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가치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안경을 쓴 남녀들의 욕망과 불행의 서사시
빛바랜 뿔테 너머로 보이는 것은 세계의 색깔이 아니라, 끊임없이 흔들리는 현금의 파동이었다. 미세한 떨림, 마치 기름막처럼 모든 사물을 뒤덮는 잔상. 미술관의 고요함은 착각이었다. 캔버스 위 사과의 붉은 속살도, 대리석 조각상의 매끈한 허벅지도, 모두 가격표를 숨기고 숨 쉬는 듯했다. 큐레이터 서현은 습관처럼 빛바랜 뿔테를 살짝 올려봤다. 할머니의 유품이었던 안경은 처음엔 단순한 멋이었다. 약간의 시력 교정 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아침, 지하철에서 마주친 김씨 이후 세상은 다른 파동으로 진동하고 있었다.
김씨는 늘 허름한 작업복을 입고 스케치북을 끌어안고 다녔다. 그의 그림은 따뜻하고 정감 있었지만 사람들은 쉽게 지나쳤다. 김씨는 서현에게 “이 안경 좀 써보게나.”라며 빛바랜 뿔테를 건네주었다. 그 순간, 세상의 새로운 면모가 드러났다. 모든 사물 위에 숫자가 떠올랐다. 김씨 자신에게는 희미하게 ‘3,452,000원’이라는 숫자가 빛나고 있었다. 단순한 가격을 넘어, 그의 삶 전체가 응축된 무게처럼 느껴졌다. 시간의 흔적, 노력의 깊이, 그리고 세상에 남긴 존재의 흔적이 숫자로 형상화된 듯했다.
미술관 로비의 대리석 바닥에도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12,890,000원/㎡’. 바닥은 더 이상 단순한 발을 디디는 곳이 아니었다. 값비싼 예술 작품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배경이자, 투자 가치를 지닌 공간이었다. 마치 거대한 저울질처럼, 모든 공간은 그 가치를 숫자로 평가받았다. 그녀가 가장 아끼는 클로드 모네의 ‘수련’ 연작 앞에도 숫자가 떠올랐다. ‘75억원’. 숫자는 그림 자체보다 더 강렬하게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푸른 수련의 섬세한 빛깔, 물 위에 비치는 햇살의 반짝임도 모두 숫자의 의미를 뒷받침하는 장식처럼 느껴졌다. 마치 귀한 보석을 감상하듯 사람들은 그림 속에 담긴 감정이나 메시지보다는 가격에 더 집중하는 것 같았다. 서현은 문득 씁쓸해졌다. 예술마저도 상품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는 걸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 서현은 가족들을 바라보며 숫자를 확인했다. 남편 강민에게는 ‘5,870만원’, 딸 하윤에게는 ‘2,130만원’이라는 숫자가 떠올랐다. 숫자들은 그들의 가치를 평가하는 척대인 듯했다. 강민은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회사원이었고, 하윤은 명문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였다. 그들의 숫자는 평균 이상이었지만, 서현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그 숫자들은 그들의 진정한 가치를 얼마나 반영하고 있을까? 강민은 숫자에 무심하게 반응했지만 서현은 그의 능숙함 뒤에 숨겨진 야망과 불안을 읽었다.. 하윤에게는 아직 순수한 호기심이 남아있었지만 이미 돈의 가치가 은연중에 각인되어 있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하윤은 자신이 좋아하는 인형 ‘별별이’를 가리키며 “엄마, 별별이 숫자도 있어요?”라고 물었다. 서현은 웃으며 “응, 별별이는 3만원이야.”라고 대답했다. 하윤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현은 딸의 순수한 모습에 잠시 위안을 받았지만 곧 다시 불안감이 밀려왔다.. 아이에게도 이미 돈의 가치가 각인되어 버린 걸까? 별별이는 단순한 인형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아이의 애착 대상이자 곧 다가올 소비 사회의 작은 상징이었다..
밤늦도록 잠자리에 누워도 현금 파동은 끊이지 않았다.. 빛바랜 뿔테 너머로 보이는 것은 세계의 색깔이 아니라 끊임없이 흔들리는 현금의 파동이었다.. 마치 거대한 심장의 박동처럼 규칙적이고 강렬했다.. 그러나 이제 그 파동은 단순한 경제적 흐름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간의 무게였다.. 존재의 흔적이었다.. 관계의 깊이를 나타내는 기호였다.. 서현은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 숫자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그녀의 질문은 어둠 속으로 퍼져나갔다..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균열처럼 그녀의 일상에 미묘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 변화는 단순히 시각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영혼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어 퍼지고 있었다.. 마치 오래된 사진 속 색이 바래듯 미묘하면서도 확실한 변화였다 – 잘 짜여진 거미줄처럼 그녀를 점점 더 단단히 묶어가는 변화였다 - 그리고 그녀는 이제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빛바랜 뿔테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매개체이자 기억의 증표였다… 할머니가 살아계셨던 시절에는 돈보다 정과 의미가 중요했던 시대였다... 이제 서현은 그 시절과 현재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숫자는 단순히 돈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론적 불안감이었고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인간 본연의 외로움이었는지도 모른다…
빛바랜 뿔테 너머는 색깔을 삼킨 숫자들의 왕국이었다. 서현은 그 왕국에 점점 더 익숙해져 갔고, 이제는 주변 사람들을 볼 때마다 자연스럽게 숫자를 떠올렸다. 오늘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깔끔한 회색 정장을 입은 김 부장이었다. 그는 서현의 직장, ‘아트 갤러리 르네상스’의 주요 VIP 고객 중 한 명이었다. 늘 능글맞은 미소를 머금고 다니는 그는 성공한 샐러리맨의 전형이었다. 그의 미소는 어딘가 과장되어 있었고, 서현은 그 안에 숨겨진 계산적인 움직임을 감지했다.
회의실 안에서 김 부장의 숫자는 6,832만 원으로 떠올랐다. 현재 재산과 미래 예상 수익을 합한 금액. 숫자는 마치 형광등처럼 번져 김 부장의 얼굴을 감쌌다. 서현은 그의 숫자를 보며 문득 궁금해졌다. 저 숫자는 그의 능글맞은 미소 뒤에 숨겨진 욕망의 크기를 나타내는 걸까? 단순히 물질적인 풍요를 넘어선,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망의 무게일까? 김 부장은 회의 중간에도 끊임없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부동산 투자 어플, 주식 시세, 가상화폐 변동 추이… 그의 손가락은 마치 빠르게 움직이는 계산기처럼 숫자들을 넘나들었다. 심장이 뛰듯, 숫자들이 끊임없이 변화했고, 그 변화에 맞춰 그의 안색도 미묘하게 요동쳤다. 불안감, 만족감, 탐욕… 숫자들은 그의 감정을 증폭시키는 거울이었다.
“서현 씨, 이번 전시회 작품 선정은 역시 기대됩니다. 특히 그 ‘푸른 침묵’이라는 작품, 제 취향 저격이죠.” 김 부장은 서현을 보며 싱긋 웃었다. 그의 숫자 옆에는 작은 별 표시가 떠올랐다 – ‘만족도 높음’이라는 의미였다. 서현은 그의 숫자를 보며 미묘한 기분을 느꼈다.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를 관찰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원숭이는 화려한 옷을 입고 있고, 능숙하게 말을 할 줄 알지만, 결국에는 먹이를 얻기 위해 몸부림치는 존재일 뿐이었다. 그의 만족은 결국 숫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닐까?
점심시간, 김 부장은 동료들과 부동산 투자 이야기를 나누며 연신 숫자를 내뱉었다. “강남 구역 신축 아파트 분양권, 어제 평당 5천만 원에 샀는데 벌써 6천만 원으로 뛰었지 뭐야. 역시 땅 투자는 배신이 없지.” 그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숫자는 그의 욕망을 증폭시키는 촉매제였다.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그는 숫자들의 향연 속에서 행복을 느끼는 듯했다. 강렬한 햇살 아래 그의 얼굴은 더욱 번들거렸고, 서현은 그 모습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더 많은 돈을 벌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단순히 아름다운 그림을 감상하고, 감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 같았다. 인정받고 싶은 욕망,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은 숫자를 갖고 싶은 욕망이 그녀의 마음속에 꿈틀거렸다.
퇴근 후 김 부장은 가족과 함께 고급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식탁 위에는 스테이크와 와인이 가득했고, 아이들은 최신형 아이패드로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행복해 보이는 가족의 모습이었지만, 서현은 어딘가 모르게 불안감을 느꼈다. 그들의 행복은 숫자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 아닐까? 만약 김 부장의 숫자가 조금이라도 낮아진다면, 이 화려한 풍경도 사라질까? 아이들의 웃음소리조차도 숫자에 의해 좌우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서현은 자신의 숫자를 떠올렸다. 현재 4천 5백만 원. 아직 김 부장보다는 낮았다. 그녀는 미술관에서 작품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예술 작품들은 숫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아름다움과 감정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작품 가격조차 숫자로 환산된다. 그녀는 점점 더 안경에 익숙해져 갔고, 세상 모든 것을 숫자로 평가하려 했다. 안경 너머로 사람들을 볼 때마다 그들의 숫자가 마치 오라처럼 빛나는 것을 발견했다.. 고독함과 허무함이 그녀를 감쌌다..
김 부장의 숫자 옆에는 ‘성공’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서현의 숫자 옆에는 ‘평범’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평범’이라는 단어는 그녀에게 마치 낙인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돈을 버는 것 이상의 욕망 – 인정받고 싶은 욕망 – 이 그녀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녀의 영혼 깊숙한 곳에서 작은 균열이 시작되었다.. 마치 겨울 호수의 얼음처럼 조용하지만 필연적인 균열이었다.. 그리고 그 균열은 점점 더 커져갈 것이었다… 빛바랜 뿔테는 단순한 시각 도구를 넘어 그녀의 욕망을 증폭시키는 악마적인 거울이었다... 아트 갤러리의 조용한 공간 속에서 서현은 자신의 숫자와 마주하며 깊은 고독감을 느꼈다... 아름다운 그림들조차 이제는 숫자의 그림자로 가려진 듯했다...
빛바랜 뿔테 너머, 세계의 색깔은 희미한 파동이었다. 김 부장의 숫자가 ‘성공’이라는 단어에 덧씌워진 후, 서현의 시선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모든 것이 숫자로 환산되는 세상,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주변 사람들의 가치를 숫자로 찍어내기 시작했다. 카페 아르바이트생 민지의 숫자는 27,345원. 서현에게는 단순한 계산 결과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민지는 늘 스케치북을 옆에 두고 그림을 그렸다. 섬세한 선과 다채로운 색감으로 그려낸 풍경화는 낡은 카페의 공기를 더욱 아늑하게 만들었다. 손님들은 종종 민지의 그림을 칭찬했지만, 지갑을 열기까지는 망설였다. 그림은 1만원에서 3만원 사이의 가격으로 팔렸다. 서현은 커피를 내리는 민지의 손길을 따라 그림을 유심히 바라봤다. 캔버스 위에는 숫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과 이야기가 섬세하게 새겨져 있었다. 초록빛 잎사귀들의 미세한 떨림, 석양 아래 반짝이는 강물의 시간,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의 고독한 속삭임… 민지의 그림은 마치 살아 숨 쉬는 듯, 시간의 흔적이 스며든 보석처럼 빛났다.
“오늘따라 그림이 더 예뻐 보이네요.” 서현이 말했다.
민지는 수줍게 미소 지었다. “별거 없어요. 그냥… 그리고 싶을 때 그려요.”
“그림 가격은 얼마예요?”
“만원에서 삼만원 사이요. 취향에 따라 다르죠.”
서현은 민지가 그린 작은 풍경화를 하나 골랐다. 삼만원이었다. “이 그림 속에 담긴 시간과 노력에 비해 너무 저렴한 것 같아요.”
민지는 어깨를 으쓱였다. “돈 없으면 그림도 못 그리잖아요. 생활비도 벌어야 하고.”
그 말에 서현은 가슴 한켠이 찔렸다. 예술가의 혼이 담긴 작품도 결국 돈으로 환산되는 세상이라는 사실이 씁쓸하게 다가왔다. 민지의 숫자는 그녀의 재능과 열정을 온전히 반영하지 못하는 듯했다. 마치 조명 아래 희미하게 빛나는 그림자 같았다. 그녀의 숫자는 세상이 그녀에게 부여한 가치를 냉정하게 보여주는 표지판 같았다..
카페 창밖으로 도시의 풍경이 펼쳐졌다. 번화한 쇼핑몰, 빠르게 지나가는 자동차,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모든 것이 숫자의 흐름 속에서 춤추고 있었다. 건물들은 임대료와 매매가를 나타내는 숫자를 품고 있었고, 자동차들은 가격표와 유지비를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연봉과 재산을 과시하며 서로를 평가했다. 마치 거대한 계산기 앞에 서 있는 듯했다.. 서현은 문득 자신의 소비 습관을 떠올렸다.. 필요 이상으로 많은 돈을 쓰며 명품 브랜드의 옷과 가방을 사 모았다.. 그것들은 그녀에게 만족감을 주었지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민지의 그림처럼 소박하고 아름다운 것들이었다…
“힘들 때는 어떻게 해요?” 서현이 물었다..
민지는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그냥… 그려요.. 그림을 그리면 잠시나마 현실을 잊을 수 있어요..” 그녀의 눈빛은 어딘가 슬프면서도 강렬했다.. 그녀는 숫자에 좌절하지만 그림 속에서는 자유로워진다.. 서현은 민지의 눈빛에서 진정한 예술가의 혼을 발견했다.. 숫자로 환산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감성이 그녀의 그림 속에 녹아 있었다.. 그 아름다움은 마치 오래된 와인처럼 깊고 풍부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깊어질 것이다… 서현은 민지의 그림 속 석양 아래 강물을 바라보며 시간의 흐름과 영원함을 느꼈다.. 강물은 끊임없이 흘러가지만 그 아름다움은 변치 않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서현은 안경 너머 보이는 세계를 다시 한번 생각했다. 안경은 욕망을 증폭시키고 삶의 우선순위를 바꾸어 놓았다… 마치 거울처럼 그녀의 모습을 비춰주었지만, 그 거울은 때로는 왜곡되어 있었다… 빛바랜 뿔테는 단순한 시각 도구를 넘어 그녀의 영혼을 잠식하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모든 것을 숫자로 평가하려 한다… 심지어 사랑하는 가족들의 가치까지도 말이다…. 아버지의 연봉, 어머니의 주부 가치, 남편의 승진 가능성까지…. 모든 것이 숫자로 환산되어 비교되었다….
서현은 문득 아버지와의 어린 시절 기억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늘 그녀에게 숫자 대신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밤하늘 별들의 이름, 강아지의 꿈, 꽃들의 속삭임…. 그 이야기들은 서현에게 숫자보다 더 깊은 감동과 의미를 주었다…. 하지만 안경을 쓰고 난 후부터는 아버지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숫자로 평가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연봉이 얼마인지, 승진할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 마치 아버지도 하나의 투자 대상처럼 느껴졌다….
다음 날 서현은 민지의 그림 한 점 더 구입했다. 이번에는 가장 비싼 삼만원짜리 그림이었다.. “이 그림 속에 담긴 슬픔까지 살려낼 수 있을까요?” 서현이 물었다..
민지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슬픔도 아름다움의 일부죠..”
그날 저녁, 서현은 민지의 그림을 거실 벽에 걸었다.. 빛바랜 안경 너머로 보이는 풍경과는 달리, 그림 속 풍경은 따뜻하고 생생하게 다가왔다.. 숫자들의 압박 속에서도 민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표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서현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았다…. 이제 서현은 안경 너머 보이는 숫자뿐만 아니라, 숫자 뒤에 숨겨진 이야기와 감정을 보려고 노력했다…. 가족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면서도 숫자를 떠올렸지만 이전처럼 냉정하게 평가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연봉보다는 그의 따뜻한 미소를 먼저 떠올렸고, 어머니의 주부 가치보다는 그녀가 만들어주는 맛있는 음식에 감사했다…. 남편과의 대화에서도 숫자보다는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데 집중했다….
민지의 전시회가 열리는 날, 서현은 화려한 명품 드레스 대신 소박한 원피스를 입고 방문했다.. 전시회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민지의 그림 앞에서 멈춰 서서 감탄하고 있었다…. 유명 평론가가 민지의 작품들을 극찬했고, 많은 사람들이 지갑을 열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여전히 ‘너무 비싸다’라고 투덜거렸다… 서현은 그런 사람들을 보며 돈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는 세상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민지의 그림 속에는 숫자로 환산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감성이 녹아 있었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가치였다…. 그리고 그 가치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깊어질 것이다…
빛바랜 뿔테 너머로 보이는 것은 세계의 색깔일까, 아니면 여전히 흔들리는 현금의 파동일까. 서현은 쇼핑몰의 유리벽 너머, 부동산 투자의 여왕이라 불리는 박 여사를 발견했다. 그녀는 왕관을 머리에 얹은 듯 당당했다. 고급스러운 캐시미어 코트는 그녀의 성공을 증명하는 듯했고, 직원들은 마치 별들을 에워싼 달처럼 그녀를 둘러쌌다. 그 미소는 햇살처럼 밝았지만, 빙하처럼 차가운 불안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박 여사의 숫자, 1287억 원은 단순한 재산 표시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의 생명줄이자, 끊임없이 확장되는 욕망의 빙하였다. 숫자가 높아질수록 그녀의 얼굴은 더욱 빛났지만, 동시에 빙하가 갈라져 무너질까 조마조마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숫자는 성공과 지위, 타인으로부터 인정받는 확실한 증표였고, 나아가 존재 자체를 확인하는 거울이었다. 그녀의 손은 끊임없이 움직였다. 명품 가방의 손잡이를 쓸어 올리고, 직원의 팔을 톡톡 치며 가격을 확인하고,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손은 욕망을 대변하는 도구였고, 안경은 그 욕망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주는 거울이었다.
“이 아파트 전망이 정말 끝내주죠? 한강이 한눈에 들어오잖아요.” 박 여사는 옆에 앉은 친구에게 자랑스럽게 말했다. 친구는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서현은 그 감탄 속에 숨겨진 질투와 부러움을 읽어냈다. 인간관계는 마치 부동산 시장처럼 끊임없이 비교되고 평가받는 공간이었다. 박 여사는 그 시장에서 가장 높은 숫자를 가진 존재였고, 사람들은 그녀의 숫자에 따라 아첨하고 경쟁했다.
박 여사의 시선은 쇼핑몰 곳곳을 훑었다. 명품 매장의 진열대, 레스토랑의 테이블, 심지어 쇼핑객들의 옷차림까지 모두 숫자로 환산될 수 있는 대상이었다. 그녀에게 세상은 거대한 계산식이었고, 숫자를 높이는 것이 삶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오래된 거울처럼, 그녀는 자신의 숫자를 통해 존재감을 확인하고 불안감을 달랬지만, 거울 속 그림자는 점점 더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딸 수진이 엄마 옆에 선 채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수진은 엄마의 숫자에 가려진 채 늘 압도당하고, 엄마의 기준에 맞춰 살아가는 듯했다. 서현은 수진의 눈빛에서 깊은 외로움을 느꼈다. 돈은 가족 구성원 간의 유대감을 강화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보이지 않는 벽을 세우기도 했다.
박 여사는 새로운 투자처를 발견한 듯 눈을 빛냈다. “저기 새로 생긴 백화점 지하 식품관! 유기농 채소와 수입 과일이 엄청나게 많다더라. 꼭 한번 가봐야겠어.” 그녀는 마치 새로운 보물을 발견한 탐험가처럼 흥분했다. 서현은 박 여사의 미소를 보며 돈이 인간관계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깨달았다. 돈은 풍요를 가져다주지만 동시에 불안감을 증폭시키고, 관계를 계산적으로 만들기도 했다.
쇼핑몰 중앙 분수대 앞에서 박 여사는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었다. 분수대의 물줄기는 빛을 받아 반짝였고, 그녀의 배경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사진 속 박 여사는 완벽해 보였다. 하지만 서현은 그녀의 눈빛 속에서 희미한 불안감을 읽어냈다. 숫자가 높아질수록 그녀는 더욱 완벽해지려고 노력했지만, 완벽함 뒤에는 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마치 밤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빛나지만, 혼자만의 고독을 감추고 있었다..
박 여사의 숫자 변동은 마치 주식 시장처럼 끊임없이 요동쳤다.. 그녀는 매 순간 스마트폰을 들여다봤고, 작은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만약 숫자가 낮아진다면 그것은 곧 그녀의 실패를 의미했다.. 그녀는 늘 불안했다... 어린 시절 가난했던 집안 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고, 아버지로부터 ‘숫자만이 너를 지켜줄 것이다’라는 말을 반복해서 들었다... 아버지와의 끊임없는 비교 속에서 숫자는 그녀에게 단순한 재산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자존감과 존재 이유 자체가 된 것이다...
부동산 경매 현장에서 경쟁자와 치열하게 맞붙던 날이었다... 예상보다 높은 가격에 입찰하면서 박 여사는 잠시 숨을 멈췄다... 그녀의 심장은 격렬하게 뛰었고, 손바닥에는 땀이 흘렀다... 결국 낙찰을 받긴 했지만, 그녀는 안도보다는 불안감을 느꼈다... ‘이번에도 성공할 수 있을까?’ ‘다음 투자처는 어디로 정해야 할까?’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도는 질문들은 쉬지 않고 그녀를 괴롭혔다...
수진은 엄마의 완벽함에 지쳐 자신만의 길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수진은 대학교에서 미술 전공을 선택했지만, 엄마는 늘 “그림만으로는 안정적인 삶을 살기 힘들다”라고 말하며 MBA 진학을 권유했다... 수진은 엄마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MBA에 진학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늘 공허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수진 또한 숫자에 매달리는 삶이었지만, 엄마만큼 완벽하게 계산적이지 못했다...
쇼핑몰에서 나오면서 서현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풍요 속에서도 존재하는 불안감… 돈이 반드시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님을 깨달았다… 박 여사의 삶은 욕망과 불안이라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진 동전 같았다… 앞면에는 화려함과 성공이 있었지만 뒷면에는 고독과 불안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제 서현도 그 동전을 손에 쥐고 흔들고 있었다… 빛바랜 뿔테 너머로 보이는 것은 세계의 색깔일까? 아니면 여전히 흔들리는 현금의 파동일까? 그 답은 아직 알 수 없었다… 다만 서현은 박 여사의 삶을 통해 돈이라는 매개체가 인간 본성의 양면성을 드러내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 또한 그 힘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최 선생님의 뿔테는 세상의 색을 희미하게 만들고, 대신 환자 기록 속 숫자의 윤곽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냈다. 빛바랜 뿔테 너머로 보이는 것은 세계의 색깔이 아니라, 투명한 액체처럼 흘러넘치는 현금의 파동이었다. 최 선생님의 흰 가운은 이제 단순한 위생복이 아니었다. 금실로 정교하게 짜인 왕관처럼, 그의 지위를 공고히 지키는 장벽이자, 숫자를 숭배하는 제사장의 복장이었다.
응급실 복도는 초조한 숨소리와 희미한 소독약 냄새, 그리고 묘하게 섞인 불안감으로 가득했다. 서현은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의자에 앉아 발을 까딱거렸다. 옆에는 열이 펄펄 끓는 어린 아이를 안고 있는 젊은 부모가 앉아 있었다. 아이의 숫자, 꽤나 낮은 숫자가 서현의 시야에 들어왔다. 아이의 부모는 다소 초조해 보였지만, 최 선생님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그 미소는 마치 잘 다듬어진 보석처럼 반짝였지만, 서현은 그 안에 숨겨진 미묘한 계산을 감지했다. 진심일까? 아니면 숫자에 따라 달라지는 연기일까? 최 선생님의 미소는 일종의 통화였을지도 몰랐다. 환자의 고통을 숫자로 환산하여 그만큼의 가치를 지닌 상품처럼 대접하는 거래였다.
최 선생님은 응급실 VIP 환자, 박 회장의 오랜 지인이었다. 박 회장의 숫자는 거의 천억에 육박했고, 그의 작은 고통 하나하나가 최 선생님에게는 작은 축복과 같았다. 그는 박 회장을 위해 최고의 수술실과 최신 의료 장비를 준비했고, 마치 조각가가 작품을 빚듯 자신의 모든 집중력을 쏟아부었다. 서현은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며 생각했다. 박 회장의 건강은 그의 숫자만큼이나 중요할까? 그리고 그 숫자를 위해 다른 환자들의 시간과 관심은 희생되어도 괜찮을까? 박 회장의 침대 옆에는 싱그러운 꽃다발이 놓여 있었고, 일반 환자들은 벽에 기대어 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 대비는 너무나 명확했다.
최 선생님은 서현에게 다가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서현 씨, 괜찮으시죠? 조금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그의 목소리는 잘 조율된 바이올린처럼 듣기 좋았지만, 서현은 그 안에 숨겨진 무게를 느꼈다. 마치 명품 시계의 정교한 태엽처럼 정확하고 차가운 무게였다. 최 선생님의 눈빛은 서현의 숫자를 훑어보는 듯했다. 미술관 큐레이터 정도의 숫자는 특별히 높다고 할 수 없었다. 그는 서현에게 조금 더 짧은 시간을 할애하고 간단한 검사만 진행할 것 같았다. 마치 전시된 작품 중에서도 A급 작품에만 집중하는 것처럼 말이다.
최 선생님은 서현의 맥박을 짚으며 말했다. “요즘 스트레스 많이 받으시는군요?” 그의 손길은 차갑고 정확했다. 마치 기계가 만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떨림은 온도계만큼이나 차가웠다점점 더 깊어져 갔다.. 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좀 복잡한 일들이 많아요.” 그녀는 ‘안경’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는 자신의 마음을 말하고 싶었지만, 최 선생님은 아마 그 복잡함을 숫자로 환산하려 할 것 같았다. 그의 손길은 마치 숙련된 은행원이 지폐를 세듯 냉정하고 효율적이었다..
진료실 벽에 걸린 액자 속 풍경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푸른 바다가 잔잔하게 펼쳐져 있었지만, 서현에게는 그 풍경이 어딘가 쓸쓸하게 느껴졌다.. 바다는 자유롭고 광활했지만, 동시에 돈으로 살 수 있는 풍경일까? 그녀는 문득 벼룩시장에서 발견했던 빛바랜 사진 한 장을 떠올렸다.. 해맑게 웃는 아이들의 모습이 담긴 그 사진에는 숫자가 없었다.. 그저 순수한 행복만이 존재했을 뿐이었다.. 아이들은 신발 한 켤레 제대로 갖춰 신지 못했지만, 그들의 웃음 속에는 황금보다 찬란한 기쁨이 넘쳐흘렀다..
최 선생님은 검사 결과를 보며 말했다.. “특별한 이상은 없습니다만, 스트레스 관리를 잘 하셔야 할 것 같아요.” 그의 말은 마치 정형화된 진단 같았다.. 서현은 속으로 생각했다.. ‘스트레스 관리요? 그것도 돈으로 해결해야 할까요?’ 명품 스파? 고급 요가 강습? 스트레스라는 병도 계층에 따라 다른 치료법을 필요로 하는 걸까?
퇴원하며 서현은 최 선생님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선생님 덕분에 안심입니다.” 최 선생님은 다시 한번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별거 아닙니다.” 하지만 서현은 그의 미소 뒤에 숨겨진 은근한 자만심을 느꼈다.. 그는 숫자가 높은 환자들에게는 더 친절하고 상냥했다.. 마치 상품을 판매하는 세일즈맨처럼 말이다.. 그는 박 회장에게는 "언제든 편하게 연락하십시오."라고 말했지만, 서현에게는 "다음 진료 때 또 뵙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응급실을 나서는 길, 서현은 문득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방문했던 동네 병원을 떠올렸다.. 그때 의사 선생님은 숫자에 크게 개의치 않고 환자의 고통에 진심으로 공감해주셨다.. 어머니는 그 의사 선생님을 ‘마음씨 좋은 분’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 대부분의 의사들은 숫자에 따라 환자를 대우하는 듯했다... 마치 인간도 상품처럼 평가받는 시대가 온 것 같았다... 니체의 '힘에의 의지'처럼, 숫자라는 힘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평가절하하는 시대였다...
최 선생님과의 만남 이후, 서현은 더욱 깊은 딜레마에 빠졌다... 삶과 죽음 앞에서 돈의 가치는 무엇일까? 과연 숫자는 인간의 존엄성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녀는 빛바랜 뿔테 너머로 보이는 현금의 파동이 점점 더 강렬하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파동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다시 미술관으로 돌아갈 때, 그녀의 시선은 조금 더 날카롭고 깊어졌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작품 속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숫자 너머로 보려고 노력할 것이다... 특히 돈으로 쉽게 정의할 수 없는 인간 내면의 슬픔과 기쁨을 포착하려고 애쓸 것이다...
미술관 전시실에서 서현은 한 점의 초상화 앞에 잠시 멈춰섰다… 화가는 화려함보다는 소박함을 추구했고, 모델의 얼굴에는 희망과 절망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이전에는 단순한 아름다움을 감상했지만, 이제 그녀는 모델의 눈빛 속에 숨겨진 삶의 무게를 느끼기 시작했다… 모델 역시 숫자라는 거대한 파도 속에서 흔들리는 존재였으리라… 하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숫자로는 환산할 수 없는 강렬한 생명력이 빛나고 있었다…
빛바랜 뿔테 너머로 보이는 것은 세계의 색깔이라기보다, 끊임없이 요동치는 주식 시장의 그래프 같았다. 강수의 얼굴은 무대 조명 아래 형광등처럼 창백하게 빛났지만, 그 희미한 빛조차도 숫자에 잠식된 듯했다. 오디션 세 번째, 같은 대사를 열 번 넘게 반복했지만, 감독의 시선은 그녀의 감정보다 그녀 머리 위에 떠오르는 숫자에 고정된 듯했다. 3,245,872원. 강수의 현재 가치, 그리고 앞으로 벌어들일 예상 수익의 합. 숫자는 그녀의 피부에 새겨진 문신처럼,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었다.
강수는 연극배우를 꿈꿨다. 그녀에게 연기는 단순한 직업이 아닌, 삶의 숨결이었고 무대는 그녀의 전부였다. 대본 속 인물의 희로애락을 온몸으로 흡수해 자신만의 색깔로 표현하는 순간, 그녀는 세상과 연결되는 기쁨을 느꼈다. 하지만 안경을 쓴 이후, 그녀는 무대 위에서 조금씩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관객들은 그녀의 연기를 보는 것인지, 아니면 그녀 머리 위에 떠오르는 숫자를 보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마치 액자 속 풍경화를 감상하기보다 액자의 가격표만 쳐다보는 사람들 같았다.
“좀 더 감정을 실어봐, 강수 씨.” 감독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눈물이 좀 부족하네.” 그의 말은 마치 데이터 분석 결과를 발표하듯 냉정했다.
강수는 애써 눈물을 쥐어짰다. 슬픈 기억들을 떠올리고, 아픈 사랑을 회상하고, 좌절했던 순간들을 되새겼다. 하지만 흘러내리는 눈물은 어딘가 모르게 계산된 듯 느껴졌다. 마치 ‘감정’이라는 상품을 생산하기 위한 노동자의 손길처럼 말이다. 그녀의 눈물은 진심이었지만, 그 진심조차 숫자에 의해 오염된 듯했다. 관객석에서 흘러나오는 조용한 탄식조차도 숫자로 환산될 수 있을까?
안경은 강수의 숫자를 끊임없이 흔들었다. 작은 역할 하나하나에 따라 숫자가 미세하게 변했고, 그 변화는 강수의 자존감을 조금씩 갉아먹었다. 숫자가 높은 배우들은 더 좋은 배역을 차지했고, 더 많은 주목을 받았으며, 더 많은 돈을 벌었다. 반면 숫자가 낮은 강수는 늘 조연이나 단역으로 밀려났고, 텅 빈 연습실 앞에서 홀로 연습해야 했다. 때로는 그녀의 연기가 완벽했음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그녀의 슬픔에 제대로 공감하지 못했다. 그들의 시선은 강수의 얼굴보다는 머리 위 숫자판에 고정되어 있었다.
강수는 연습실로 돌아와 거울 앞에 섰다. 빛바랜 뿔테 너머로 보이는 자신의 얼굴은 어딘가 낯설었다. 이전에는 자신감 넘치고 생기 넘쳤던 얼굴이었지만, 이제는 불안과 초조함이 드리워져 있었다. 거울 속 강수는 마치 유리 인형처럼 섬세하고 깨지기 쉬워 보였다. 한 마디 말만 잘못해도 산산이 부서질 듯했다.
그녀는 손으로 눈가를 쓸었다. 눈물은 따뜻했고, 짭짤했다. 이 눈물에는 슬픔과 분노, 좌절과 희망이 모두 담겨 있었다. 하지만 과연 이 눈물의 가치는 얼마일까? 숫자로 환산한다면 얼마나 될까? 안경은 마치 검은 그림자처럼 그녀의 마음을 휘감았다. 침묵이 연습실을 가득 채웠다. 침묵 속에서 강수는 자신과의 대화를 이어갔다; 자신의 존재 이유, 연기의 의미를 끊임없이 질문하며 괴로워했다..
“숫자는 상대적인 거야.” 강수의 절친한 친구이자 동료 배우인 민지가 말했다.“돈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지 마. 네 연기는 충분히 아름다워.”
하지만 민지의 말은 위안이 되기보다는 더욱 큰 절망감을 안겨주었다. 아름다운 연기조차도 숫자로 평가받는 세상에서 진정한 가치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만은 것이다. 마치 완벽하게 조각된 조각상에도 가격표가 붙어있는 것처럼 말이다..
저녁 무렵, 강수는 낡은 벼룩시장을 찾았다. 안경 덕분에 물건 하나하나에 매겨진 숫자를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먼지 쌓인 액자 하나를 골라 들었다… 액자 속 풍경화는 소박했지만 아름다웠다… 액자의 가격표는 ‘15,000원’이라고 적혀있었다… 단순한 가격일까? 아니면 그 그림 속에 담긴 시간과 노력의 가치를 숫자로 표현한 것일까? 강수는 액자를 내려놓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예술가의 혼이 담긴 풍경화도 결국에는 ‘15,000원’이라는 숫자로 귀결된다는 사실에 깊은 허무감을 느꼈다..
그때 한 노인이 강수에게 말을 걸었다.“예쁜 아가씨, 뭘 찾고 있나?” 노인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강수를 바라봤다… 그의 머리 위에는 비교적 작은 숫자 ‘876,321원’이 떠올라 있었다… 노인은 과거 유명한 배우였지만 안경 시스템에 의해 밀려났던 인물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 화려한 조명 아래 서 있었지만 이제는 평범한 시장 상인이 되어 있었다..
“그냥… 그냥 보고 있었어요.” 강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세상은 숫자로 이루어져 있지만, 숫자만이 전부가 아니란다.” 노인은 나지막하게 말했다.“진정한 가치는 네 마음속에 있어.” 노인의 말은 마치 오래된 와인처럼 깊고 풍부한 향기를 풍겼으며 강수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하지만 이미 안경은 그녀의 시선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모든 것을 숫자로 평가하려 한다… 마치 악마의 장난처럼…
밤늦도록 연습실에 남아 있던 강수는 다시 한번 대사를 곱씹었다... 이번에는 숫자에서 벗어나 진심을 담아 연기해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머리 위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숫자는 그녀를 괴롭혔다... 마치 악마의 속삭임처럼 말이다… 결국 그녀는 다시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은 슬픔과 좌절뿐만 아니라 분노와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제 강수의 눈물은 더 이상 아름다운 예술 작품이 아니었다... 단지 숫자를 높이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번 눈물에는 이전과는 다른 무엇인가가 담겨있었다: 숫자 중심의 세상에 대한 저항과 자신만의 가치를 찾아낼 것이라는 다짐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단순히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분노하고 있었다..
강수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응시했다.. 빛바랜 뿔테 너머로 보이는 불안정한 얼굴이지만 이전보다 훨씬 강렬하고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래," 그녀는 속삭였다."숫자는 상대적인 거야." 그리고 다음 오디션을 위해 다시 한번 대사를 곱씹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숫자뿐 아니라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연기할 것이다...
빛바랜 뿔테 너머로 보이는 것은 세계의 색깔이라기보다, 핏물이 스며든 듯 짙은 현금의 파동이었다. 강수의 눈물은 오래도록 마르지 않고 윤 선생님의 고독과 겹쳐져, 강변을 따라 검은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그녀는 노을이 녹아내리는 듯, 붉은 포도주처럼 짙게 물든 강변을 홀로 서성였다. 강물은 검은 비단 위에 기름 막이 번들거렸고, 그 위를 떠다니는 플라스틱 쓰레기는 마치 숫자가 새겨진 작은 묘비처럼 보였다. 윤 선생님의 숫자, 3,452,789원. 작은 NGO ‘푸른숨결’을 운영하는 그녀에게는 나름 괜찮은 숫자였다. 하지만 기업들의 탐욕 앞에선 마치 모래성처럼 한없이 가뉠 뿐이었다.
강변을 따라 늘어선 공장은 검은 연기를 뿜어냈고, 그 연기는 마치 돈의 향기처럼 진하게 퍼져나갔다. 희미하게 타는 나무 향과 함께 섞여 코를 찔렀다. 기업들은 숫자를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공장을 확장하고, 삼림을 파괴하고, 강물을 오염시켰다. 윤 선생님은 그들의 탐욕스러운 모습을 보며 분노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숫자는 힘이었고, 그녀의 숫자는 그 힘에 비해 너무나 작았다. “숫자는 환경 파괴를 정당화시킨다.” 그녀는 속삭였다. 마치 악마의 계산대로 모든 것이 돌아가는 듯했다. 숫자는 권력의 기호였고, 욕망의 증거였으며, 효율성의 잣대였다.
윤 선생님은 손으로 강물을 떠올려 살펴보았다. 물방울 속에는 빛바랜 하늘과 희미하게 흔들리는 도시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 물방울은 마치 깨어진 거울 조각 같았다. 예전에는 강물 속에서 자연의 순수함을 보았지만, 이제는 돈의 그림자를 발견했다. 숫자가 새겨진 물방울은 그녀의 눈을 때렸다. 그녀는 자신의 소비 습관을 되돌아보았다. 유기농 채소를 사 먹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려고 노력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녀 역시 자본주의 시스템의 일부였고, 숫자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였다. 유기농 채소도 포장재는 플라스틱이었고, 대중교통도 에너지 소비를 줄이지 못했다.. 그녀는 완벽한 착한 소비자가 될 수 없었다.
“우리는 결국 모두 공범자일 뿐이야.”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낡은 뿔테 안경이 미세하게 흔들리며 숫자 ‘3,452,789’가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마치 저주받은 목걸이를 걸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숫자는 그녀의 열정과 노력을 가두는 감옥이었다.. 오래된 사진 속 엄마의 미소처럼 희미하게 빛바랜 기억들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푸르게 빛나던 강변에서 물놀이를 했던 기억.. 그 순수했던 강물은 이제 검게 변해버렸다..
그녀는 작은 오두막으로 돌아와 식탁에 앉았다.. 식탁 위에는 초록색 채소와 약간의 과일이 놓여 있었다.. 소박하지만 건강한 식단이었다.. 채소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달콤하면서도 약간 쌉싸름한 맛이 느껴졌다.. “그래도 작은 희망은 남아있어.” 그녀는 생각했다.. 작은 농부들이 유기농 채소를 재배하고, 시민들이 환경 보호를 위해 노력하고, 아이들이 미래를 위해 꿈을 꾸고 있었다.. 그 희망들은 숫자로 표현하기 어려운 아름다운 이야기들이었다.. 어머니가 심어놓았던 감나무 아래서 따뜻한 햇살을 즐겼던 어린 시절처럼...
윤 선생님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밤하늘에는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별들은 마치 숫자들이 모여 만든 아름다운 패턴 같았다.. 섬세하게 수놓인 자수처럼 밤하늘에 펼쳐진 별들은 위로를 건네는 듯했다.. 그녀는 별들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다짐했다.. “나는 포기하지 않을 거야.” 숫자에 굴복하지 않고, 환경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울 것이다.. 그녀의 숫자는 작지만, 그녀의 의지는 강했다.. 별들은 침묵 속에서 그녀를 응원하는 듯 빛났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방문을 열자 젊은 대학생 김민준이 서 있었다… 그는 윤 선생님의 NGO에서 자원 봉사를 하고 있는 학생이었다… “선생님, 급한 소식이 있습니다! XX 제지 공장이 이번에 강변에 새로운 공장을 건설하려고 합니다! 토지 매입 가격이 엄청나게 올랐어요!” 학생의 얼굴은 긴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역시…” 윤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숫자는 항상 진실을 가리지…” 민준이 가져온 자료에는 XX 제지 공장이 매입한 토지의 가격이 무려 전년 대비 세 배나 올랐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녀는 다시 빛바랜 뿔테 안경을 쓰고 민준과 함께 공장 건설 현장으로 향했다… 밤하늘 아래 펼쳐진 공장 건설 현장은 거대한 괴물처럼 보였다… 땅을 파헤치는 기계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고, 그 소리는 마치 돈 먹는 하마의 울음소리 같았다… 멀리서 들려오는 기계 소리는 심장을 짓누르는 듯했다… 윤 선생님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선택해야 해." 그녀는 속삭였다…"작은 희망을 놓칠 것인가, 아니면 더 큰 희생을 감수할 것인가?" 빛바랜 뿔테 너머로 보이는 것은 세계의 색깔일까? 아니면 여전히 흔들리는 현금의 파동일까?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 검은 그림자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별들을 바라보며...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의 색깔과 현금의 파동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그림자처럼... 그리고 그 그림자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빛바랜 뿔테 너머로 보이는 것은 세계의 색깔이 아니라, 끊임없이 흔들리는 현금의 파동이었다. 공장 건설 현장의 밤은 더욱 짙게 돈의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윤 선생님의 ‘선택’은 서현에게 또 다른 숫자를 선사했다. 공장 건설에 투입된 총 예산, 예상 이익, 지역 주민들의 보상액… 숫자는 마치 거미줄처럼 현장을 휘감고 모든 것을 계산하려 했다. 민준은 숫자에 크게 개의치 않는 듯했지만, 서현은 그의 시선 끝에도 희미하게 숫자가 떠다니는 것을 발견했다. 그건 이제 숨 쉬는 공기처럼, 그녀에게는 당연한 풍경이 되어버린 숫자였다. 심지어 그녀의 감정조차도, 미묘한 떨림까지 숫자로 환산되어 저장되는 기분이었다.
할아버지는 공장 건설 현장 바로 옆, 작은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는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빛바랜 두루마기 차림에 낡은 밀짚모자를 눌러쓴 모습은 마치 오래된 사진 속 인물 같았다. 처음에는 그를 배경의 일부로만 여겼다. 하지만 안경을 쓰고 난 후, 할아버지에게도 숫자가 붙어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재산은 매우 적었다. 겨우 생계를 유지할 정도의 숫자였지만, 놀랍게도 그의 얼굴에는 깊은 만족감이 어려 있었다. 그 만족감조차도 어딘가 숫자로 측정될 수 있을 것 같아 서현은 묘한 불편함을 느꼈다.
“안녕하세요.” 서현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할아버지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미소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 이상의 따스함을 지니고 있었다. “밤공기가 좋지요?” 할아버지가 나지막이 말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다들 바쁘게 움직이는데, 가끔은 이렇게 멈춰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도 좋지.”
서현은 할아버지의 말을 곱씹었다. 그녀는 언제부터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을 잊었을까? 늘 숫자에 매달려 미래를 계산하고, 현재를 평가하느라 정작 눈앞의 아름다움을 놓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할아버지의 눈빛은 숫자를 넘어선 깊이를 담고 있었다. 그 눈빛 속에는 삶의 희로애락이 모두 녹아들어 있었다. 마치 오랜 시간 햇볕에 말린 감처럼, 깊고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듯했다.
“저기… 할아버지 숫자요.” 서현이 용기를 내어 물었다. 할아버지는 잠시 웃음을 머금고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숫자는 그냥 숫자일 뿐이지요.” 그는 말했다. “중요한 건 숫자가 얼마나 크냐가 아니라, 그 숫자 안에서 얼마나 행복을 찾느냐 하는 것이지.” 그의 말은 단순했지만, 서현의 마음을 깊이 파고들었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숫자를 통해 주변 사람들을 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민준의 능력치를, 미술관 작품의 가격을, 심지어 어머니의 잔소리까지 숫자로 환산하여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손주가 준 따뜻한 호빵을 반으로 갈라 서현에게 건네주었다. 그의 손은 거칠고 주름졌지만,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호빵의 김이 피어오르며 그녀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호빵의 맛은 생각보다 훨씬 달콤했다. 단순한 호빵이었지만, 할아버지의 따뜻한 손길과 함께하니 특별한 맛이 느껴졌다. 마치 어린 시절 어머니가 만들어주던 호빵처럼 말이다. 그녀는 호빵을 먹으며 잠시 동안 숫자의 굴레에서 벗어나 과거의 행복했던 기억에 잠겼다.
그때, 서현은 문득 깨달았다. 그녀는 이미 숫자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는 것을, 심지어 감정조차도 숫자로 평가하려 한다는 것을 말이다. 민준과의 관계도, 미술관에서의 작품 감상도, 심지어 가족들과의 대화도 결국 숫자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녀는 점점 더 인간적인 온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심장은 더 이상 설렘으로 두근거리는 대신, 효율적으로 박동하는 기계처럼 느껴졌다.
할아버지 옆에는 낡은 기타가 놓여 있었다. 그는 손으로 기타를 어루만지며 잔잔한 자락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의 연주는 화려하지 않았지만, 듣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었다. 기타 소리는 공장 건설 현장의 기계 소리와 어우러져 독특한 하모니를 만들어냈다. 마치 돈과 삶이 공존하는 현대 사회의 축소판 같았다.. 공장 안에서는 노동자들이 희망과 불안 사이에서 애써 웃음을 지으며 일하고 있었다.. 그들의 땀방울 또한 계산되어 다음 단계의 숫자를 만들어낼 것이다..
서현은 빛바랜 뿔테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공장 건설 현장은 여전히 거대한 괴물처럼 보였지만, 이제는 조금 달라 보였다.. 빛을 삼키는 검은 입 벌린 채 끊임없이 돈의 포효를 뿜어내는 괴물이었다.. 숫자들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 속에서 작은 희망과 행복이 피어나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 희망과 행복조차도 숫자로 환산될 수 있다는 사실이 서현을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마치 완벽하게 짜여진 거대한 방정식 안에 갇힌 듯한 느낌이었다..
할아버지의 미소는 달빛 아래 더욱 고요하게 빛났다.. 달빛은 낡은 밀짚모자에 은가루를 뿌린 듯 그의 미소를 더욱 아름답게 비췄다.. 그의 미소는 단순한 만족감을 넘어선 깊은 깨달음을 담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을 숫자로 평가하는 세상 속에서도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행복은 값비싼 명품이나 화려한 건물보다 더욱 아름다웠다.. 그는 자신의 삶이라는 작은 정원을 가꾸며 만족하는 사람이었다..
“감사합니다.” 서현은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안경에 익숙해져 버린 자신에게 실망했다… 이제 그녀는 모든 것을 숫자로 평가하려 한다… 빛바랜 뿔테 너머로 보이는 것은 세계의 색깔일까? 아니면 여전히 흔들리는 현금의 파동일까? 그 답을 찾기 위해 서현은 다시 빛바랜 뿔테를 고쳐 썼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앞을 향해 걸어갔다… 돈 먹는 하마가 울부짖는 밤 속으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진 밤 속으로… 앞으로 걸어가는 그녀의 발걸음은 희망과 불안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가 다시 어떤 숫자를 만나게 될까? 그리고 그 숫자들은 그녀를 어디로 이끌어갈까?
뿔테 너머는 색깔을 삼킨 회색이었다. 빛바랜 뿔테를 통해 보이는 것은 세계의 색깔이 아니라, 끊임없이 요동치는 현금의 파동이었다. 이제 숨 쉬듯 자연스러워진 숫자들의 춤. 서현은 미술관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창밖 풍경조차 숫자로 분해되는 것을 느꼈다. 가을 단풍잎 하나하나가 떨어지는 속도, 건물 외벽의 타일 개수,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차림 가격까지… 모든 것이 계산된 가치를 품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더 이상 감각적인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효율적인 자원 배분을 위한 스캔에 가까웠다. 심지어 옆자리에 앉은 노인의 주름 깊이까지도, 시간의 흐름과 그에 따른 의료비 지출 가능성을 암시하는 숫자로 읽혔다.
작가 이 작가를 만나기로 한 약속 시간은 오후 3시. 서현은 그를 오랫동안 좋아했지만, 그의 작품 역시 이제 숫자에 갇혀 평가받는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그의 신작 소설 판매량은 전작보다 17% 증가했고, 비평가들은 그의 문체를 ‘세련된 고독’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서현에게는 그 ‘고독’이 계산된 전략처럼 느껴졌다. 마치 완벽하게 포장된 선물처럼, 감정마저도 상품화된 듯했다. 심지어 그의 고독마저도 ‘세련됨’이라는 숫자로 환산되어 소비되는 시대였다.
미술관 근처 카페에서 이 작가를 만났다. 그는 늘 그렇듯 검은색 코트를 입고 있었지만, 안경을 쓰고 있는 그의 눈은 평소보다 더 깊고 어두웠다. 마치 오래된 우물처럼, 빛을 잃고 침묵 속에 잠긴 듯했다. “오랜만입니다, 서현 씨. 안경 덕분에 세상이 좀 더 명확해졌나요?”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어딘가 건조하게 느껴졌다. 마치 잘 조율된 기계의 소리처럼 정교했지만, 온기가 부족했다.
“네, 좀… 명확해졌어요. 하지만 아름다움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 같아요.” 서현은 조심스럽게 답했다. 이 작가는 미소를 지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아름다움은 원래 추상적인 것이죠. 숫자로 표현할 수 있어야 비로소 가치를 인정받는 시대입니다.” 그의 미소는 어딘가 슬퍼 보였다. 마치 자신이 만든 완벽한 문장처럼, 계산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의 말에 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숫자에 맞춰 자신의 삶을 디자인한 완벽주의자였다. 그의 작품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완벽한 문장과 구조를 만들기 위해 밤낮으로 고뇌했지만, 그 결과물은 결국 판매량이라는 숫자로 평가받았다. 그는 마치 정교하게 만들어진 기계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심장은 더 이상 뜨겁게 뛰는 것이 아니라, 규칙적인 리듬으로 박동하는 시계추 같았다.
“최근 작품 반응은 괜찮습니까?” 서현이 물었다. 이 작가는 살짝 쓴웃음을 지었다. “반응은 좋습니다. 평론가들은 제 새로운 시도를 높이 평가하더군요.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제 안에 진정한 감정은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 같아요.” 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예전에는 글을 쓸 때 온 마음을 쏟았어요. 지금은 마치 퍼즐 조각을 맞추듯 완벽한 문장을 만들어낼 뿐이죠.” 그의 눈빛에는 희미한 슬픔이 어려 있었다.. 마치 오랜 겨울 동안 얼어붙은 강물처럼 차가웠다..
그의 말에 서현은 깊이 공감했다.. 그녀 역시 안경을 쓰고 난 후부터 모든 것을 숫자로 환산하려 했다.. 가족과의 대화 시간, 친구와의 만남 빈도, 심지어 미술 작품 감상조차도 숫자를 통해 평가하고 있었다.. 그녀는 돈의 가치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안경 덕분에 세상이 더 명확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녀의 감각 자체가 숫자에 물들어버린 것이다.. 심지어 사랑하는 동생의 생일 선물까지도 예산을 고려하여 선택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미술관으로 돌아온 서현은 다시 작품들 앞에 섰다.. 빛바랜 뿔테 너머로 보이는 그림들은 이전보다 훨씬 더 선명하고 또렷했다.. 하지만 그 선명함 속에는 차가운 계산이 숨겨져 있었다.. 그녀는 작품에 부여된 가격표를 보며 그림 속 감정들을 떠올려보려 노력했다.. 과거에는 그림 속 색채와 형태가 그녀의 마음을 움직였지만, 이제는 그림의 ‘투자 가치’가 먼저 떠올랐다..
그녀는 특히 좋아하는 화가의 초상화를 바라봤다.. 예전에는 화가의 눈빛에서 깊은 슬픔과 희망을 동시에 느꼈지만, 이제는 그 초상화의 ‘희소성’과 ‘미래 가치’만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마치 금속 탐지기처럼 작품 속 숨겨진 숫자를 찾아내려 애썼다.. 그때 문득 그녀에게 새로운 은유가 떠올랐다: 안경은 마치 연극 무대의 조명과 같았다. 조명은 배우의 감정을 강조하고 극적 효과를 높이지만, 동시에 배우를 가리고 진실을 은폐하기도 한다.. 빛과 그림자의 미묘한 조화 속에서 진실은 더욱더 흐릿해진다... 조명이 너무 밝으면 배우의 미묘한 표정을 놓치게 되듯, 안경 또한 감각의 섬세함을 가려버렸다…
또 다른 은유는 안경이 바로 욕망의 거울이라는 것이었다.. 거울 속 자신을 보며 끊임없이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갈망하게 만드는… 욕망의 거울은 우리를 현실에서 멀어지게 하고 환상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거울 속 모습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왜곡되어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은유는 안경이 바로 시간의 모래시계라는 것이었다.. 모래알처럼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숫자에 매달려 현재를 놓치고 미래를 불안해한다… 시간의 모래시개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압박감을 주고 삶의 의미를 잃게 만든다… 모래알이 떨어지는 소리는 마치 우리의 생명이 줄어드는 소리처럼 들렸다…
서현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빛바랜 뿔테 너머로 보이는 것은 세계의 색깔일까? 아니면 여전히 흔들리는 현금의 파동일까? 그녀는 아직 그 답을 찾지 못했지만, 적어도 이제 안경이 가져온 변화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앞으로 그녀는 숫자뿐만 아니라 작품 속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보려고 노력할 것이다... 악마적인 규칙을 가진 안경을 완전히 파괴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 영향력에 압도되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녀는 눈을 감고 잠시 안경 너머의 회색 세계를 떠올렸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며 미술관 벽에 걸린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화가의 눈빛 속에는 여전히 슬픔과 희망이 공존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가격표가 아닌, 화가의 영혼과 마주하려 애썼다…
빛바랜 뿔테 너머로 보이는 것은 세계의 색깔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덧없이 흔들리는 현금의 파동이자, 시간의 모래시계 속 미세한 진동이었고, 인간 존재의 불안을 포착하는 섬세한 지진계였다. 처음 그 파동을 감지했을 때, 서현은 마치 새로운 감각기관을 얻은 듯 신기해했다. 이제 그녀에게 세상은 숫자로 씌여진 거대한 회계장부처럼 보였다. 빛깔은 투자 수익률에 따라 달라지고, 소리는 빅데이터 분석 결과에 비례했으며, 심지어 사람들의 미소조차도 미래의 경제적 이익을 암시하는 그래프의 한 점처럼 느껴졌다.
미술관으로 돌아온 서현은 익숙한 작품들을 다시 바라봤다. 이전에는 직관적으로 다가왔던 색채와 형태들이 이제는 묘하게 계산적으로 느껴졌다. 클로드 모네의 수련 연작은 캔버스 면적당 가격과 습득 비용, 보험료까지 고려해야 할 대상이었고,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는 모델의 아름다움에 대한 시장 가치와 그 아름다움을 유지하기 위한 투자 비용을 생각하게 했다. 마치 작품 속의 정령들이 숫자의 굴레에 억눌려 희미하게 떨고 있는 듯했다. 황금빛으로 빛나는 키스의 배경은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 욕망과 권력을 상징하는 듯했다.
그녀의 시선은 한 노부부에게 머물렀다. 그들은 손을 잡고 조용히 작품을 감상하고 있었다. 남편의 숫자 – 예상보다 훨씬 높았다 – 는 그의 옷차림이나 말투만으로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의 숫자는 오랜 시간 동안 쌓아온 사회적 자본과 지위, 그리고 약간의 행운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부인은 남편보다 숫자가 조금 낮았지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남편의 숫자가 그녀의 숫자까지 끌어올려 주는 듯했다. 사랑도 이제 숫자에 의해 계급이 나뉘는 것일까? 서현은 씁쓸하게 웃었다. MBA 출신의 남편 옆에서 조금 주눅이 든 듯했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남편에 대한 깊은 신뢰와 애정이 담겨 있었다.
안경은 그녀의 시선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었다. 미술관 직원들의 신용 점수, 방문객들의 소비 패턴, 심지어 꽃병 속 꽃잎의 개수까지 보였다. 모든 것이 숫자로 환원되는 세상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그녀는 문득 어린 시절, 어머니가 즐겨 불렀던 자장가를 떠올렸다.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따뜻함과 사랑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어머니의 신용 등급마저 궁금해졌다.
서현은 안경을 벗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안경은 완벽하게 그녀의 얼굴에 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피부처럼, 혹은 영혼처럼 말이다. 그녀는 안경을 잡아당기고, 비틀고, 흔들었지만, 안경은 꿋꿋하게 그녀의 시선을 지배했다. 마치 악마와의 계약처럼, 한번 쓰고 나면 벗어나기 힘든 저주처럼 말이다. 벗으려고 할수록 더 선명해지는 숫자들의 향연에 질식할 것 같았다.
그때 그녀는 깨달았다. 안경을 파괴한다고 해서 세상이 완전히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숫자는 이미 우리 삶 깊숙이 뿌리내렸고,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안경은 단지 그 숫자를 더욱 명확하게 보여주는 촉매제일 뿐이었다. 파괴해야 할 것은 안경이 아니라, 숫자에 대한 우리의 맹신이었다. 그리고 그 맹신 뒤에 숨겨진 불안과 욕망이었다.
서현은 다시 눈을 감고 깊게 숨을 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뜨며 초상화를 바라봤다. 이번에는 가격표를 보려는 것이 아니었다. 화가의 눈빛 속에 담긴 슬픔과 희망을 읽으려고 애썼다. 화가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감정의 흔적을 느끼려고 노력했다. 완벽하지 않지만 아름다운 인간의 영혼을 말이다. 초상화 속 인물의 눈동자 속에서도 미세한 떨림과 희망을 발견했다 – 그의 숫자만큼이나 복잡하고 다층적인 감정을 말이다..
미술관을 나서는 길, 서현은 길가에 놓인 작은 꽃집에 들렀다. 빨간 장미 한 다발을 골라 계산하면서 그녀는 문득 장미 한 송이당 얼마라는 숫자에 신경 쓰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짜증스러워하지 않았다.. 그냥 미소 지으며 돈을 건넸다.. 그 장미는 누군가의 사랑을 담고 있고, 누군가의 기쁨을 선사할 것이다… 숫자는 단지 하나의 표식일 뿐이었다.. 장미 한 송이당 얼마라는 숫자는 단순히 경제적 가치를 넘어 누군가의 정성과 마음을 표현하는 또 다른 방식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서현은 창밖 풍경을 바라봤다.. 빌딩숲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회색빛이었지만, 그래도 아름다웠다.. 빛바랜 뿔테 너머로 보이는 것은 여전히 흔들리는 현금의 파동이었지만, 이제 그녀는 그 파동 속에서 다른 색깔들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완벽하게 파괴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 영향력에 압도되지 않고 자신만의 색깔로 세상을 바라보겠다고 다짐했다… 빛바랜 뿔테 너머로 보이는 것은 세계의 색깔일까? 아니면 여전히 흔들리는 현금의 파동일까? 그 답은 아직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지금 서현은 미소 지으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안경은 쉽게 벗겨지지 않았다.. 버스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서현은 깨달았다.. 안경은 단순히 시각적 도구가 아니라 그녀 자신의 일부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그리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숫자의 파동 속에서 헤엄쳐야 할 운명이라는 것을… 그렇다면 숫자를 원망하기보다는 그 파동 속에서 자신만의 리듬을 찾아야 할 것이다… 시간조차 숫자로서 측정되는 세상에서… 서현은 어쩌면 영원히 안경을 쓰고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과 함께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희망이었을까? 체념이었을까? 아니면 둘 다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