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조선을 읽는 문화-코드
이제는 ‘헬조선’이라는 말마저 사치가 된 것 같다. 현재의 추세대로라면 한국이라는 나라는 ‘지옥’마저 존재하지 않는 ‘텅 빈 땅’이 되고 말 것이다. 하기에 ‘헬조선’이 아니라 ‘망조선’ 혹은 ‘멸조선’이 더 이 나라를 표현하는 데 적합한 단어들이 아닌가 싶다.
한데 흥미로운 사실은 한국인들 대다수가 그 원인에 대해 비교적 일치된 견해를 내놓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수 차례의 여론 조사를 통해 밝혀져 왔던 것처럼, 절대 다수의 한국인들은 비정상적인 인구 감소의 원인을 ‘과도한 경쟁’에서 찾고 있다. 대학 입시 경쟁, 취업 경쟁 등등, 한국인의 삶을 평생 지배하는 과도한 경쟁 구도가 인구 소멸의 주된 원인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대학 입시 경쟁이라는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는 데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을 것이다. 실상 취업 경쟁, 주거 경쟁 등등 그간 한국 사회를 돌아가게 만들었던(그리고 이제는 돌아가지 않게 만들고 있는) 핵심 동력이 교육,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해 ‘입시’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반박하기 힘들 것이다. 좋은 대학을 나오는 것은 곧 좋은 직장을 의미하고, 좋은 직장을 잡았다는 것은 곧 좋은 주거 환경에서 살 수 있는 재력을 갖췄다는 말이 될테니 말이다.
하지만 모두가 입시 경쟁이 모든 경쟁의 뿌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도대체 그러한 구도가 왜 생겨났는지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원인을 제대로 짚어내지 못하기에 그에 대한 근본적인 처방 역시 나올 수 없다. 왜 한국은 교육은 없고 입시만 존재하는 사회가 되었을까? 왜 교육은 없고 입시만 존재하는 사회는 왜 망할 수밖에 없는가? 그리고 한국 왜 그러한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걸까? 헬조선, 나아가 멸조선이 되어 가고 있는 한국을 진단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근본적인 해답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교육이란 무엇일까?
근대적 교육이 탄생하게 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대중 사회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실상 대중 사회가 출현하기 이전 교육은 극소수 엘리트층에게만 필요한 것이었다. 중세 시대의 유럽에서 교육은 성직자의 양성이라는 매우 국한된 영역에서의 활동이었고, 조선 사회에서도 교육은 결국 양반 계층을 재생산 하기 위한 활동이었다. 한데 신분제가 폐지되고 모두가 평등한 사회가 도래하면서, 모두가 동등한 자격을 가진 평등 사회가 도래했다. 이제 문제는 불특정 다수가 모두 재화 - 돈, 명예, 사회적 지위 등등 - 에 대한 접근권리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육이 짊어져야 할 역할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생긴다. 극소수 계층에게만 교육이 실시되는 사회는 그 구성 역시 극소수의 일방적인 설계에 의해 이루어진다. 특수한 엘리트 계층이 피지배 계층에게 도덕과 윤리를 일방적으로 지시하면 그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두가 동등한 지위를 갖는 대중 사회에서는 공동체를 구성하기 위한 도덕과 윤리가 구성원들에 의해 수용되어야 한다. 대중 사회라는 조건 속에서 만약 각각의 구성원들이 공동체를 구축하는 상호 배려 혹은 공동체 의식을 갖지 못한다면 그러한 사회는 유지될 수 없다. 공동체 의식과 질서 의식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사회는 곧 각자도생, 적자생존의 공간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동체 의식과 질서 의식을 만들어내는 것이 근대 교육의 핵심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교육은 없고 입시만 있는 나라
하지만 불행하게도 한국의 근대 교육은 일본에 의한 식민화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앞서 이야기한 교육의 본질 같은 건 애초부터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일본은 조선에 근대 교육을 이식함에 있어 교육의 근본적인 기능과 의미를 고려하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일본의 근대적 교육관 자체가 ‘천황을 위한 도구적 인재의 양성’이라는 목표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본 근대화의 근본적인 지향점이 ‘시민사회의 양성’이 아니라 ‘천황을 중심으로 한 강한 국가의 완성’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일본 자체에서도 그러한 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도구적 교육관이 뿌리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식민지 조선에 도구적 교육관이 착근하게 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일본은 식민지 초기 조선에 대학을 설치하지 않았고, 3.1운동 이후 시작된 이른바 ‘문화 통치’ 이후에야 비로소 대학의 필요성을 고려하게 되었다. 하기에 ‘경성제국대학’은 당연하게도 도구적 필요성에 의해 설계되고 운영되었다. 경성제국대학이 도구적 관점에 의해 설립, 운영되었다는 사실은 본 대학에 우선적으로 설치된 전공의 면면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경성제국대학에 최초로 설치된 전공은 건축, 농학, 법학이었는데, 이러한 전공이 우선적으로 설치된 것은 해당 전공이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실용적인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외면해서는 안 되는 역사적 사실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바로 식민 시대를 살았던 ‘평범한’ 조선인들과 그들의 교육 생활이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우리는 ‘독립운동’이라는 렌즈를 통해 식민지 시절을 회상하지만, 실상 식민 시대를 살았던 절대 다수의 평범한 조선인들은 일본의 식민 통치에 적응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는 곧 식민지 조선의 문화적 저류에 일본이 제시한 도구적 교육관이 강고하게 뿌리를 내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식민 시대를 살았던 대다수 조선인들에게 교육이란 일본이 제시한 도구적 교육관을 수용하고, 그것을 발판으로 삼아 생계수단을 마련하고, 나아가 기회가 된다면 식민 공간 안에서 출세를 하는 것이었다(정종현, <제국대학의 조센징>, 휴머니스트, 2019 참조).
그렇다면 일본에 의해 이식된 도구주의적 교육관은 해방 이후 사라졌을까? 해방 이후에도 일본이 만들어 놓은 도구적 교육관은 전혀 해체되지 않았다. 해방 이후 조선을 점령한 미군정은 조선의 교육 개혁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일본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통치에 유용한 도구적 인재를 양성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이후 전쟁을 경험하면서 ‘각자도생’의 지옥도를 경험한 한국인들은 한층 더 도구주의적 교육관에 몰두하게 되었다.
내 자식만은…
그런데 우리는 박정희 시대에 펼쳐졌던 매우 흥미로운 역사적 장면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주지하듯 과거에는 중학교 입시와 고등학교 입시가 모두 존재했다. 때문에 당시에는 오늘보다 더욱 가혹하고 치열한 입시 경쟁이 존재하고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과도한 입시 경쟁의 완화를 주장하면서 중고등학교 입시 폐지를 시행했는데, 당시 절대 다수의 학부모는 이러한 중고교 평준화 정책에 맹렬하게 반대했다. 절대 다수의 학부모가 평준화 정책에 반대한 이유는 ‘왜 내 자식이 명문고에 갈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해야 하느냐’는 것이었다.(마이클 세스, <한국 교육은 왜 바뀌지 않는가?>, 학지사, 2020 참조)
우리는 절대 다수의 학부모가 중고등학교 입시 폐지에 반대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깊게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반대가 들춰내고 있는 한국인의 밑바닥 심리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한국인은 평등한 교육, 시민적 교양을 함양하는 교육보다 평등한 조건 속에서의 경쟁과 그것을 통한 사회적 재화의 불평등한 분배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한다. 요컨대 한국인은 평등하면서도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는 교육보다, 공정한 경쟁을 통한 불평등에 더욱 열광하는 것이다. 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이러한 밑바닥 심리는 식민지 시절부터 장구한 시절에 걸쳐 축적되어 온 ‘문화적 무의식’에 가깝다.
이는 만약 오늘날 대학 평준화가 제시되었을 때 나타나게 될 한국 사회의 반응을 상상해 보면 쉽게 수긍이 될 것이다. 만약, 누구나 이야기하듯이, 한국 사회의 경쟁이 너무도 심해 그 경쟁의 정도를 좀 누그러뜨리기 위해 대학 평준화를 실시해야 한다는 주장이 정치권에 의해 혹은 대선 후보에 의해 정식으로 제시된다면 한국인들은 어떠한 반응을 보일까? 과연 한국인 대다수는 그러한 대의에 동의하면서 대학 평준화라는 정책에 순순히 동의하고 따를 것인가?
민주주의는 지옥의 무한루프를 끊어낼 수 있을까?
이로써 지옥의 무한루프가 완성된다. ‘식민지 경험에 의한 교육의 부재(입시 일변도의 도구적 교육관의 착근) → 공동체 의식이 부재한 인간의 양성(해방 이후 미군정, 박정희 시대) → 사회의 파편화 → 각자도생의 사회 구축 → 살아남기 위해 도구적 교육에 몰두 → 공동체 의식이 부재한 인간의 양성 → (계속 반복) ’
우리는 이 지옥의 무한루프를 끊어낼 수 있을까? 이러한 지옥의 무한루프를 지적하면 혹자는 ‘그래 이게 다 일본 때문이야’라는 말로 논의를 끝내려 한다. 우선 맞는 말이다. 한국에 이러한 지옥의 무한루프가 만들어진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식민 통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일본한테 가서 이러한 무한루프를 끊어달라고, A/S를 해달라고 졸라야 할까?(사실 정작 일본 스스로는 일정 정도 이러한 지옥의 무한루프를 끊어냈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참조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지옥의 무한루프를 끊어내기 위한 시도는 계속 존재해 왔다. 그리고 지금도 지옥의 무한루프를 끊어낼 수 있는 방안들은 계속해서 제시되고 있다.(<서울대 10개 만들기> 등을 보라) 그렇다면 그 대안까지 이미 다 제시되어 있는데도 왜 우리는 지옥의 무한루프를 끊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혹 우리는 그 이유를 과거 중고교 입시 평준화에 반대했던 사례에서 드러났던 ‘밑바닥 심리’와 다수결에 의한 결정이라는 민주주의의 결합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민주주의는 다수결에 의한 원칙에 의거한다. 그리고 그 다수결이 결정되는 과정, 즉 투표는 철저한 비밀에 부쳐진다. 내가 어떠한 선택을 했는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지옥의 무한루프를 인식하게 된 한국인’은 어떠한 선택을 할까? 나라가 망해가는 것을 모두가 안다. 그리고 그 원인이 교육은 없고 입시만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안다. 그렇다면 한국인은 아무도 볼 수 없는 투표장에 들어가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입시만이 존재하는 이 구도를 타파하는 대학평준화에 찬성표를 던질까? 아니면 ‘그래도 혹시 내 자식만은?’이라는 마음으로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는 선택을 할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이 곧 한국 사회가 헬조선, 나아가 멸조선으로 향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답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