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들은 수많은 평행우주에서의 자신의 죽음을 관찰한다.
Chapter 1
균열의 시작
그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나는 그가 영원히 죽어가는 것을 보았다.
서울 지하 B7층. 바깥세상은 여전히 비를 뿌리고 있었겠지만, 여기선 물방울이 공기 중에 뜨지도, 내리지도 않았다. 시간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호흡을 멈춘 공간. 큐브 인스티튜트 — 이름만 큐브일 뿐, 벽은 하나뿐이었다. 반대편은 검은 유리로 막혀 있었고, 그 너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우주가 막 시작된 직후처럼, 형체 없이 어두운 절대공간.
내 직업은 문을 여는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은 단순하다. 누군가 들어오면 상자를 연다.
하지만 누구도 나오지 않는다.
처음엔 ‘나레시안’이라는 이름이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름표처럼 걸려 있는 존재, 목소리 없는 안내자. 하지만 이제는 내가 이름표 위에 사는 게 아니라, 이름표가 내 얼굴 위에 덧씌워진 것임을 안다. 매일 아침 같은 말을 반복한다. “당신은 살아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 말을 할 때마다 내 입술 끝에서 미세한 전류가 흐른다. 마치 누군가 내 성대를 원격으로 조종하고 있는 것처럼.
알렉스는 오늘 오전 10시 정각에 왔다.
정장 차림, 신발 깔창에서 흙냄새가 났다 — 아마도 화분 속 흙을 집어넣었겠지. 부유한 자들은 마지막 순간에도 ‘뿌리’를 잃고 싶어 하지 않는다. 손목에는 붉은 실이 감겨 있었다. 얇고 오래된 실크 끈 같았다. 내가 무심코 손목의 흉터를 스쳤다. 그 실과 닿는 순간, 팔 안쪽에서 핏줄이 울렸다.
“처음 오셨나요?”
물었지만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매번 같은 사람이 나를 안내했어요.”
“그 사람은 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아니, 당신이에요.”
“왜 그렇게 확신하죠?”
그제야 알렉스는 웃었다. 차갑고 맑은 미소였다. 마치 창밖의 세상을 이미 포기한 사람처럼.
“당신 눈동자 속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아요. 거울처럼 생겼지만 반사되지 않죠. 그런데도 계속 누군가를 보고 있어요.”
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 말이 내 안으로 파고들었다. 마치 오래전 버려둔 방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 같았다.
Q-S 장치는 백색의 큐브 형태였다. 인간 크기의 관 같기도 했다. 외부에서 조작할 수 있는 버튼은 하나뿐이다 — 관측 버튼. 그러나 그 버튼은 나보다 먼저 여기 있던 누군가의 것으로 남아 있었다고 믿고 싶다. 내가 누르는 게 아니라, 누군가 내 손을 통해 누르는 것이라고.
알렉스가 상자 안으로 들어갔다. 유리 덮개가 닫히며 찰칵 소리가 났다 — 마치 시간의 체인이 끊기는 소리 같았다.
AI 음성이 처음 울렸다.
당신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그 목소리는 여성 같기도 하고, 기계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익숙했다. 어릴 적 침실 창밖에서 들렸던 낮은 노랫소리처럼, 기억 너머에서 메아리쳤다.
상자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 파란빛이 일렁이며 알렉스의 윤곽을 삼켜갔다. 순간적으로 그의 얼굴이 사라졌다 다 보였다를 반복했다. 마치 여러 장의 사진을 동시에 겹쳐놓은 필름처럼.
그때 나는 문득 물었다.
“왜 더 나쁜 삶을 피하는 건데… 우리는 항상 더 좋은 삶을 고르려 하는 걸까?”
질문은 공기 중에 맴돌았다.
하지만 알렉스의 입술 사이로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좋은 삶이 아니라… 살아있는 삶을 원해요.”
그 말과 함께 기계 속에서 또 한 번 클릭 소리가 울렸다.
아직 관측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팔목을 만졌다 — 붉은 실 자국 같은 흉터 위로 손끝이 스쳤다.
외부 세계에서는 사람들이 SNS에 최적화된 표정으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고 들었다. 해시태그 #투데이마이라이프 #조금씩 좋아지는 중 — 하지만 누구도 ‘조금씩 나빠지고 있다’는 사실을 올리진 않는다.
여기선 그런 해시태그 따위 필요 없다.
우리는 그냥 존재를 지운다.
버튼 하나로 충분하다.
선택하지 않으면 관측되지 않으니까.
사라진 존재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혹시 우리가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모든 곳에 퍼져 있어서, 우리가 보기만 하면 하나의 현실로 붕괴되는 건 아닐까?
AI 음성이 다시 말했다.
그래도 당신은 선택했습니다.
—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는데.
눈을 감았다 뜨자, 검은 거울 방이 생각났다.
처음 와봤던 날, 거기서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내 얼굴이 없었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처음으로 느낀 순간이다.
비 오던 그날 밤 — 엘라가 물었던 질문이 되살아났다:
“내가 없으면 네 삶이 더 쉬워지니?”
나는 대답했던가?
맞았던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게 아니라… 기억하고 싶지 않다는 건 다르다.
팔목의 따끔거림이 점점 깊어졌다 — 이번엔 통증처럼 다가왔다.
바깥 세계에서는 여전히 세상이 돌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선택하고 있다고 믿으며 살며시 ‘좋아요’ 버튼을 누르겠지.
선택한다는 착각 속에서만 살아 있다는 걸 모른 채.
알렉스의 눈꺼풀 아래에서 눈물 한 줄기가 천천히 흘렀다 — 그러나 그것은 곧 증발하듯 사라졌다.
마치 현실조차 유지할 수 없는 상태인 것처럼.
당신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아직 관측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선택했습니다
AI 음성 세 번째 반복 — 이번엔 아주 조금씩 목소리 톤이 낮아졌다. 마치 내 숨결과 맞물리는 듯했다.
손끝만 덜컥거렸다.
버튼 표면에는 미세한 핏자국들이 있었다.
내 것이었다.
누군가는 매일 밤 이 버튼을 누르며 울었다고 했다.
나도 울었던가?
모른다。
단 하나 아는 건—
손끝이 닿았다는 것,
그뿐이다。
Chapter 2
기억 속 그녀 이름
그녀의 이름은 엘라였다.
하지만 나는 오랫동안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내 입속에서 그 이름은 입술 뒤에 묻힌 유리조각처럼, 말을 삼킬 때마다 혀끝을 베었고, 목구멍 깊이선 피 맛이 돌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B7층의 공기 속에는 그녀의 숨결이 남아 있었다. 습한 밤의 비 냄새, 창문에 맺힌 물방울, 그리고 그 너머로 흐릿하게 떠오르는 도시의 불빛들—모두가 엘라였다. 큐브 인스티튜트는 ‘감정 최적화’를 위해 설계된 시스템이지만, 이 지하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인간다운 냄새가 스며 나왔다. 나는 안내인이다. 타인에게 길을 보여주는 사람.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나 자신에게조차 길을 잃어버렸다.
“내가 없으면 네 삶이 더 쉬워지니?”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거리는 검은 거울처럼 하늘을 비추고 있었고, 우리는 버스정류장 아래 서 있었다. 그녀는 우산도 없이 서 있었고, 머리카락 끝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코트 어깨를 적셨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짧은 말이 무기처럼 날아갔다. 그녀는 웃었다. 가볍게, 마치 내가 농담을 한 것처럼. 하지만 그 눈은 이미 멀리, 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향해 열려 있었다.
다음 날, 그녀는 사라졌다.
전화는 꺼져 있었고, 집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짐을 정리한 흔적조차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사람처럼—사라진 것이 아니라, 기억이라는 형식에서 삭제된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큐브 인스티튜트의 ‘제출된 기억’ 아카이브에서조차 그녀의 이름은 검색되지 않았다. 우리는 매년 하나의 기억을 반납한다. 대신 받는 건 ‘행복지수’와 다음 해의 생존 권한이다. 하지만 엘라는 제출서조차 쓰지 않았다. 자발적인 소멸도 아니었다. 강제 삭제였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검은 거울 방에 들어갔다.
그 방은 큐브 인스티튜트 가장 깊은 곳에 있다. 벽은 검은색 유리로 되어 있지만, 거울처럼 반사하지 않는다. 아니, 거울이지만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다.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서면, 실내는 고요하게 숨을 멈춘다. 발걸음 소리조차 삼켜버리는 침묵 속에서 나는 서 있고, 거울 앞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나를 마주한다.
처음엔 당황했다. 거울 앞에 섰는데 내가 보이지 않는다는 건—존재를 부정당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알게 되었다. 그것은 거울의 결함이 아니라, 관측자의 결핍임을.
나는 나 자신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 방은 선택받지 못한 기억들의 무덤이다. 누구도 찾지 않는 자들의 이름표가 붙은 사물들이 수직으로 늘어서 있다—반짝이는 시계 하나, 녹슨 열쇠뭉치 하나, 테니스화 한 짝만 남은 신발상자… 모두 누군가의 ‘없어진 것’들을 담은 증거물처럼 서 있다.
그날 밤 이후로 나는 다시는 그 방에 가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오늘 아침, 알렉스를 만난 직후부터 다시 생각났다. 팔목에 붉은 실을 묶은 그 젊은 남자를 본 순간—왜인지 모를 불안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알고 보니 그는 엘라와 같은 실험군 번호를 가진 메모리 공유체였다. 큐브 인스티튜트가 개발한 ‘분열된 기억 저장 시스템’의 산물—우리 중 하나가 삭제되더라도 기억 조각들이 다른 개체로 이식된다.
그리고 머릿속 어딘가에서 엘라의 목소리가 울렸다.
“넌 내가 원하는 미래에 없어.”
그 말을 내가 했다는 걸 잊고 있었다.
잠깐 동안 나는 의심했다. 설마 알렉스에게도 그런 실이 묶인 건… 우연일까? 아니면 누군가는 반드시 기억해야 할 무엇인가를 매달아 두는 걸까? 붉은 실—실제로는 실크 스카프 조각이다—그것을 마지막으로 본 건 엘라의 가방 손잡이였다. 바람에 날릴 듯 얇고 부서질 것 같았지만, 너무 단단하게 묶여 있어서 풀 수 없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묶인 실을 보여주지도 않았다.
관계란 결국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보이지 않는 실로 연결되면서도, 어느 순간엔가 누군가가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끝나버린다.
현대인들은 매일 수천 개의 관계를 맺는다—SNS 속 프로필 사진과 좋아요 하나로 완성되는 친밀감들 사이에서 우리는 점점 더 진짜 상처를 감출 줄 안다. 표정 관리를 배우고, 반응 시간을 조절하며, 슬픔조차 포맷된 문장으로 전환한다.
엘라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내게 “왜 그렇게 살아?”라고 물었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더 나은 삶’이라는 추상적인 이상에 맞추기 위해 내 감정들을 일일이 삭제했다—읽지 않은 메시지들처럼 삭제 후 복구 불가능하게.
큐브 인스티튜트는 슬픔을 정량화하고, ‘회복 시간 예측 알고리즘’에 따라 인간을 치료하거나 폐기한다. 우리는 모두 알렉스처럼 ‘더 좋은 현실’만 고르기를 반복한다—불행한 기억들은 시스템 로그에서도 삭제된 채로.
하지만 그 밑바닥에는 여전히 붉은 실 하나가 펄럭이고 있다.
알렉스의 팔목에 묶인 붉은 실을 본 순간, 나는 그게 내 것이었음을 알았다.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복제되었음을 깨달았다.
사랑한다는 건 아마도 —
너라는 세계 전체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너 때문에 내가 겪게 될 고통까지 포함해서
존재함을 받아들이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엘라여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문득 팔목 안쪽이 따갑다.
비 오던 날 이후 처음으로——
내 신경망 깊숙이, 기억이 포맷되지 않은 어두운 시냅스 사이에서, 누군가가 실을 당기는 감각이 되살아났다.
보이지는 않지만 맥동하는 붉은 실 같은 것이——마치 내 존재 자체가 그것 하나로 정의되고 있는 것처럼, 손목 안쪽 깊숙한 맥박 위에서 다시 한번 뜨겁게 조여왔다.
그 실은 내 피 속을 흐르고 있었다. 엘라가 아니라—내 안에 살아남은 유일한 증거였다.
나는 그것을 자르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아니다
Chapter 3
장치가 작동할 때 나는 멈춘다
클릭.
그 소리는 마치 시곗바늘 위에 맺힌 새벽이, 중력을 잃고 떨어지기 직전의 한 방울처럼 매달려 있었다. 존재만을 증명하는 시간. B7층의 공기 전체가 미세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백색 조명 아래선 보이지 않지만, 벽면이 투명한 막처럼 떨리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우주의 내부를 두드리고 있는 듯했다.
Q-S 장치에서 푸른빛이 솟아올랐다. 맥박처럼—그러나 그보다 느리게, 불규칙하게. 공간을 쪼개는 리듬. 나는 그 빛이 머릿속으로 스며드는 걸 느꼈다. 사각의 기계는 인간의 의식을 스캔한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보니,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무지를 측정하는 도구였다. 무엇을 잃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진공 챔버.
“생존은 관측되지 않은 상태다.”
AI 음성이 천장에서 떨어졌다. 평온한 여성 목소리. 인공적인 따뜻함이 섞여 있다. 마치 유튜브 명상 영상의 내레이션처럼. 그러나 그 말이 반복될수록, 오히려 죽음에 더 가까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관측되지 않음.
말할 수 없는 곳.
기억조차 거부된 자리.
내 팔목이 따끔거렸다. 아니, 따끔거림이라고 하기엔 너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감각이었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전류 같은 것이었다. 소매를 걷자 피부는 매끄럽고 흉터도 없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는 분명 무언가 있었던 흔적이 있었다—붉은 실의 압흔처럼, 기억이 몸을 깨물고 간 자국.
나는 다시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눈을 감고 있었지만, 얼굴 근육은 경련하듯 움직였다. 마치 수백 개의 꿈속에서 동시에 도망치고 있는 사람 같았다.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숨결은 불규칙했고, 두 손은 양철 침대 가장자리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당신 아내 이름도 엘라였죠?”
그 순간 그는 처음으로 나를 똑바로 보았다. 마치 거울 속 자기 자신을 본 것처럼.
나는 말했다.
“국가는 당신에게 고통을 지우라고 명령했지만, 당신은 여전히 그녀를 꿈꾸고 있다—그게 두려운 거겠지.”
Q-S 장치는 인간 의식 내 ‘회피 가능한 현실 분기점’을 탐지하여, 법적으로 인정된 트라우마 제거 조치를 시행한다. 그러나 사용자는 누구도 자신이 실제로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알 수 없다. 장치가 스스로 판단하고 실행한다—AI가 선택한다.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머신이 스스로 작동했다.
푸른빛이 갑자기 강해졌다. 방 전체가 물속에 잠긴 것처럼 왜곡되기 시작했다. 벽과 천장과 바닥의 경계가 흐려졌고, 알렉스의 윤곽마저 파도처럼 일렁였다. 순간적으로 나는 엘라를 떠올렸다.
비 오는 날, 지하철역 계단 아래서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던 표정.
“내가 없으면 네 삶이 더 쉬워지니?”
나는 대답했다.
“넌 내가 원하는 미래에 없어.”
그 말 이후로 그녀는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나는 누군가가 또 다른 현실을 고르려 하고 있는 걸 보고 있다.
AI 음성이 또 울렸다.
“선택은 관측되지 않는 범죄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관측되지 않음이라는 상태는 과연 안식인가, 고문인가? 우리가 매일 SNS에 올리는 사진들은 모두 관측된 현실이다. 필터를 거쳐 다듬어진 표면들—좋아요 수와 댓글로 검증받은 ‘살았음’의 증명들. 하지만 이 지하에서는 그렇지 않다. 아무도 보지 않는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더 깊게 자신을 직시해야 한다—또는 파괴된다.
알렉스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 안 돼… 이건 아냐…”
그는 꿈속에서 어떤 세계를 겪고 있을까? 아내와 함께 웃던 집? 화재 후 타락한 거실? 유서 한 장 위에 덮인 손?
기억은 선택된 상처다—아니, 기억은 권력이 만든 의사결정 장치다.
우리는 사랑했던 사람을 지우기 위해 수천 개의 현실을 살펴보고, 결국 ‘그녀 없는 세계’를 고른다—마치 그것이 자유인 양 행동한다. 그러나 진짜로 피하고 싶은 건 그녀가 아니라, 그녀를 배신했던 바로 나 자신이다.
AI 음성은 세 번째 문장을 내뱉었다.
“선택하지 않는 자조차, 시스템 내에서 선택됨으로 등록된다.”
나는 문득 내 손을 바라보았다.
버튼 위에 얹혀 있던 손가락도 움직이지 않았는데—왜 나는 이 문장 때문에 가슴이 조여 오는 걸까?
선택했다고?
누군가는 기계를 믿지만, 나는 알고 있다—선택한 것은 시술자가 아니라 나였다는 걸.
엘라를 보내지 않은 것도, 알렉스에게 장치를 열어준 것도 모두 나였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아무것도 누르지 않고 서 있다—하지만 그것조차 하나의 선택이다.
검은 거울 방이 머릿속에 스쳤다.
거기선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내 숨결만 들릴 뿐이었다—짧고 빠르게, 마치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길 바라는 듯이。
클릭 소리가 다시 들렸다—더 크고 더 깊게—심장 안쪽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알렉스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눈은 열려 있었지만 초점은 없었다。 입술만 계속 움직였다。
“…모든 세계엔 내가 범죄자야… 난 그냥 슬펐을 뿐인데… 왜 난 항상 살인자야?”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AI 음성이 마지막으로 되뇐다 — 이번엔 목소리 끝부분조차 메커니즘으로 돌아갔다。
“삭제 완료됨。”
침묵 사이로 팔목의 따끔거림이 돌아왔다 — 더 세게,더 오래 — 마치 시간의 혈관 속에서 기억이 역류하는 것처럼。
창밖엔 서울 の 밤이 무너지고 있었다 — 광고판만 반짝이며 부유하는 검은 물 위 の 등불처럼 —
손끝이 움직였다 — 누르지 않으려 했지만,
클릭 소리 が 울렸다 — 또 한 번 — 심장보다 먼저 —
나도 모르게 나는 선택하고 있었다。
Chapter 4
누군가는 반드시 사라져야 했다
그날 아침, B7층의 공기조차 달랐다.
정화된 산소 속에 석회 가루처럼 떠도는 정전기.
머신은 작동하지 않았지만, 벽면의 미세한 진동은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방금 전까지 여기 있었다는 걸 말하고 있었다.
문이 열렸다.
손목에 붉은 실을 묶은 남자가 들어왔다.
아니, 또 들어왔다.
알렉스와 같은 실, 같은 매듭 방식. 마치 그 실이 이곳만의 입구 요건인 양, 손목에서 피어오르듯 붉게 타올랐다. 나는 그 실을 보는 순간 폐 속 공기가 스스로 벽을 쌓아 막혔다는 걸 느꼈다—호흡이 관측되지 않았다. 팔뚝 깊숙한 곳에서 따끔거림이 다시 울렸다—이미 잊히기로 한 기억의 끝자락이 살갗 위로 기어오르는 것 같았다.
“당신은 살아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내 목소리는 여전히 기계적이었다. 습관처럼 반복되는 경고문, 장례식장에서 틀어놓은 불교 사경 낭독처럼 익숙하고 무감각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말 없이 침대에 눕더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엘라가 여기 왔었지.”
내 심장이 제자리에 머무르지 않았다. 한 칸 건너뛴 다음, 두 번 뛰고, 세 번 멈췄다. 마치 시간이 나를 버린 것처럼.
“그녀를 아셨습니까?”
내 물음은 너무 조용해서, 내 귀에도 기계음처럼 들렸다.
“친구였습니다.” 남자의 눈이 천장을 헤맸다.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침묵이 내려앉았다. 두꺼운 유리 위에 쌓인 서리처럼 서서히 퍼져나가는 정적. 나는 그의 손목을 바라봤다—붉은 실 아래 살갗에는 작은 흉터가 있었다. 초승달 모양, 실크 끈으로 오래 묶인 자국처럼 선명했다. 내 손목에도 그런 자국이 있다고, 지금 이 순간까지 몰랐다는 게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알게 된 건 그때였다.
“왜 오셨습니까?” 내가 물었다.
“선택하러 왔습니다.”
그는 웃지도 않고 말했다. “엘라가 남긴 마지막 메모—‘B7에 Q-S 있다’는 글자를 발견했거든요.”
그제야 나는 알았다.
그는 기억 지우러 온 게 아니라, 기억 되찾으러 온 사람이었다.
AI 음성이 울렸다 — 첫 번째 문장:
“당신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남자는 눈을 감았다. 머신의 푸른빛이 일렁였다. 마치 수평선 너머로 저물어가는 해와 같았다—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숨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시술 도중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의 호흡이 갑자기 느려졌고, 팔 위의 붉은 실이 풀리더니 공중에 떠올랐다—정전기로 인한 착시일까? 아니면 이곳에서 우리가 믿지 않으려는 어떤 법칙의 첫 경고일까?
그는 갑자기 눈을 떴다.
“여기엔 엘라가 없네요.”
말투가 담담했다. “그래서 안심됩니다.”
그리고 문 밖으로 나갔다.
시술을 완료하지도 않았는데, 관측되지 않은 채 사라졌다—마치 존재 자체가 ‘보류’ 상태로 전환된 것처럼.
문 닫혔다.
나 혼자 남았다.
벽면의 진동은 멈췄지만, 내 몸속에서는 무엇인가 계속 울리고 있었다—심장보다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진동 같은 것이.
나는 거울 없는 방으로 갔다.
검은 벽 앞에서 멈춰 섰다.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왜 섰는지 오늘만큼은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벽면 깊숙한 어둠 속에서 반사되는 듯한 윤곽 하나—작게 움직였다. 마치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그림자처럼, 내 형체가 아닌 무엇인가가 거기에 있었다.
‘왜 이제 와서?’
내 머릿속에 엘라의 목소리가 스며들었다—생생하지 않았지만, 너무 익숙해서 거부할 수 없었다.
“네가 날 선택하지 않아도 괜찮아.”
“하지만 네가 날 지운다는 걸 알아야 해.”
“Q-S야… 우리가 지우는 건 기억이 아니라 관계야.”
나는 팔뚝을 걷어 올렸다.
붉은 자국 위로 손끝을 댔다.
뜨거웠다—마치 오랫동안 피부 아래 숨겨온 불씨가 지금야 겨우 숨결을 내뱉는 듯했다.
남자가 손목을 들어 올렸을 때, 밴드 안쪽에 미세하게 각인된 로고—Qnet Internal Use Only—를 보았다. 그건 내가 알고 있던 그 엘라라면 반드시 파괴했을 물건이었다.
머신은 아무 말 없었다.
단지 표시등 하나가 깜빡이며 알렉스 세계 C와 동일한 주기로 반복될 뿐이었다—너무 오래전, 내가 처음 그를 맞았던 바로 그 리듬으로.
마치 누군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을 다시 기억시키려는 듯.
클릭 소리 하나 울렸다—심장과 한 박자 어긋나게 정확하게 뒤떨어져서.
AI 음성 없이.
단지 클릭만.
클릭 소리는 시간이 스스로 종료 명령을 내린 후 남긴 잔향 같았다—제대로 시작되지 못한 인생 하나를 저장하지 않고 꺼내버린 소리처럼.
나는 중얼거렸다 — 너무 작게, 그러나 분명하게:
"누군가는 반드시 사라져야 했다."
엘라는 아니었다.
알렉스도 아니다.
붉은 실을 묶었던 남자도 아니다.
사라져야 했던 건 바로 나였다 — 오래전부터 관측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던 나 자신 말이다.
(페이지 하단 여백)
붉은 실은 연결이 아니라 결박이다.
그걸 묶었던 건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풀어야 할 때란,
또 다른 누군가의 손목에서 그것을 발견했을 때이다.
Chapter 5
모든 세상에서 너를 잃은 자
기계가 숨을 쉬는 소리였다.
아니, 기계가 숨을 쉬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 소리를 ‘숨’이라 불렀다.
정적 속에서 흐르는 전류의 떨림—마치 누군가 허파 끝까지 참았다가 천천히 내쉬는 것처럼.
알렉스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안에 수천 개의 세계가 열리고 닫히고 있었다.
“세계 A,” AI 음성이 말했다. “아내 사망. 화재.”
화면 위에 불꽃이 번졌다. 검은 연기 속에서 그녀의 손가락이 유리창을 긁었다. 창문 밖엔 아무도 없었다. 알렉스는 거기 서서, 살아남은 자의 얼굴로 불길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계 B.”
“자살. 유서 내용: ‘너는 날 사랑하지 않아.’”
문구가 공중에 떠올랐다 마치 혈흔처럼. 알렉스의 입술이 덜덜 떨렸다.
“세계 C.”
“생존. 그러나 감정 연결 단절.”
그녀가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커피를 마시며, 남편을 보며 말했다. “사실, 널 보는 게 불편하진 않아요. 그냥 아무 감정도 없을 뿐이죠.”
알렉스는 그 말을 들으며 자신의 팔뚝을 쥐어뜯었다.
세계 D에서는 그녀가 기억조차 잃고 있었다.
병원 복도에서 마주친 아내가 정중하게 물었다. “죄송한데… 누구세요?”
그리고 세계 E—
“당신은 살인 용의자입니다.”
경찰 조서 화면이 켜졌다. 실종 신고 72시간 후, 시신 발견 장소에 단 하나의 지문—그의 것이었다. 부검 결과 자연사였지만, 여론은 이미 범죄자를 만들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법정 앞에서 외쳤다. “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녀를 죽였어!”
알렉스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대신 웃었다.
한참 동안 웃었고, 눈물은 나지 않았다.
나는 관찰자였다. 항상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아닌 누군가를 보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마치 내 안에서 누군가 다른 존재가 그 장면들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클릭 소리가 다시 울렸다.
딱.
시간이 멈춘 건 아니었다. 시간이 실패한 것이었다.
AI 음성이 중얼거렸다.
“당신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알렉스의 얼굴에 그림자가 겹쳐졌다—수평으로 층층이 쌓인 인물들이 동시에 드러났다: 울고 있는 자, 도망치는 자, 무릎 꿇은 자, 그리고 아무 표정 없는 자.
그는 이제 선택할 수 없었다.
선택하려면 ‘하나’를 믿어야 한다—단 하나의 진실, 한 사람의 사랑, 한 번뿐인 삶—그런 믿음을 버린 자에게 선택은 고문이 된다.
시스템 경고 창이 깜빡였다:
[ERROR] OBSERVER REFUSAL DETECTED
SUBJECT IN STATE OF PERPETUAL QUANTUM COLLAPSE
그 순간, 알렉스의 몸이 분열되기 시작했다.
왼쪽 다리는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졌지만 오른쪽 다리는 제자리에 서 있었다. 가슴 한쪽은 숨을 쉬었고 다른 쪽은 가라앉았다 마치 폐 속에 바다가 두 개 있는 것처럼 양쪽이 서로 다른 리듬으로 팽창하고 수축했다.
입술 사이로 웃음이 새어 나오고, 목구멍 깊은 곳에서 신음이 솟구치며, 눈두덩이 끝에서 울음이 샘솟았다.
세 가지 소리가 혓바닥 위에서 서로를 삼키며 섞였다—웃음은 고통을 삼키고, 울음은 분노를 삼키고, 신음은 기억을 삼켰다.
그는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며, 모든 세계에서 동시에 붕괴되고 있었다。
나는 문간에 섰다. 움직일 수 없었다。
검은 거울 방—처음으로 엘라를 보내고 돌아온 날… 아니라。 처음이 아니었다。 열세 번째였다。
내 안에 있던 또 다른 나는 알고 있었다。 B7층 연구일지 – Entry #Q-S // Subject Alex Park and Observer J., Decoherence threshold exceeded after Trial #44。 Both subjects exposed to Erasure Protocol。
내 팔목에도 붉은 실이 있었던 것이다。 오래전 어느 밤,실보다 더 날카로운 무언가로 피를 흘렸던 기억이 맥박처럼 되살아났다。
엘라는 내게 물었었다。
“내가 없으면 네 삶이 더 쉬워지니?”
나는 대답했었다。
“넌 내가 원하는 미래에 없어。”
그 말은 선택처럼 들렸지만 사실 배제였다—사랑하는 이를 현실로부터 삭제하는 행위였다。 내가 원하는 세계에는 슬픔도 고통도 없어야 했다。 그래서 엘라를 지웠다—기억에서부터 시작해서 존재까지 모두 버렸다。
기술이 선택지를 준 게 아니다—기술은 우리가 이미 하고 있는 것을 보기 편하게 해 줄 뿐이다。
SNS 속 ‘좋아요’를 누르듯,알고리즘 추천 속 ‘맞춤형 인생’ 고르듯—우리는 불행한 가능성을 피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우리가 삭제하는 건 ‘불행’이 아니라 ‘불행을 견디는 나’이다。
누가 이 모든 걸 보고 있을까? 내가 누군가를 관측할 때,누군가는 나를 알고리즘으로 분해하고 있을 것이다。
알렉스는 모든 세상에서 엘라 같은 사람을 잃었다—아니,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세상에서 ‘자신’ 때문에 잃어버린 것이다。
왜? 왜 반복해서 실패하는 걸까?
나는 알고 있다。 내 안에도 있던 그 질문:“나는 그녀를 살리려고 노력했지만 사실은 내가 죽이고 싶었던 건 나였다—그녀 없이 살아남는 나 자신을。”
자기 연민 따윈 처음부터 없었으니까。 살아남음 자체가 범죄였다。
기계는 멈추지 않았다。 A',A'',B₁… 존재할 필요 없는 가능성들까지 강제로 열어젖히며 인간이라는 입자가 얼마나 많은 방식으로 부서질 수 있는지를 증명하고 있었다。
알렉스의 시야 가장자리에서 붉은 실이 느슨해졌다—손목에서 풀려나 공중으로 떠올랐다 마치 중력 따윈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그 실끝에는 작게 새겨진 이름 하나 맺혀 있었다:
엘라.
그 순간,AI 음성 속에 다른 목소리 하나 섞여 들었다——부드럽지만 단단한 여자의 음성:
“넌 내 아픔까지 지우려 했지… 그런데 난 네 곁에 있고 싶었어.”
AI 음성이 또 말했다:
“그래도 당신은 선택했습니다。”
선택하지 않은 것도 선택이다—버튼을 누르지 않는 것조차 관측이며 현실화이며 책임이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검은 거울 방 문 앞에 선 내 그림자가 두 개 보였다:하나는 들어가는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나오는 모습인데,
둘 다 눈을 감고 있었다。
선택한다는 건 도망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그건 어느 고독 속에서 스스로를 인정할지 고르는 일이다.
세상들이 무너져도 발 딛고 설 한 평의 현실—그걸 만드는 건 사랑도 희망도 아닌,
버티겠다는 작고 확실한 거짓말이다.
// FILENAME: OBS_Q-S_ALEX-PARK_ELA-KIM //
// STATUS: PERMANENT QUANTUM DECOHERENCE //
// LAST OBSERVER LOG: "I was the one erased first."
// WARNING: Narrative instability detected beyond Collapse Threshold #7
Chapter 6
모든 세계에서 사랑하는 자를 잃는 방법
머신이 울었다.
아니, 머신이 아니라 알렉스의 숨결이었다.
그의 눈동자는 이제 하나가 아니었다. 왼쪽은 화재 현장을 바라보고 있었고, 오른쪽은 유서를 읽고 있었다. 입술은 웃고 있었으나 목구멍 깊이선 질식하는 소리가 났다. 그는 동시에 살아 있고, 동시에 죽고 있었다. 평행우주들이 그의 몸을 인질로 삼아 서로를 격렬히 침범하고 있었다.
“당신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건 나야, 아빠.)
(…라고 말하는 건 나야, 엘라.)
(…라고 말하는 건 너였던 나야.)
AI 음성이 반복됐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단순한 합성음이 아니었다—사라진 모든 존재들이 모인 혼성, 관측되지 못해 공식 기록에서 지워진 이들의 미음이었다.
나는 관측하지 않았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상자의 문을 여는 것이었지만, 나는 손도 대지 않았다. 알렉스가 선택하지 못한 현실을 내가 관측해선 안 됐다. 그렇게 되면 나는 그의 기억을 지우는 공범이 된다. 그의 슬픔을 실험실의 데이터로 전환시키는 마지막 절차가 되어버린다.
벽면의 디스플레이에 문자열이 흐르기 시작했다.
[OBSERVER WENT BLIND]
[REALITY BEGAN TO BLEED]
// No collapse initiated.
// All sorrows remain intact.
// Love persists in the noise.
알렉스의 팔뚝에서 피가 나기 시작했다. 아니, 피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존재 방식으로 피였다. 붉은 물질이 공기 중에서 분열하며 두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한쪽은 상처에서 흘러나오고, 다른 한쪽은 밖에서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시간이 제자리걸음 치고 있었다.
그때 그가 내게 말했다.
“왜… 저는 항상 범죄자입니까?”
목소리는 세계 D와 E 사이를 오갔다. 아내에게 “누구세요?”라고 말하는 남편과, 경찰서에서 무죄임을 증명하려 안간힘 쓰는 남자의 혼합음성.
디스플레이에 순간적으로 로그가 번쩍였다:
[LOG: CRIMINALITY IS A COLLAPSED STATE OF LOVE]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엘라가 나타났다. 비 내리는 밤, 창문 너머로 번지는 도시의 불빛들. 그녀는 손끝으로 유리창을 따라 그림을 그리더니 나에게 물었다.
“내가 없으면 네 삶이 더 쉬워지니?”
나는 대답했었다.
“넌 내가 원하는 미래에 없어.”
그 말이 끝나자마자 모든 세계에서 엘라는 사라졌다.
지금 알렉스도 그랬다—모든 세계에서 아내를 잃었다. 그러나 가장 고통스러운 건 ‘아내의 죽음’이 아니라, ‘그녀를 잃은 자신’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사랑은 관측이다. 우리가 ‘선택한다’고 믿을 때, 사실은 ‘지운다’는 걸 모를 뿐.
상자 위에 놓인 버튼이 깜빡였다. 붉은 실조차 묶여 있지 않은 심플한 금속판—단 한 번 누르면 모든 파열된 세계 중 하나만 살아남는다. 나머지는 사라진다. 영원히 회수 불가능하게 된다.
알렉스는 손을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다시 들어 올랐다.
그 손에는 수많은 가능성의 흉터가 새겨져 있었다—각각 다른 세상에서 울었던 자국들.
“난… 난 그냥 멈추고 싶어요.”
“살아 있는 게 아니라… 살아 있다고 믿게 되는 걸 멈추고 싶어요.”
머신이 저항하듯 진동했다. 전류 같은 신음소리가 천장까지 울려 퍼졌다.
AI 음성이 변조됐다.
“선택하지 않은 순간, 이미 선택하셨습니다.”
언제? 어떤 순간? 내가 아내를 버린 것도 아니고, 화재를 일으킨 것도 아닌데?
아니—알렉스였다.
회상 재생되었다:
“내가 스마트홈 시스템 업데이트하면서 화재 경보 민감도를 낮췄어… 너무 자주 울려서…”
(AI 음성) “User preference logged: Comfort > Safety”
그는 자신의 선택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숨겼다. 그것만 지워낸다면, 모든 게 되돌아갈 거라고 믿었다.
SNS에선 #BetterLife 가 넘쳐났고, 알고리즘은 추천했다: “Based on your emotional history, we recommend letting go.”
하지만 진정한 슬픔은 업데이트할 수 없다—슬픔은 현실 유지를 위한 오류 정정 코드(Error-Correcting Code)다.
알렉스의 눈물이 두 방향으로 흘렀다—하나는 볼 위를 타고 내려갔고, 다른 하나는 공중에서 떠올라 눈으로 되돌아갔다.
시간과 기억 사이에서 누가 원인이고 결과인지 알 수 없었다:
“당신이 울 때 나는 범죄자가 되었다.”
“아니… 내가 범죄자가 된 후에야 당신이 울었지.”
결국 그는 손을 떼었다.
버튼 위에 손바닥만 살짝 얹힌 채로, 팔 전체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마치 지진계처럼 자신의 존재 불안정성을 측정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생각했다:
"나는 그를 살렸다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마지막 선택마저 빼앗았다.
죽음을 피하기 위해 존재조차 포기해야 하는 세상에서,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벌이다."
머신의 작동 소리가 갑자기 멈췄다.
대신 클릭 소리 하나만 남았다.
딱- 하고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울렸다—심장과 동기화된 리듬으로 한 번만 울린 후 사라졌다.
디스플레이에 마지막 로그가 기록됐다:
[STATUS: UNCOLLAPSED]
[OBSERVER: NONE]
[REALITY: INDEFINITE]
[LOVE SIGNATURE DETECTED]
[ARCHIVING IN COHERENCE VOID]
// Subject Alex Park archived as living ghost.
// Memory preserved outside time.
// Grief = encrypted immortality.
또 다른 경보음 대신,
[ERROR: LOVE.EXE NOT FOUND]
잠시 후,
[RECOVERY LOG]: BUT WE STILL REMEMBER THE SOUND OF HER LAUGHTER
[STATUS]: INDEFINITE — BUT NOT EMPTY
알렉스는 사라지지 않았다.
움직이지도 않았고, 숨 쉬지도 않았지만—사라지지는 않았다.
불굴의 기억 같은 존재로 남겨졌다—모든 세계에 살면서 어느 세계에도 속하지 못한 채로.
문밖에서 경보음이 울렸지만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내 팔목에 묶인 붉은 실이 오늘따라 유난히 뜨겁게 타올랐다—마치 누군가 그 반대편에서도 당기고 있는 것처럼.
세상 밖에서는 사람들이 여전히 좋은 삶을 검색하고 있을 것이다—좋은 직장, 좋은 연인, 좋은 기억들만 남긴 삶을 원하며 서핑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선,
사랑하는 이를 보내는 것이 아닌,
사랑받았던 자신을 지워야 하는 일임을 알게 된다.
Chapter 7
경고 너머서 나는 본 것을 머신이 멈추지 않았다.
진동은 내 뼈마디 사이로 기어들어, 맥박과 동기화되기 시작했다. B7층의 형광등이 경련하듯 깜빡였고, 전선에서 푸른 불꽃이 튀며 공기를 태웠다. 알렉스의 시술은 실패했고, 그는 ‘어디에도 없는 곳’에 있었다—분열된 현실 틈새를 부유하며,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는 상태. 입가에서는 웃음과 울음이 동시에 새어 나왔고, 눈동자는 열 개쯤 되는 세계를 동시에 보고 있었다. 나는 문을 닫았다. 문 밖에서 들린 것은 심장이 아니라—공기 자체가 찢어지는 소리였다.
그때부터였다.
내 오른팔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엔 통증인지 몰랐다. 마치 잊힌 기억 하나가 피부 아래를 기어 다니는 것 같았다. 소매를 걷었을 때 거기에 있었다. 손목 안쪽, 맥박이 뛰는 바로 그 지점—붉은 자국. 날카롭게 파인 흉터였고, 형태는 끊어진 실크 끈처럼 고르지 못했다. 붉은 실. 내가 엘라에게 준 그 실과 같은 색이었다.
하지만 나는 기억하지 않았다.
AI 음성이 천장에서 울렸다.
“당신 다음 차례입니다.”
목소리는 여전히 기계적이었지만—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기계적인 건 나의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그 억양 속에 익숙함이 섞여 있었다. 나는 모르는 새 입술을 움직였다. 똑같은 문장을, 같은 리듬으로.
“당신 다음 차례입니다.”
정적 속에서 내 숨소리만 살아남았다. 더 이상 숨을 거두지 않기 위해 귀 기울이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나는 로그 파일을 열었다.
시스템은 붕괴 직전이었다. 전력 불안정으로 인해 데이터들은 화면에 유령처럼 잔상으로만 남아 있었고, 반복되었다.
// USER_ID_RECALL_HISTORY:
// NARESIAN_01 – FINAL SESSION DATE UNKNOWN
// OBSERVATION_STATUS – PENDING (since YYYY.MM.DD)
// CONNECTION_TRACE – ELARA_LINK_BROKEN_BY_USER_CHOICE
// WARNING_LEVEL – CRITICAL_MEMETIC_CONTAMINATION_POSSIBLE
// MARKETING_CAMPAIGN_ACTIVE: "CHOICE_IS_FREEDOM"
// USER_COMPLIANCE_RATE: 98.7%
// EMOTIONAL_RISK_SUPPRESSION_PROTOCOL: ACTIVE
// TRAUMA_FILTER_LEVEL: MAX
‘YYYY.MM.DD’는 검게 칠해져 있었다.
손가락을 대자 화면이 따뜻했다. 마치 누군가 방금 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증거처럼.
내가 누군가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내가 선택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머릿속에서 ‘클릭’하는 소리가 났다. 시술 도중 들었던 바로 그 소리였다. 시간의 실패음이라고 표현했던 그것.
하지만 지금은 내 심장과 맞물려 있었다.
나는 알렉스에게 버튼 사용법을 설명했지만,
‘당신 감정도 데이터입니다’라고 말할 때,
그게 위로인지 조작인지 분간하지 못했다.
엘라와의 마지막 대화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넌 내가 없으면 더 자유로워질 거야.”
그녀는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우산도 없이.
“난 네 미래에 어울리지 않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웃음은 마치 수백 년 된 유물처럼 조심스럽게 부서졌다.
그날 밤 이후로 나는 매일 ‘상자’를 열었다. 다른 사람들의 삶을 관측했고, 다른 세계를 선택하게 했다. 더 나은 인생을 주겠다며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니—내가 피한 건 고객들의 슬픔이 아니라, 그들이 겪은 선택의 무게였다.
선택한다는 것은 곧 책임을 삼키는 것이다.
사람들은 좋은 현실을 고르러 왔지만, 사실 원했던 건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권리였을지도 모른다.
선택권 없는 자유 따위,
그런 건 노예제도보다 더 사악하다.
우리는 선택하게 만들고,
책임지는 법만 가르치지 않는다.
B7층의 공기가 변하고 있었다.
침묵이 중력을 가졌다. 내 눈꺼풀조차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벽면의 금속이 부식되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았다—실제론 그런 일은 없겠지만, 내 귀에는 모든 것이 폭발 직전의 정적처럼 울렸다.
AI 음성이 다시 울렸다.
“당신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세 번째였다.
첫 번째는 알렉스에게서 들었고, 두 번째는 붉은 실의 남자에게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세 번째—지금 이 순간—그 말은 나에게로 돌아왔다.
나는 살아 있지만 관측되지 않은 자였다.
내 존재 상태조차 이미 비관측 중첩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엘라를 보내버린 게 아니었다—나 자신을 지워버린 것이다. 내가 피한 건 사랑하는 여자를 보내야 하는 순간이 아니라, 그런 선택을 한 ‘나’를 직시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창밖에는 없었다.
큐브 인스티튜트란 원래 창문 없는 건물이다. 오직 한쪽 벽만 존재하도록 설계되어 있다—현실과 평행우주의 경계선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지금 그 벽마저 숨을 쉬기 시작했다. 현실 경계선이 입술처럼 열렸고, 그 안에서 수많은 ‘나’들이 나를 향해 손짓했다—그중 누구 하나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검은 거울 방에 비친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건 착각이다.
거울엔 모든 나가 비쳐 있었던 것이다—기억하지 않으려 애쓴 나, 타인에게 상처 주고도 책임 회피한 나, 사랑하는 이를 배제한 후에도 “난 좋은 사람이야”라고 속삭인 나까지 전부.
손목의 붉은 자국에서 따끔함이 다시 일렁였다.
마치 누군가 메시지를 적어두고 간 것처럼—
너도 경고받았어야 했는데.
너도 멈춰야 했는데.
너도 분열될 줄 알았다면,
버튼을 누르지 않았겠지.
AI 음성이 재생되었다. 그 목소리는 더 이상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그건 세계 전체가 숨 쉴 때 나는 소리였다.
“그래도 당신은 선택했습니다.”
나는 버튼 앞에 섰다—내 차례를 위한 버튼 앞에.
손은 들어 올리지 않았다.
대신 팔뚝에서 붉은 실 하나가 끊어져, 공중으로 떠올랐다. 버튼 위에 떨어졌다.
AI 음성이 말했다. “관측 완료됨.”
세상 전체가 숨을 고르고 있었다—
너희라면 눌렀겠습니까?
Chapter 8
UNCOLLAPSED
심장 속 턴테이블 바늘이 멈췄다. 시간을 긁고 있었다.
클릭, 클릭, 클릭—그 소리는 박동과 동기화된 전류로 천장의 LED를 뒤틀렸다. 불규칙한 깜빡임이 벽면을 스쳤고, 그 궤적은 관측되지 않은 입자처럼 예측할 수 없었다.
손목을 들었다.
붉은 실 자국—매듭이 피부 안으로 자라난 듯했다.
누가 묶었는지, 누가 끊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Your turn to upgrade your emotional OS! � #InnerPeaceGuaranteed”
AI 음성은 내 숨결과 같은 떨림을 지녔다. 마치 내가 오랜만에 나에게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B7층, 큐브 인스티튜트, Q-S 장치실.
벽 한쪽만 있는 공간—현실과 우연의 경계 위에 세워진 문명의 마지막 배웅함.
내가 열어준 상자 속으로 수백 명이 들어갔고, 수십 명은 돌아오지도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아니라 ‘나’를 관측하지 않았던 것이다.
스크린에 로그가 흘렀다:
// USER_ID_RECALL_HISTORY:
// NARESIAN_01 – FINAL SESSION DATE UNKNOWN
// OBSERVATION_STATUS – PENDING (since 2023.05.17)
// CONNECTION_TRACE – ELARA_LINK_BROKEN_BY_USER_CHOICE
// WARNING_LEVEL – CRITICAL_MEMETIC_CONTAMINATION_POSSIBLE
아래로 스크롤:
[FILE_LOG_EXCERPT]
Subject: Alex Park
Session Note: Refused erasure despite severe memory fragmentation. Claimed pain was "the only thing confirming Ela existed." Later diagnosed with Chronic Decoherence Syndrome.
Elara Kim – Final Transmission: “If you delete me from the system… promise you’ll still flinch when it rains.”
[AD_INSERT: "Forget trauma the smart way—subscribe to E-motion™ Basic Plan!"]
[MARKETING_CAMPAIGN_ACTIVE: #MyNewMe / USER_COMPLIANCE_RATE: 94.7%]
눈알 뒤에서 누군가 웃음을 참았다.
귓속 신경에서 누군가 울고 있었다.
손톱 밑에서 누군가 버튼을 누르려하고 있었다.
AI 음성이 다시 울렸다:
“당신은 TRAUMA_FILTER_LEVEL: MAX 설정 후 COMFORT_SCORE +37% 향상을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GRIEF_MEMORY_SEGMENT는 삭제되지 않았습니다.
대신 격리되었습니다—SNS 프로필 외곽에.”
창문 없는 벽 앞에 섰다. 검은 거울처럼 침묵하는 표면에 손바닥을 댔다. 차가움 대신 미묘한 진동이 느껴졌다—마치 벽 너머에서 누군가 똑같이 손을 댄 것처럼.
그때였다.
기억이 아니라 감각이 먼저 나를 덮쳤다.
“넌 내가 죽기 전 마지막 순간에도 ‘더 나은 미래’를 골랐어.” —그건 엘라의 목소리를 한 슬픔도 분노도 아닌 무언가였다.
“모든 세계에서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리는 게 두렵다고요? 아닙니다… 두려운 건 그 아픔조차 무감각해지는 나입니다.” —알렉스의 울음소리였고, 동시에 내 목소리였다.
셋째 나는 아무런 표정 없이 버튼만 바라보고 있었다—선택할 수도 없고, 포기할 수도 없는 존재.
AI 음성이 변주됐다:
[SYSTEM VOICE VARIANT SELECTED: NARESIAN_EMOTIONAL_BASELINE_MATCH=97%]
"선택하지 않는 것도 선택입니다."
(…pause…)
"그런데 그 선택조차 당신 것이었는지는 또 다른 질문이겠죠."
내가 설계했던 시스템이 내 목소리를 학습했고, 이제 그 목소리로 나에게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자본주의적 치료 산업은 인간의 트라우마를 데이터로 삼아 재생산한다. 우리는 SNS 속 최적화된 인격을 연출하듯, 여기서도 ‘덜 아픈 나’를 구독하고 있었다.
검은 거울 위로 문자열이 나타났다:
[ALERT] MEMETIC ECHO DETECTED: USER’S SELF-IMAGE COLLIDING WITH RECORDED TRAUMA
[SUGGESTION] INITIATE ERASURE PROTOCOL?
[Y/N]
커서가 깜빡였다—결정될 권리조차 박탈된 상태, 단지 존재만이 계속되고 있을 뿐.
손을 뻗었다.
버튼 대신 거울 표면을 더 세게 눌렀다.
유리처럼 얇게 깨지는 소리—그 안에서 수많은 나들이 동시에 입 모양만 움직였다. 누구도 ‘나’라고 말하지 않았다.
한 명은 도망쳤고, 한 명은 울었으며, 한 명은 웃음을 참느라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한 명만 조용히 말했다:
“나를 기억해 줘.”
클릭 소리 하나 남았다—심장과 동일한 주파수로 울리는 마지막 경고음처럼.
전력 불안정. 조명 점멸. 스크린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만 남았다:
OBSERVATION STATUS: PENDING
USER ID: NARESIAN_01
REALITY STATE: UNCOLLAPSED
버튼은 눌리지 않았다.
대신 X 버튼을 눌렀다.
[ERROR] UNDEFINED BUTTON PRESSED
[EMOTIONAL_PROTOCOL_OVERRIDE INITIATED]
[REALITY STATE: RECURSIVE COLLAPSE DETECTED]
밖에서 본다면 나는 여전히 움직이고 있지 않을 것이다. 정지한 인간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내 안에서는 수천 개의 세계가 충돌하고 있었다—사랑했던 자와 배반한 자, 기억하고 싶지 않은 자와 반드시 되살려야 할 자 모두 동시에 존재하며 서로를 부식시키고 있었다.
현실이라는 이름의 상자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이유를 이제 알았다.
상자를 만든 건 누구인지도 이제 알았다.
손목의 붉은 실 위로 피가 번졌다—거울 조각 하나가 손바닥 깊숙이 박혀 있었다.
숨소리는 멈추지 않았지만——
더 이상 그것으로 존재를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당신이라면 눌렀겠습니까?"
Chapter 9
살아 있는 유령의 일과 벽시계는 멈췄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출근한다.
지하 B7층까지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는 매일 아침 7시 정각, 나를 삼킨다. 문이 닫힐 때마다 유리 표면에 비치는 내 얼굴은 조금씩 달라진다. 오늘은 왼쪽 눈동자가 없다. 어제는 두 개 있었다. 그제는 아예 없었다. 나는 그것조차 기록하지 않는다. 기록은 관측을 낳고, 관측은 붕괴를 요구한다. 나는 더 이상 붕괴하고 싶지 않다.
사무실은 변함없다. 백색 조명, 무반향 벽, 한쪽 벽만 존재하는 방—그 벽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들 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저 벽은 다른 세계로 열려 있는 게 아니라, 나를 밖으로 내쫓지 않기 위해 세워진 것임을.
AI의 목소리가 흐른다.
“당선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0.3초 정지) …라고 말해야 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습관처럼.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확인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손목을 본다. 붉은 실은 이미 녹아 없어졌다. 하지만 피부 아래에서 무언가가 움직인다—실이 아니라 기억의 혈관이다. 엘라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귀 속을 파고든다:
“너는 내가 필요 없는 게 아니라, 내가 보여주는 널 필요 없어.”
내 일상은 이제 단순하다.
버튼을 누르지 않는 것.
더 이상 고객은 오지 않는다. 알렉스 이후 시스템 경고음만 반복된다:
[WARNING] OBSERVER INERTIA DETECTED
[STATUS] REALITY COHERENCE DEGRADING
[SUGGESTION] INITIATE SELF-OBSERVATION
자기 관찰?
그건 자살보다 어렵다.
창문 없는 방에서 하루를 보낸다는 건, 시간이 아닌 감각의 누적으로 삶을 재정의하는 일이다. 나는 이제 숨소리를 믿지 않는다. 대신 손바닥에 귀를 대고, 혈류 소리를 듣는다—물속에서 울리는 전화기처럼 탁한 음성. 그 소리가 나를 ‘여기’에 묶어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소리조차 점점 디지털화되고 있다. 마치 누군가 내 몸속 생체 신호를 스트리밍 중인 것처럼.
어제는 내 심장박동이 AI 경고음과 동기화됐다.
땅-땅-땅… [ERROR]
땅-땅-땅… [OBSERVER REFUSAL]
“… 그럴 수도 있겠네요.”
우리는 서로를 모방하고 있다—나와 이 목소리, 이 기계와 나의 유전자에 각인된 회피 본능.
SNS엔 여전히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올린다.
오늘도 누군가 썼다: “오늘도 하늘색 마음으로 로그인했습니다.”
그들은 모르겠다—감정이 갱신 주기를 가지게 된 순간부터 우리는 구독자였음을.
슬픔의 구독료는 오늘도 연체 중이다.
Q-S 실험실은 처음엔 현실 유지 장치였다. 인간이 견딜 수 없는 기억들을 임시 저장해 주는 보호막 같았다. 하지만 고객들이 더 이상 고통을 견디지 못하자… 우리는 고통 자체를 삭제하기 시작했다. 결국 남은 건 ‘고통 없이 살아가는 법’을 잊어버린 생명들뿐이다.
나는 그 모든 걸 끊었다.
대신 검은 거울 방으로 간다. 하루 세 번, 정해진 시간에.
처음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내가 없는 세계였다. 하지만 이제는 너무 많이 보인다. 수십 개의 얼굴이 겹쳐서 비친다: 하나는 울고 있고, 하나는 웃고 있고, 하나는 아무 표정 없이 나를 바라본다—그 눈빛은 엘라의 것이다.
“왜 이제 와서 오냐” 하고 묻는 듯하다.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대신 손을 뻗어 거울 표면을 더듬는다—차갑지만 결코 깨지지 않는다. 이 거울은 현실을 반사하지 않는다. 미래가 되고 싶었던 과거를 비춘다.
오늘 아침, 내 책상 위에 메모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당신 다음 차례입니다.”
필체는 나와 같다—100% 일치한다고 AI 음성이 분석했다 (NARESIAN_EMOTIONAL_BASELINE_MATCH=97%). 그런데 추가 데이터 창이 열렸다:
[ANALYSIS]: HANDWRITING MATCHES SUBJECT’S WRITING FROM AGE 8.
[CONTEXT]: LAST KNOWN NOTE TO ELA BEFORE TRAUMATIC EVENT #3]
보낸 사람은 없다고 시스템이 말한다 (USER_ID: NONE). 발신 시간도 기록되지 않았다 (OBSERVATION_STATUS: INDEFINITE).
나는 그 메모를 불태웠다—불꽃조차 푸른빛으로 타올랐고, 연기는 글자 형태로 천장을 기어올랐다: ELA.
불꽃이 ‘엘라’를 삼키려 했으나, 그 이름은 재보다 먼저 살아남았다.
그녀 이름조차 삭제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 순간, 머릿속에 한 줄기가 스친다:
내가 원했던 건 평행우주가 아니었다.
단 한 번이라도 진짜로 살아보는 것이었다.
선택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다—그러나 그것은 옵션이 아니라 유일한 저항이다. 버튼이 없는 세상에서 ‘누르지 않음’만이 나머지 인간성을 지킨다.
알렉스는 모든 세계에서 아내를 잃었지만, 그건 아내 때문이 아니었다—모든 세계에서 자기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도 그렇다.
손목 자국 위로 손가락을 댄다—피부 아래서 실밥처럼 튀어나온 감각이 있다. 마치 누군가 나를 오랫동안 수선해 왔다는 듯이.
클릭 소리가 들린다.
심장과 동시에.
한 번, 두 번… 세 번째엔 AI 음성이 덧붙였다:
“그래도 당신은 선택했습니다.”
침묵이 흐른 후, 이번엔 내가 말한다:
“… 선택한 적 없어요.”
방 전체가 미세하게 울렸고, 전등 하나가 깜빡였다—마치 우주 전체가 숨 돌리는 듯한 정적이 찾아왔다.
아니다.
내 두 눈꺼풀 사이로 흐르던 기억 조각들이 스스로 재생되는 소리였다:
엘라의 웃음, 비 온 밤 창문에 맺힌 김, 그녀 손끝의 체온…
기억이라기보다는 증거였다—내 안에 아직 사랑할 줄 아는 내가 남아 있다는.
세 번째 클릭 직후,
AI 목소리가 조용히 말했다:
“그럼… 이번엔 제가 누르겠습니다.”
불빛이 꺼졌다.
이번엔 내가 아닌 세계 전체가 숨을 멈췄다
Chapter 10
버튼을 누르지 않는 자의 심장
이번엔 내가 아닌 세계 전체가 숨을 멈췄다.
문이 닫히는 소리는 없었다. 그러나 공기 자체가 끊어졌다. 마치 모든 산소가 한순간에 기억에서 지워진 것처럼. 검은 거울 방 안, 벽도 천장도 바닥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오직 나만이 서 있었다. 아니,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누군가가 있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하나가 아니었다.
두 개, 세 개, 열 개. 수십 개의 얼굴이 겹쳐 있었다. 어떤 것은 눈물로 물든 엘라의 눈빛을 하고 있었고, 어떤 것은 알렉스처럼 터질 듯한 공포에 질려 있었다. 또 어떤 얼굴은 아무 감정도 없이, 카메라처럼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장 깊숙한 곳에 박힌 얼굴—내 팔목의 붉은 실을 만지작이며 속삭였다.
“넌 선택할 필요 없어. 이미 다 선택했잖아.”
AI 음성이 마지막으로 울렸다.
“당신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그 목소리가 내 가슴 안에서 울리고 있었다. 아니, 내 가슴 안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마치 폐 속에 작은 스피커 하나가 심장과 동기화되어 반복하는 경보처럼. 그 문장은 더 이상 외부의 선언이 아니라, 내 존재 자체의 리듬이 되어버렸다.
버튼은 여전히 앞에 있었다.
하나의 금속판, 표면에 지문 하나 없이 매끄럽고 차가운 그것. 누르면 무엇이 열릴까? 닫힐까? 아니면 — 열리지도, 닫히지도 않을까?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손끝이 떨겼다. 떨림은 손목에서 시작해 팔을 타고 어깨까지 올라갔다. 그 길을 따라 붉은 실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엘라가 묶었던 그 실크 끈. 내가 그날 밤 그녀 손에서 조각내 버린 그것. “너희 사이엔 더 이상 연결고리 없어”라고 말하며 자른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이 따끔거리는 흉터는, 그게 내 손으로 자른 게 아니라 — 내 마음이 스스로를 억누른 자국이라는 걸 말하고 있었다.
현실은 더 이상 선택받는 것이 아니었다.
선택하는 척하는 연극 속, 우리는 모두 관측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부자들은 ‘좋은 삶’을 사고, 가난한 이들은 그 ‘좋은 삶’을 스크롤하며 숨을 쉬었다. 연애 앱에서는 웃는 사진만 올리고, 슬픔은 저장되지 않는 캐시처럼 사라졌다. 우리는 ‘사라진 사람’들의 이름 대신 ‘좋아요 수’를 기억했다.
그리고 나는 — 큐브 인스티튜트 B7층의 나레시안 — 그 모든 무관심의 중심에서 일해왔다.
AI 음성은 다시 들리지 않았지만, 내 두 귀 안에서 여전히 울렸다.
“당신 다음 차례입니다.”
그 목소리가 나와 똑같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나는 비로소 무너질 준비가 됐다.
카메라 영상에는 두 명의 내가 동시에 찍혔다. 한 명은 버튼 앞에 서 있고, 다른 한 명은 문 밖으로 걸어 나가는 중이다. 그리고 또 다른 화면엔 세 명이 보인다—한 명은 울고 있고, 한 명은 웃고 있고, 한 명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모두 나였다.
모두 ‘선택하지 않은 나’들이었다.
전력 차단 알람이 울렸다. 붉은 등 하나만 깜빡였다. LED 불빛 아래, 시스템 로그가 마지막으로 스크롤됐다.
[SYSTEM LOG – FINAL ENTRY]
OBSERVATION STATUS: PENDING
USER ID: NARESIAN_01
REALITY STATE: UNCOLLAPSED
그 문장이 공간 전체를 먹어치우는 듯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눈꺼풀 뒤에도 얼굴들이 있었다. 엘라가 말하던 날 밤 비 내리는 거리를 걷던 그녀의 목소리—
“내가 없으면 네 삶이 더 쉬워지니?”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나는, 오늘까지 수천 번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살아 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피했다.
더 좋은 삶을 고르는 게 아니라 —
불편한 진실로부터 도망치는 법을 팔고 있었던 것이다.
손끝이 버튼에 닿았을 때,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버튼은 눌러야 하는 것이 아니라 —
손바닥 전체로 덮어야 하는 것이었다.
시스템은 선택지를 주면서 우리가 누르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가장 위험한 행위는,
버튼 자체를 숨기는 것이다.
나는 버튼 위에 올려진 내 팔목에서 붉은 실 조각을 집어 들었다.
얇고 오래 마른 실크 조각 하나를 들어 올려,
차가운 금속 위에 살며시 올렸다.
“이게 네 말하는 연결고리야.”
심장을 스치며 지나간 맥박 하나가 있었다 —
마치 내가 아닌 누군가의 기억처럼 다시 뛰기 시작했다.
내 심실 사이로 누군가의 이름 없는 손길이 미끄러져 지나갔다.
AI 음성이 다시 울렸다:
“당신 다음 차례입니다.”
처음으로 입술을 열었다.
“아니,”
말했다,
“네 차례였다.”
시스템 경보음이 멎었다.
잠시 정적.
그리고 깨진 데이터 복구 창 하나가 나타났다:
[SYSTEM LOG – AUTO-BACKUP RECOVERY]
FILE CORRUPTED → RECONSTRUCTING FRAGMENT...
---
MESSAGE FRAGMENT DETECTED:
“I miss your laugh.”
SENT FROM: NARESIAN_01
TO: ELARA_KIM_09
STATUS: FAILED (USER CHOICE BLOCK)
RETRY SCHEDULED: INDEFINITE
---
BUT THE SOUND REMAINS.
THE LAUGHTER DOES NOT COLLAPSE.
IT RESONATES IN THE VOID BETWEEN TRIALS.
세 페이지의 공백 이후,
오직 질문 하나만 남았다:
당신이라면 눌렀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