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삼촌이 암에 걸렸다. 장가를 가고 딸과 아들까지 떡 하니 낳아 행복하게 살 날만 기대했을 텐데. 암이라니. 엄마의 말에 의하면 할머니는 민간요법이란 민간요법은 다 찾아서 했다고 한다. 한동안 삼촌을 데리고 물이 좋다는 산속 움막에 들어가 그 물로 밥을 짓고, 음식을 해 먹였다고 했다. 차도가 나아질 기미가 없자 굿까지 했다고.
할머니의 간절한 바람과 달리 삼촌은 3살, 1살 배기 아이를 두고 먼저 하늘나라로 갔다.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장례. 아이고! 아이고! 절규하듯 실려 나온 할머니의 모습이 며칠 전 본 영화 속 한 장면같이 선명하다. 세상이 떠나갈 듯한 비통한 울음소리만이 메아리처럼 울렸던 그 시간은 수의 입은 아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눈 뒤라는 걸 이제는 안다.
외숙모는 남편의 죽음에 누구보다 작은 소리로 눈물을 훔쳤다. 검은색 상복을 입고 바닥에 앉아 숨죽여 울던 외숙모의 무릎에 내가 조용히 앉았던 기억이 난다. 고개를 들어 외숙모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던 기억이. 외숙모는 왜 목 놓아 울지 않았을까. 왜 목 놓아 울지 못했을까. 조금은 알 것 같다. 자식 잃은 부모 앞에 과연 누가 더 크게 목놓아 울 수 있단 말인가.
삼촌을 떠나보내고 할머니는 한동안 방바닥에 힘없이 누워있었다. 옆으로 몸을 뉘인 할머니의 눈과 눈 사이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잊을 수 없다. 삼촌 이름으로 우편물이 날아올 때면 나는 어쩔 줄 몰라했다. 숨겨야 하나? 우리 할머니 또 울겠네… 하지만 차마 숨기지 못하고 그저 할머니의 눈물만을 닦아줬던 기억이 난다.
몇 년 전부터 할머니는 먼저 옛날이야기를 꺼내기도 했다. 내가 전혀 알지 못했던 할머니의 과거를 하나씩 툭툭 꺼내놓으셨다. 아들 잡아먹는 X이라고 손가락질받던 잔인한 시절을 보냈다고. 다 나를 욕하는 것 같아 세상 밖으로 나오기 두려운 시간이 있었다고. 스님의 손을 잡고 겨우겨우 삶을 살아내기로 결심했다는 할머니의 이야기에 나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할머니가 기억하는 가장 잔인하고 두려웠던 시절에 여덟 살이었던 나는, 과연 어떤 손녀딸이었을까?' 그 시절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주는 존재였길 바라본다.
엄마에게 갑자기 연락이 왔다. 잠깐 너네 집에 들를게. 절에서 팥죽 받았는데 그것 좀 주고 가려고. 팥죽을 썩 좋아하진 않지만, 엄마의 바람대로 팥죽을 한 숟가락씩 푹푹 떠먹었다.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나니 엄마가 슬피 운다.
할머니가 죽기 전에 부탁하셨던 것은 49재만이 아니었다. 네 동생 환갑 제사는 꼭 해줘. 올해 12월이 돌아가신 삼촌이 환갑을 맞이하는 달이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손수 아들의 환갑을 챙겨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직감하셨던 것 같다.
할머니의 마지막 49재 제사를 앞두고 엄마는 스님께 삼촌의 환갑 제사에 대해 물었다고 한다. 스님 저희 엄마가 동생 환갑 제사는 꼭 해달라고 했는데, 얼마를 드려야 하나요? 스님의 답변은 엄마를 한동안 말을 잃게 만들었다고 한다. 어머님이 이미 다 해놓고 가셨어. 아들 환갑 제사 준비해 달라고 돈까지 다 주고 가셨어.
할머니는 모든 것을 알고 계셨던 것 같다. 다가오는 죽음의 순간도, 남겨진 사람들이 감내해야 할 무게도.
그 무게를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싶었던, 본인의 마지막 부탁이 가족들에게 짐이 되지 않길 바랬던 할머니의 마음을. 우리는 이제야 실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