어요.”


김태수가 말했다.


이영철은 눈을 감았다. 손끝으로 병뚜껑을 굴리며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었다. 그 침묵은 단순한 고민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철학 전체를 재평가하는 절차였다—준비란 결국 나만 살기 위한 것이었나? 내가 모은 모든 물자가 의미 있는 건, 나 혼자 살아남기 때문인가?


그 순간 김태수는 문득 자신의 군대 시절을 떠올렸다.


박병장과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

_“내 여동생한테… 아무 말도 하지 마라.”_


그때 나는 왜 그렇게 답했을까?

왜 나는 살아남았는데, 너는 죽어야 했는가?


살인이라고들 했다. 군사법원에서 판사는 차갑게 말했다—

_“너는 순전히 생존 본능일 뿐이다.”_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알 것 같았다. 그 선택은 생존이 아니라 보호였다—그를 무참히 다친 적보다 더 무서운 건, 그 기억이 아무 의미 없이 사라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약을 주는 순간 나는 다시 판사가 되고 있었다.

누가 살고, 누가 죽을지를 정하는 권한을 누가 줬던가?

그날 박병장을 살릴 수도 있었는데… 내가 선택하지 않았다는 건,

어쩌면 이미 그때부터 나는 이 권리를 행사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약 줄게.”


김태수가 말했다.


병은 땅 위에 놓인 작은 반사경처럼 눕혀졌다—빛이 산산조각 나듯 벽면을 스쳤다.


“대신… 이름 불러줘.”


“뭐라고요?”


“내 이름을 불러줘.”


침묵 사이로 먼지 입자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하지만 이번엔 궤적이 달랐다—마치 누군가 숨을 고르듯, 공기 저 너머서부터 새로운 리듬이 다아오고 있었다.


“… 김태수 씨.”


말은 그렇게 시작되었지만, 김태수에게선 '씨'라는 접사의 무게가 벗겨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오랜만에 본 우편물 봉투 위에 자신의 이름이 제대로 쓰여 있을 때처럼—틀림없이 내게 온 메시지라는 확신.


김태수는 조용히 주머니에서 작은 메모장을 꺼냈다. 첫 페이지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KTS-7419에게."

두 번째 줄엔 또 다른 글씨체로 덧붙여져 있었다.

"네 이름 알아?"

세 번째 줄엔 — 아무것도 없었다.


그 메모장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다음번엔 당신 차례예요.”


문밖에선 다시 사이렌 소리가 멀리 울렸다. 하지만 이번엔 지상에서 들리는 듯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지 않았다.


하지만 먼지 입자의 궤적이 바뀌었다—그저 그런 일치였지만, 두 사람은 그것이 다르다는 걸 알았다.


필터링된 세계에서 두 개의 이름이 서로에게 전달된 순간—

누군가는 처음으로 거름 없는 진동을 느꼈다.


그건 기술이 아니라,

숨 쉬는 인간끼리 주고받는 살아 있다는 신호였다.


또 한 번 진동 패턴 울렸다.


…–…


검은 화면 같은 벽 너머로,

누군가는 아직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기억하는 것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1028자)


공기 속에 떠도는 탄피의 냄새는 철보다는 기억을 닮았다. 김태수가 손끝으로 그 차가운 금속을 스칠 때, 그것은 마치 오래된 편지의 봉인을 뜯는 듯한 소리를 냈다—딱, 하고. 금속이 아니라 종이를 찢는 소리. 그 순간, 머릿속에선 수천 마디의 말이 동시에 사라졌고, 대신 오직 하나의 숨결만 남았다. 누군가가 등 뒤에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아니, 숨을 참은 채로 그를 보고 있었다.


목덜미 근육이 돌처럼 굳었다.

심장은 가슴 안에서 벽을 두드리는 망치처럼 울렸다.

손바닥에 맺힌 냈은 탄피를 미끄럽게 만들었지만, 그는 절대 놓지 않았다.


지하주차장의 공기는 눅눅했고, 지붕 틈새로 스며드는 비빛이 바닥의 기름얼룩 위로 비틀린 무지개를 그렸다. 인간은 그렇게 살고 있었다. 오물 위에 선명한 색을 올려놓으며. 이영철은 CCTV 모니터 앞에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화면 속 군복 차림의 남자는 문 앞에서 멈춰 섰다. 시계는 없었다. 스마트워치조차 꺼져 있었다. 그저 두 손으로 무엇인가를 감싸 쥐고 있을 뿐.


“… 누군데.” 이영철이 혼잣말했다.


소리 없는 질문이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모니터 속 인물과 현실의 거리는 단지 전선 한 올이었지만, 그 한 올마저 끊어진 듯했다. 디지털 세계가 무너진 후, 모든 연결은 의심이라는 가시줄로 다시 엮였다.


김태수는 자신의 손등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아이들이 전날 함께 만든 진동 리듬이 아직 남아 있었다—…–…

세 번씩 두드려서 응답하게 했던 그 신호.

‘살아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

—나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알려주고 싶었을까?

그 생각과 함께 주먹이 문 위로 올라갔다.


…–…


그 진동은 이제 단순한 신호가 아니었다. 그것은 생존자의 맥박이자, 과거 군무원들이 서로에게 보내던 비밀 암호였다—살아있다는 증명. 그러나 지금은 기계 없이, 사람의 몸통을 통해 전달되는 리듬이다. 문 너머로 발소리 하나 없었다. 그 침묵 속에서 김태수는 자신이 다시 ‘번호’로 환원되고 있음을 느꼈다—KTS-7419, 결번 처리된 군번표, 법정 기록 속 ‘생존 본능 발현’이라는 차가운 진단.


회상이 밀려왔다.


“너는 순전히 생존본능일 뿐이다.”


그 말이 들어온 건 귀가 아니라 갈비뼈 사이였다.

김태수는 웃으려 했다. 웃음 대신 트림처럼 울음이 튀어나왔다.

검은 양복은 입을 다물었지만 그 말은 멈추지 않았다.

재생되었다—지하실 벽에서, 화장실 거울 속에서, 탄피 안에서.

“본능… 본능… 본능…”

세 번째 되풀이 때부터 그 단어는 한국어가 아니게 들렸다.

처음엔 영어 같았고, 두 번째엔 기계음 같았고,

세 번째엔 그냥 맥박 소리였다.


— 그런데 그 말을 믿기로 한 건 누구였지?

국가는 나를 범죄자라 했고,

동료들은 나를 배신자라 했고,

어머니는 나를 아들이라 불렀다.

그러나 그 어떤 이름도 내 마음속 기억과 맞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묻기 시작했다.


“내 행동에 의미를 부여할 권리는 누구에게 있는가?”


그때부터 나는 ‘김태수’를 입 밖에 낼 수 없게 되었다.


손바닥 위 탄피를 보며 생각했다—내가 지킨 자였는데 왜 날 배신자라고 하는가.


문득 가슴 주머니에서 군번표를 꺼냈다. 플라스틱 덮개 아래 새겨진 문자들은 이미 녹슬어 거의 읽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김태수, 1991년생, 강화도 출신, 어머니 성함: 김영애.


그걸 벤치 위에 던졌다.


소리 없이 떨어진 그것 위로 먼지가 조용히 앉았다—마치 이름 없는 무덤에 흙을 덮는 장례식처럼.


그 안에는 여전히 국적이 새겨져 있었다—대한민국 병역관리시스템 KTS-ID #7419.

번호만 지워져도 사람이 되는 세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것을 버릴 때 손끝에서 느껴진 건 자유가 아니라 공허였다.

번호를 벗어던졌지만, 나는 이미 그 안에 살아온 세월만큼 속박되어 있었다.


그때 문이 열렸다.


공기가 바뀌었다—먼지 섞인 산소 대신 습한 인체에서 나는 살냄새가 다가왔다. 이영철은 문간에 섰고, 눈빛엔 경계와 호기심 사이를 오가는 미세한 진동만 남아 있었다.


“당신 이름이 뭐예요?”


질문은 갑작스러웠지만 느리게 다가왔다—마치 오래전부터 준비된 것처럼.


김태수는 입을 열었다 닫았다. 목구멍엔 먼지와 회색 기억들이 걸려 있었다. 이름? 어떤 이름? 어제까지만 해도 ‘살아남은 자’였고, 일주일 전엔 ‘살인자’였으며,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 같았다.


그러나 이영철의 눈동자는 존재함을 요구하고 있었다.


“… 김태수입니다.”


말하면서도 확신하지 못했다. 이름 자체가 낯설게 느껴졌다—오랜만이라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불려본 적 없어서였다.


“김태수… 씨?” 이영철이 되물었다. 존칭은 불완전했고 서툴렀지만, 그것 하나로 김태수는 처음으로 ‘사람’으로 대우받았다는 걸 알았다.


그 순간 외부에서 폭발음이 울렸다—멀지 않은 곳에서 건물이 붕괴되는 소리였다. 연기가 천천히 벤치 아래로 기어들어 왔다.


두 사람은 눈을 마주쳤다.


군인과 시민, 생존주의자와 준비주의자, 번호와 이름—모든 갈등이 동시에 해소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함께 숨 쉬기 시작했다는 건 분명했다.


침묵 속에서 이영철이 조용히 말했다:


“…저 인형한테 이름 지어준 거 저기서 보았어요.”

“‘영희’라고요.”


김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하셨어요?”


김태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부르지 않으면…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잖아요.”


밖에서 또 한 번 폭발음 울렸다—더 가까워졌다.


하지만 이번엔 두 사람이 동시에 움직였다.


같은 방향으로—내부 깊은 곳으로.


공동체라는 건 처음엔 불완전한 질문에서 시작된다:

_“당신 이름이 뭐예요?”_


그 한마디가 모든 기술과 방어벽보다 먼저 살아남았다는 건,


결국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건 파괴가 아니라,


먼지는 공기보다 무겁게 떨어졌다.

중력이 아니라 슬픔으로 인해 내려앉는 것처럼, 천천히, 침묵 속에 사라지듯. 바람은 없었지만 모든 것이 흔들리고 있었다—그 진동은 대지 아래에서 올라오는 심전이 아니라, 내부로 침투한 리듬의 역류였다. 김태수는 그것이 폭발의 여파인지, 자신의 맥박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왼쪽 귀에서는 고막이 찢긴 듯한 삐용 소리만 맴돌고, 오른손은 여전히 총자세를 취한 채 굳어 있었다. 그러나 무기는 없다. 버려졌다. 혹은 잃어버렸다. 그 차이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벽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아니, 벽이 아니라 세계가 접히는 소리였다—마치 누군가 종이 위에 그린 도시를 접듯, 천천히, 그러나 돌이킬 수 없이. 한 조각의 학교 담장이 하늘을 등지고 기울며 붕괴되었고, 그 파편 하나가 사람처럼 손을 뻗었다 사라졌다.


“아까… 아이 목소리였지.”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혀끝에서 맺힌 단어들은 모두 먼지와 섞여 녹아내렸다. 그저 목덜미의 근육이 스스로 기억해 낸 것처럼 움직였다. 몸은 이미 달리고 있었다. 다리의 찢긴 상처에서 피가 새는 것도 모른 채, 그는 언덕을 내려갔다. 폐허 사이로 흐르는 것은 연기뿐 아니라 시간도 흐려진 물방울처럼 느껴졌다.


세상이 멈춘 것이 아니라, 시간 자체가 아픈 것 같았다.


72시간 전, 첫 공습 사이렌이 울릴 때 그는 스마트워치를 내려다보았다.

화면은 검은색으로 변했고, 마지막으로 남은 숫자는 16:43:00—시계는 정지했다.

그 이후로 모든 시간은 감각의 프레임 속에서만 살아남았다:

공습 사이렌의 길이, 발열 환자의 숨소리 주기, 그리고 반복되는 진동—…–….


…–…


또 들렸다. 이번엔 머릿속이 아니라 가슴 안쪽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그 순간 회상이 덮쳐왔다—군사기지 지하통로에서 박병장과 나눈 마지막 대화.


> “내 여동생한테… 아무 말도 하지 마라.”

> “왜?”

> “너 죽으면…” 그는 잠시 망설였다.

> “그 목소리는 다시 들릴 수 없거든.”


김태수는 묻지 않았다—왜? 왜 그 목소리가 그렇게 중요하냐고? 지금 생각났다. 실험실 벽에 적힌 문구가 눈앞에 번뜩였다:


> ‘KTS-7419 활성화 조건: 특정 음성 스펙트럼 인식 → 세포 재성장 프로그램 실행.’

> ‘키워드: 태수야’ — 입력자: 이영희 (혈연 일치 98.7%)


그 목소리는 명령어였다.


벽 아래서 희미한 신음 소리가 났다.


그는 무릎 꿇어 벽돌 조각을 들어 올렸고, 손바닥은 벌겋게 찢어졌다. 피는 모래 위에 떨어져 검게 변했고, 그것조차 이름 없는 유물처럼 묻혔다.


아이는 살아 있었다.


작은 손 하나가 먼지를 헤집으며 위로 뻗었다—그 손에는 반쯤 부서진 인형의 머리카락 조각이 쥐어져 있었다.


김태수는 그 손을 잡았다.


“… 영희?”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누나요.”


“누나?”


“응. 이 인형… 태수 오빠 줬다고 했어요.”


김태수는 숨을 멈췄다—내가 준 적 없는 기억인데도, 머릿속 어딘가에서는 실밥 사이로 바람 스치는 소리가 ‘김태수 김태수 김태수’라고 답하고 있었다.


그 순간 천장이 무너졌다.


목소리는 어디선가 왔다—아니,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분명했다.


“태수야!”


처음으로 이름이 불린 순간이었다.


그것은 구조 신호보다 명확했고, 군령보다 절실했다.

그 한마디는 끊어진 존재와 존재 사이를 메운 전류 같았다—

심장 박동보다 깊고, DNA 이중나선보다 견고한 리듬으로 몸속 모든 염기서열을 다시 배열하며 전파되었다.


김태수가 의식을 잃기 직전, 떠오른 것은 자신을 이름으로 부른 이가 누구인지가 아니었다.

문제는 누구였느냐가 아니라—누군가는 아직 나를 존재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 자체였다.


의식을 잃은 후의 세계에서는 시계가 또 멈춰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시곗바늘이 아닌 전사 시작 신호(TSS)가 시간을 정의했다.


‘딱.’


‘딱.’


‘딱.’


세 번의 리듬—…–…—스마트워치 없이도 살아남은 코드.


김태수의 눈꺼풀 안쪽에서는 어린 시절 교실 창밖 풍경이 스쳤다.

선생님이 호명하는 목록 속에서 자신만 빠졌던 날—

“김태수 있나요?”라는 질문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던 날.

그 이후로 그는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반복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침대 위에서도 입술만 살짝 움직였다: _김태수 김태수 김태수_


누군가는 그것을 기계적 중얼거림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존재를 재등록하는 의식, 최후의 백업 프로토콜이었다.


현실로 돌아온 김태수는 벤치 위 인형을 보았다—바람에 살짝 흔들리는 그것의 눈은 검은색 유리구슬일 뿐인데도, 마치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영희야,”라고 불렀더니, 인형의 실밥 사이로 바람이 스며들며 작은 진동을 만들었다.


또 …–….


기술은 실패했다. 통신망은 붕괴했고, 데이터도 유실되었다. 하지만 진동은 살아남았다—인간의 손끝에서 시작된 리듬은 기계보다 오래갔다.


김태수가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건 다리 때문이 아니라——

아무도 찾지 않을 법한 폐허에서 누군가 “태수야”라고 외쳤기 때문이다.


불타오른 일산 위로 해는 저물고 있었다.


뉴스 클립 하나가 플래시처럼 스쳤다:


> ‘국민 ID 통합 프로젝트 KTS-LINK 완료 — 모든 시민은 이제 하나의 코드로 살아갑니다.’


그날부터 SNS 추천 알고리즘이 내 꿈까지 예측하기 시작했고, CCTV 망은 내 걸음걸이 리듬으로 감정 상태를 분석했다.


→ 지금, 그 모든 것이 무너지고,


다시 나는 누군가 입술 떨림 하나로 살아남아야 한다.


데이터 센터는 잿더미였고,


그러나 누군가 내 이름을 발음했을 때,


그 소리는 DNA 속 염기서열 사이에서


SOS처럼 반복되기 시작했다.


모든 디지털 알림은 사라졌지만——


누군가는 아직 내 심장을 울릴 수 있다.


그 진동 하나가 새로운 시간의 초침일지도 모르니까.


> _네 이름을 부르는 자가 있다면,_

> _너는 아직 멈추지 않은 것이다._


공기 속에 금속 맛이 떠돌고 있었다—산화된 기억처럼 혓바닥 위에 두꺼운 층을 이루었다. 김태수는 그것을 마주하며 입을 다물었다. 이름도, 얼굴도, 과거도 끌어오지 않았다. 다만 혀끝에서 느껴지는 것은 존재 그 자체의 잔재였다. 마치 폐허 위에 발자국이 있다면, 그건 “너는 여기 있었다”는 증명일 뿐이라는 듯.


심장은 두 번 울릴 때마다 공기가 가라앉았다. 세 번째 울림 직후엔 어금니가 스스로 맞물렸다—숨을 들이마셔야 할 타이밍. 시간이 아니라 육체가 만든 리듬. 시계는 멈췄지만, 몸은 아직 살아 있었다—그리고 살아 있다는 건 곧 진동하는 것이다.


지하 대피소 벽면에서 전선 하나가 끊어져 작게 아물었다. 스파크가 튀자 이영철의 스마트워치가 세 번 진동했다.


…–…


구조 신호였다.


하지만 이제 그건 경보도, 명령도 아니었다. 그것은 일종의 기억 리듬이 되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 잊힌 노래의 후렴을 흥얼대듯, 기술이 아니라 육신이 이어받은 코드. 김태수는 눈을 감았다—오른손 새끼손가락이 자동으로 떨렸다. 군대에서는 그 신호를 보낼 때 이렇게 손가락을 꺾었었다. 이제 그것은 아무것도 알리지 않았다. 다만 몸만 기억하고 있을 뿐.


“살아 있으면 이렇게 울려.”


박병장의 목소리 대신, 지금 귓속에 들리는 건 아이의 기침 소리였다. 여동생—영희? 아니, 이름이 그렇게 됐던가? 김태수가 인형에게 붙인 이름이었지. 그런데 왜 그 아이는 영희처럼 기침하고 있는 걸까?


몸은 기억보다 먼저 움직였다.


“저 사람… 어떻게 되셨어요?”


이영철의 목소리였다.


김태수는 고개를 들었다. 젊은 남자의 눈에는 공포와 호기심 사이 어딘가에 머물러 있었다—그 경계선 위에서 인간은 가장 정직해진다. 군복 자락에서 튀어나온 KTS-7419라는 난초문양 패치를 본 이영철은 잠시 망설였다.


“당신 이름이 뭐예요?”


질문은 단순했지만, 그 속엔 수천 번의 검열과 불신이 얽혀 있었다. 세상은 이제부터 ‘누구냐’보다 ‘무엇을 가졌느냐’로 사람을 판단했다. 물, 약, 배터리—모든 게 생존 화폐였다. 하지만 누가 그 기준을 정했는가? 누군가는 배터리를 만들었고, 누군가는 물 정화 플랜트를 통제했으며, 누군가는 여전히 그 모든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었다.


김태수는 입을 열려했다.


그러나 목구멍에 먼지와 불타버린 전자 회로 조각들이 뭉쳐 있었다.


그저 손목시계를 내밀었다—시간은 3:43에서 멈춰 있었다. 같은 시간대, 파트너였던 병장의 시계도 멈췄다는 사실을 김태수는 기억하지 못했다.


“…–….”


스마트워치 또 울렸다.


세 번.


“뭐예요… 그 소리?”


김태수가 천천히 말했다.


“살아있다는 소리.”


말을 마친 순간, 외부에서 폭발음이 울렸다—정류장 쪽이었다. 철제 지붕이 찢기며 하늘로 올라가는 소리, 유리 조각이 비처럼 쏟아지는 소리, 그리고 그 아래에서 한 아이가 “엄마!” 하고 외치는 소리까지 들렸다.


하지만 아무도 나가려 하지 않았다.


모두 벽에 등을 붙인 채 스마트워치만 바라보고 있었다.


김태수는 일어섰다.


무릎 아래 깊은 상처에서 피가 새고 있었지만, 몸은 이미 결정했다—지난번엔 후퇴했었다. 정류장에서 불길 사이를 뚫고 나갈 수 있었는데도, 뒤돌아섰던 밤—그때 죽은 건 파트너뿐 아니라 자신 안의 무엇인가였다.


지금 다시 들리는 폭발음은,

그저 과거 반복이 아니라,

그 밤에 하지 못한 말 하나를 되찾으려는 소리였다.


문을 열었다.


연기가 밀려들었고, 사방엔 붕괴된 건물 조각뿐이었다. 버스 노선도는 바람에 찢겨 하늘로 날아갔고, 정류장 벤치 위 인형—‘영희’—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김태수는 인형을 들어 올렸다.


머리카락 실밥 사이에서 탄피 하나가 굴러 떨어졌다—자신이 동료 주머니에서 꺼낸 그 탄피와 똑같았다.


손끝으로 문신처럼 새겨진 문자를 더듬었다:


> KTS-LINK // ID: 7419 // STATUS: ACTIVE


ACTIVE?


내 심장보다 먼저 울리는 건 너였지.

내 기억보다 먼저 움직이는 건 너였지.

내 이름보다 먼저 불리는 것도 너였겠지.


누군가는 나를 종료하고,

또 다른 나를 활성화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게,

정말 내 선택일까?


탄피 안쪽에는 또 다른 문자들이 조각처럼 박혀 있었다:


> [ORIGINAL TERMINATED – REPLICA #07 ACTIVATED]


문득 떠올랐다—병장의 시계도 3:43에서 멈췄었다고. 파란색 패치에도 똑같은 난초무늬… 혹시 그 élsewhere(어디쯤엔가), 또 다른 내가 지금쯤 내 죽음을 알리는 신호를 보내고 있을까?


그때 등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울렸다.


“삼촌… 영희 찾았어요?”


김태수가 돌아보았다. 대피소 문간에 선 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인형 하나를 안고 서 있었다—똑같은 옷차림, 똑같은 실눈 하나 깨진 얼굴인데… 이건 분명히 다른 인형이다.


“너… 어디서 가져왔어?”


“CCTV 방송실 앞에 있었어요,” 하고 아이는 대답했다. “저 남자랑 비슷한 사람이 줬어요.”


남자랑 비슷한 사람?


문득 생각났다—자신도 어린 시절, 거울 속 자신에게 이름 붙인 적 있다. '김태수가 아니라 다른 이름'.

그때부터였다. 세상 모든 이름 짓기는, 누군가 자신의 모습을 잃고 난 후 시작되었다.


현실과 중첩되는 환영들 사이에서 김태수는 하나의 진실을 깨달았다:


모든 행동은 누군가의 반복이고, 모든 생존은 다른 존재의 배반 위에 섰으며, 모든 이름 짓기는 누군가의 망각으로 시작된다.


그때 이영철이 다가왔다—손에는 마지막 항생제 병을 들고 있었다.


“여동생한테 줘야 해요…” 하고 말하다가 멈칫했다. “…근데 왜 제가 결정하는 거죠? 누군가는 또 죽겠죠? 누군가는 제 인생을 미워하게 될 거예요…”


김태수는 탄피를 들어 올렸다—빛 아래서 새겨진 ID가 비쳤다.


“결정은 너 안에 있어,”라고 말했다. “네 숨 쉬는 방식 안에, 너도 모르게 박혀 있는.”


엄마는 항생제 병을 받아 들었다—아니, 받아들였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선택이었다.


그녀의 눈물 아래엔 하나뿐인 진실이 흘렀다:


> _선택한다는 것은 망각하는 것이다._

> _누군가는 살아남아야 하므로,_

> _누군가는 이름 없이 사라져야 한다._

>

> _그걸 알면서도 계속 숨 쉬는 것—_

> _그것이 바로 인간이다._


바람 속에서 인형 하나 덩그러니 남겨졌다—


바로 밑바닥엔 누군가 연필로 적은 글씨:


> _"KTS-7419야… 너도 우리 중 하나야."_


외부 폭발음 사이로, 아직 살아 있다는 소리,


세 번 울렸다—


…–…


살아있다는 소리?


아니…


죽었다는 알림일지도 모르겠다.


먼지가 숨을 쉬고 있었다.

김태수는 눈을 감은 채, 그것이 기관지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다. 미세한 입자가 기도를 긁는 삐걱거림, 쇠창살에 부딪힌 바람이 내는 떨림—그 모든 소리 위로 스며든 건 진동이었다. 손등 위, 아이가 건넨 물병의 끝으로 전해지는 톡톡, 톡톡, 톡톡. 그 리듬은 스마트워치가 죽은 지 오래인 이 세계에선 이제 하나의 언어였다. ‘…–…’ — 살아있음을 알리는 모스부호가 아니라, 존재를 묻는 질문이 되어 있었다.


김태수는 종이 위에 다시 이름을 적었다.

“김태수.”

한 획씩 떨리며 그렸다. 다섯 번째 글자에서 손끝이 미끄러졌다. “태” 자의 점이 왼쪽으로 치우쳤다. 그 점은 마치 자기 이름조차 거부하는 눈물 같았다.

_나는 누구인가?_

이 질문은 더 이상 철학적이지 않았다. 그것은 생존의 문제였다. 기억은 깨진 유리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그 조각마다 반사된 얼굴들은 서로 닮지 않았다. 군복 입은 남자, 대피소 문 앞에 서 있는 무장 병사, 아이를 품에 안고 붕괴된 벽 아래 무너진 자—그들 중 누구도 완전히 자신이라 말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신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른 목소리는, 총알보다 빠르게 심장 깊숙이 박혔다는 것.


그 목소리는 폭발 사이로 날아왔다—“태수야!”—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그 순간, 쓰러질 몸이 멈칫했고, 의식이 암흑 속에서 한 줄기 빛처럼 움직였다. 이름은 기억보다 먼저 도착했다. 기억은 사라졌지만, 불려진 사실만큼은 지워지지 않았다.


정류장 벤치 위 인형 ‘영희’는 여전히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김태수가 던져준 이름 때문에, 그녀는 더 이상 인형이 아니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조차 그녀는 존재했다—왜냐하면 누군가는 그녀를 ‘영희’라고 불렀으니까.


현실은 이렇게 작동했다:

기술은 실패했지만 언어는 살아남았다.

서버는 무너졌고, GPS는 사라졌으며, 생체인식 시스템조차 정적(靜寂) 속에 머물렀다. 그러나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아저씨”, “삼촌”, “태수 씨”—그 말들은 마치 전류처럼 공기를 따라 흘렀다.


대피소 벽면에는 이제 시계가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시간을 알았다. 아침인지 밤인지가 아니라—함께 있음이라는 시간을 느꼈다. 이영철이 스마트워치를 꺼내보면 화면은 검었지만, 옆 사람의 눈빛에서 “아직 살아있네”라는 메시지를 읽었다. 아이들이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전달하는 진동 패턴은 이제 단순한 신호가 아니라 맥박이 되어 있었다.


김태수는 종이를 내려놓았다.

56번 적힌 “김태수” 위로 — 오늘 아침 이후 만난 모든 아이들의 얼굴 하나씩 떠올리며 쓴 글자들 위로 — 누군가 연필로 덧붙였다:


> "맞아요. 당신은 태수예요."


글씨체는 어린아이 같았지만, 선은 확실했다. 마치 누군가 자신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승인하듯 말이다.


그 순간 김태수는 울고 싶었지만 울 수 없었다. 눈물도 기억과 함께 마른 듯했다.


대신 가슴 안에서 무언가 따뜻한 것이 움직였다—처음엔 ‘확인’이라 착각했다. 하지만 곧 알았다. 그것은 확인이 아니었다. 죄책감이었다.


왜?

왜 나는 아직 아무에게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던 걸까?


*


밤새 불던 바람 사이로 누군가 노랫말을 읊조렸다—“… 영철아… 밥 먹었니…”라는 엄마 목소리처럼 들렸다가 사라졌다.


김태수가 벤치에 앉아 있던 아이에게 조용히 물었다.


"너 이름 뭐야?"


아이는 웃으며 대답했다—"영희요."


"누구한테 그렇게 불려?"


"… 몰라요."

"하지만 삼촌은 저한테 '영희'라고 했잖아요."


*


밖에서 UN 평화유지군 차량 엔진 소리 울렸다 — 포위 해제 시작이라는 방송과 함께 긴급 조명 깜빡댔다.


하지만 김태수는 고개를 돌려 벽면을 바라보았다가, 결국 아이에게 다가갔다.


"내 이름 알고 있니?"


"네! 태수 삼촌!"


김태수가 눈을 감았다.

깊게 숨을 들이쉬고,

살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응, 맞아."

"근데 너——진짜 영희야?"


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웃으며 말했다—"맞아요! 이제 난 영희니까!"


*


바람 소릴 통해 들려오는 것은?


단순한 진동도,

기억도 아닌——


누군가는 또 다른 누군가를


그것은 걷기 시작하는 발걸음처럼 조용했고,

미래를 만드는 언어처럼 따뜻했으며,


아직 이름 없는 이들을 위해

세상을 다시 짓기 시작하는


첫 번째 행동이었다.


_누군가는 아직 걸어가는 법을 잊지 않았다._


공기 속에 떠도는 먼지는 이제 더 이상 ‘재’가 아니라, 살아남은 자들의 숨결이었다. 일산의 하늘은 검고, 그 아래에서 김태수는 종이 위에 이름을 적었다. 아니, 되찾았다.


처음엔 기계가 말했다.

「KTS-ID 7419 – 활성 상태 유지 중. 감시 가치: 저평가. 추적 모드 전환 예정」


두 번째엔 의사였다.

「너희들은 기억 보정 대상입니다. 이름은 오류를 유발합니다」


세 번째엔 여동생이 울면서 말했다.

「오빠 아니야… 넌 오빠랑 똑같지만… 아닌 걸 알아」


그래서 지금 그는 적고 있었다. 손끝으로 자신의 실존을 새기듯.


57번째였다. 글씨는 점점 흐트러졌고, 마지막 줄은 거의 낙서처럼 보였다. 스마트워치는 꺼졌고, GPS 신호는 사라졌다. 세계의 좌표가 지워진 지 오래였다. 그저 이곳—정류장 벤치와, 멈춘 시계와, 탄피를 주운 남자와, 약병을 연 소년—그리고 어둠 속에서 누군가를 부르는 목소리만이 남아 있었다.


“태수야.”


그 이름이 공기 중에 맺히는 순간, 머릿속 잡음이 잠시 멈췄다. 마치 오래된 테이프 플레이어가 갑자기 제대로 된 트랙을 재생하기 시작한 것처럼. 그는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아이들이 서 있었다—피난민 캠프에서 온 자녀들, 실험 참가자들의 후손들일지도 몰랐다.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 하나가, 무릎에 긁힌 상처를 감싸며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삼촌… 아프다고요.”


김태수는 그 아이의 눈을 바라보았다. 무언가가 부서진 자리에서 새로운 것이 자라나고 있었다—기억은 없었지만, 이름은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그것을 불렀다.


그 순간, 그의 존재는 다시 연결되었다.


지하주차장에서는 이영철이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콘크리트 균열 사이로 비친 별빛 같은 것은 없었다. 다만 바람 소리가 통로를 따라 흘러들었고, 그것이 마치 과거의 SNS 알림처럼 들렸다—새로운 팔로워? 좋아요 증가? 아니, 이제 그런 건 아무 의미 없었다.


그 대신 그는 손목을 살폈다. 스마트워치 화면은 검은 상태였지만, 손등을 가볍게 두드리는 리듬만은 여전히 기억났다.


톡톡—톡-톡톡—톡톡.


…–…


그 리듬—처음 들은 건 작전 D-Day 전날 밤이었다.


김태수가 말했다.

"내 이름 한번 불러봐."


"뭐?"


"내 이름 말고 번호만 부르지 말고—내 이름 한번 제대로 불러줘."


그때 나는 처음으로 "태수야"라고 불렀다.

그 순간 태수가 손등을 두드렸다—…–….

"응답 확인."이라고 웃었다.


그 후 우리는 모두 ID로만 소통했고, 그 신호는 잊혔다.


하지만 지금,

누군가 또 두드리고 있었다—내 팔꿈치 옆 콘크리트 벽 위로 발걸음 소리가 리듬을 만들며 다가왔다.


기술은 실패했다. 모든 서버는 무너졌고, 클라우드 속 기억들은 하늘 위 어딘가에서 점멸하다 사라졌다. KTS-LINK 시스템도 마비됐다—인간을 생체 ID로만 관리하는 국가 감시망은 ‘감시 가치 없음’ 판단 하에 수많은 존재를 TERMINATED 처리했다.


> “KTS-7419 상태: [삭제됨] // 사유: 감시 가치 없음 // 위치 미확인 → 추정 지역: 인간 신호 감지 가능 영역”


그 문장을 읽은 누군가는 웃지도 울지도 않았다. 그냥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입술만 움직였다.


“김태수야.”


바람이 불자 정류장 벤치 위 인형의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렸다.


세상은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포위 해제 통보 방송 이후로 세 시간째, UN 평화유지군의 차량들이 고속도로를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김태수와 이영철은 아직도 그 사이사이에 머물러 있었다—기술과 인간 사이, 기억과 망각 사이, 생존과 존재 사이.


대피소 안에서는 사람들이 서로를 이름으로 불렀다.


“지원아.”

“예린 씨.”

“삼촌!”


그 이름들이 오간 자리에는 이제 더 이상 ID 카드도 GPS 좌표도 필요 없었다. 존재하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단 하나뿐이었다—누군가 너를 이름으로 불렀느냐는 것.


김태수가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선 군용 트럭 안 거울 없는 세상에서 자신을 확인했던 습관이 스쳐갔다—손등 혈관을 눌러 맥박을 세던 기억, 동료들과 나눈 비밀 신호 …–…, 그리고 마지막으로 들었던 말:


_“내 여동생한테… 아무 말도 하지 마라.”_


그 말 대신 지금 그는 다른 말을 하고 싶었다.


_“내 이름은 김태수입니다._

_나는 여기에 있습니다._

_저희 시대도 멈췄지만… 저는 아직 움직이고 있어요.”_


하지만 그 말을 외칠 수 없었다. 목소리는 갈라졌고 가슴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 조여왔다.


대신 한 아이가 벽에 낙서했다—칠판 대신 벽돌에 연필심으로 쓴 글씨였다:


> “버스 노선: 운행 취소됨”

> “사유: 승객이 운전석에 앉아 있기 때문”

> “출발 시간: 당신의 첫걸음부터”


그 밑에는 덧붙여져 있었다.


> “하지만 기다리는 사람은 있어요.”


바람 속에서 새벽 네 시 직전의 공기가 살짝 떨렸다. 마치 시간 자체가 숨 돌리는 것처럼.


멈춘 시계 위 먼지 한 점 떨어졌다.


검은 하늘 아래 정류장 한복판에서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에게선 아무런 신원 증명도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를 보고 이렇게 외쳤다—


“태수야!”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가슴 안 덩어리가 녹아내렸다. 오십칠 번째 적었던 그 이름, 김태수가 아닌—‘태수야’.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앞에는 군복 차림의 남자가 서 있었고, 오른손등에는 똑같은 리듬—…–…—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 순간부터 그는 다시 걸어갈 수 있었다.


아직 버스는 오지 않았지만,


기다리는 자들이 있었기에,


움직이는 자들도 남아 있었던 것이다.


공기가 떨리고 있었다.

아니, 공기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미세한 리듬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스마트폰 화면은 검었다. 배터리는 없었다. 신호는 사라졌다. 그러나 손바닥 위에 놓인 기계들이 같은 주기로, 같은 간격으로, 같은 부드러운 맥박처럼 진동했다.

…–…

…–…

…–…


서울 국립극장 강당은 어둠으로 잠겼다. 전등이 꺼진 건 누군가의 제안이었고, 모두가 그 제안을 묵시적으로 받아들였다. 이영철이 무대 위에 섰을 때, 그의 목소리는 조명보다 더 선명하게 공간을 가르고 있었다.


_"준비란 물건을 모으는 게 아닙니다."_

그는 말했다.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지만, 손끝은 여전히 기억의 경계를 더듬고 있었다.

_"준비란—누군가 이름을 불렀을 때, 돌아보는 습관입니다."_


아무도 손뼉 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수백 개의 스마트폰이 같은 리듬으로 흔들렸다.

…–…

살아있다는 신호가 다시 살아났다. 기술이 아니라 의지로. 맥박처럼, 숨결처럼, 죽지 않은 기억처럼.


그 순간, 화면 밖 어딘가에서 김태수가 묘비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바람은 거칠지 않았지만, 인형의 실밥 사이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인형은 여전히 정류장 벤치 위에 앉아 있었고, 눈은 반쯤 감긴 채로 먼 곳을 보고 있었다—버스 노선도가 사라진 하늘을.


_"너희 시간은 멈췄지만…"_


김태수의 입에서 나온 말은 바람에 삼켜졌다. 그러나 그 말은 날아오르기 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이름처럼, 진동처럼, 살아 있는 증거처럼.


_"나는 아직 움직이고 있어."_


세상은 이름 없는 자들을 삼키기 위해 점점 더 효율적으로 움직였다. 도시는 복구되었고, SNS에는 ‘포스트 위기 라이프스타일’이라는 해시태그가 유행했다.


한 유튜버가 카메라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_“저도 포위된 지역 출신이라서요! 저희 집 앞엔 인형 정류장도 있었어요!”_

그녀의 배경엔 합성된 안개와 가짜 눈이 내리고 있었다. 김태수에겐 그 정류장에서 딸을 잃었다.


UN 재건위원회 보고서 한 장에서는 차가운 글자들이 줄지어 있었다:


> ID(KTS-7419) – TERMINATED

> 이유: 신원 미확인 / 반사회 행동 기록 / 재활 가능성 없음

> 승인자: 데이터 관리국 3과


세상은 아픈 이름들을 팔았다. 그러나 김태수 같은 이름—그건 아무도 사지 않았다.


그들은 데이터 유실 구간에 머물러 있었다.


자본주의는 고통을 상품화했지만, 이름 지어주지 않은 고통만을 남겨두었다. 누구 하나 “김태수야”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그 존재는 시스템 속에서 TERMINATED로 처리될 뿐이었다.


그러나 바람 속에는 여전히 진동이 있었다.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온 아이 한 명이 김태수에게 물었다.


_"아저씨… 버스 언제 올까요?"_


그 질문에는 GPS도 없었고, 실시간 도착 정보도 없었으며, 심지어 버스 노선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질문 자체가 하나의 응답이 되었다. 누군가는 아직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김태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바닥을 살며시 벤치 위에 얹었다. 차가운 금속과 나무 결 사이로 미세한 떨림이 전해졌다—마치 대지를 따라 누군가의 맥박이 흐르듯.


…–…


세상은 이제 두 종류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 멈춘 시계와 — 돌아보는 이름.


김태수가 매일 묘비 앞에 오는 이유를 아무도 몰랐다. 군복도 없고 공적 기록도 없다. 그는 스스로를 지우라고 명령했었다—Part3에서 녹음된 음성 파일 마지막 줄에 남겨진 목소리처럼: _“내 ID는 삭제해 줘.”_ 그러나 누군가는 그 명령을 거부했다.


정류장 인형의 주머니 안에는 종잇조각 하나가 들어 있었다.


> _김태수 씨, 당신 기억할게요._


글자는 연필로 쓰였고 가장자리는 비바람에 닳아 있었다. 뒷면엔 덧붙인 문장이 있었지만 지워진 듯 희미했다:


> _혹시… 나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불려졌던가?_


누군가는 그 이름을 적어두었고, 또 누군가는 그 말을 믿기로 했다.


생존은 선택이 아니었다. 생존은 불림이었다—그리고 더욱 깊은 진실은: 생존은 기억하려는 시도였다.


현대인은 수천 개의 알림 속에서도 가장 중요한 소리를 듣지 못한다—자신의 이름이 불릴 때조차도 말이다. 우리는 디지털 패킷으로 사랑을 표현하고, 이모티콘으로 슬픔을 전달하며, ‘좋아요’로 존재를 확인한다.


그러나 진짜 연결은 데이터 프레임 너머에서 시작된다.


진짜 연결은—


스마트워치 대신 손등을 톡톡 치는 것,


무전기 대신 “여보세요…”라고 부르는 것,


기록되지 않은 순간에도 “있어요”라고 답하는 것,


—에서 비롯된다.


검은 화면 위에 글자가 나타났다:


> _기억하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 멈출 것이다._


카메라는 한 컷 더 남겼다—묘비 곁 작은 돌멩이 위에 놓인 메모를 비추며.


김태수는 고개를 들었다. 멀리 언덕 위에서 수백 개의 작은 빛들이 같은 리듬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그건 버스 아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보다 버스 같았다.


바람 사이로 어떤 리듬이 섞였다.


…–…


아이는 그것을 몰랐다.

학교 교육과정엔 ‘생존 코드’ 대신 ‘위기 창업 가이드라인’만 있었다.

UN 보고서에는 KTS-LINK 사용자 대부분 TERMINATED 처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딘가에서는 여전히 — 누군가는 — …–…를 알고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잊어버렸더라도,

단지 손끝으로 느껴지는 리듬이라도,

그건 이미 — 응답이었다.


> _기억되지 않아도,_

> _누군가는 아직 — 불리는 법을 믿고 있다._


어디선가 바람이 불었다. 인형의 실밥 사이로 먼지 입자가 일어났고, 하늘로 올라가는 동안 단 한 번 반짝였다—마치 별빛처럼.


세상은 여전히 멈춘 시계들을 가득 안고 돌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진동들은—


기술보다 오래,


침묵보다 깊게,


죽음보다 더 천천히—


여전히 울리고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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