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상주 시장 중앙에서 종묘상회를 크게 하였던 우리 집은 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가세가 급격하게 기울어졌다. 빚에 쪼들리게 된 부모님이 쉬는 날 없이 맞벌이를 할 수밖에 없었고, 집안분위기는 살얼음판을 건너는 듯 긴장감이 감돌았다. 나이가 제일 어리고 나약한 날 가족들은 자신들의 불안한 감정을 쏟아내는 감정의 쓰레기통삼아 구박만 해댔다. 나는 11살 어린 나이었지만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 거지 같은 집구석에서 머무는 시간을 최소화 하자. 학교를 가지 않는 날은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 들어와서 일찍 잠들자. 학교를 가는 날은 하교 후 즉시 길을 나서자. 집엔 되도록 머물지 말자’
다음날부터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주말이면 아침밥을 먹고 무조건 집을 뛰쳐나갔다. 동네 중앙시장을 지나 작은 개울이 흐르는 둑 길을 하염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달리다 지치면 천천히 숨을 고르며 걷다가 이름 모를 다양한 들꽃들을 꺾어 꽃다발, 반지, 팔찌를 만들어 치장하고 잠자리, 개구리도 잡아서 놀다가 풀어주며 계속 여정을 이어갔다. 이번 주는 동쪽 방향, 다음 주는 서쪽 방향, 방향을 바꿔가며 전진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너무 집에서 멀어졌음을 직감하고 집 방향으로 되돌아가려고 하는데, 길을 잃어버렸다. 순간 불안감에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렀고, 극도의 공황상태에 빠져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는데 자전거를 타고 쌩 지나가는 아빠를 보았다. 위험에 빠진 날 구해줄 거라 믿고 “아빠” 큰소리로 불렀지만 날 못 보았는지 뒤돌아보지 않은 채 계속 멀어지는 무심한 아빠의 뒷모습에 순간 눈물이 뚝 멈춰졌다.
강해지자.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 정신 차리자. 세상과 사람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자 오히려 정신은 맑아졌다. 여기서 믿지 않음은 불신하고 적대시하겠다는 게 아니라, 타인과 세상에 대책 없이 무한정 희망을 상상하면서 의지하는 무책임한 태도를 버리고 스스로 강해지겠다는 다짐이다. 지나가는 행인 중 착해 보이는 아주머니를 붙잡고 “아주머니, 남성동 방향이 어디예요?” 아주머니가 손가락으로 가르쳐준 방향으로 흔들림 없이 한참을 걷다 보니 내가 아는 상주 중앙시장이 다시 나왔다. 다음부터는 멀리 가게 되면 헨델과 그레텔처럼 바닥에 표식을 남겨놓으리라 다짐했다.
계속 뛰고 걷는 외출을 반복하다 보니 자주 지나치는 어느 마을의 어린 남매와 친해지게 되었다. 비슷한 시간대에 어린 꼬마가 혼자 지나가는 게 신기했던지 자기 집 평상에 앉아있던 그 남매는 한 날은 나를 반기며 불러 세웠다. 마침 라면을 끓였다며 같이 먹자고 했다. 뭘 몰라서였을까. 아무 경계심 없이 어울려 라면을 먹었고 눈치 없이 매일매일 그 집을 들러서 놀다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날 놀려먹고 싶었는지 남매가 작당을 해서 “야, 너 거지냐? 맨날 얻어먹게. 너 집도 가족도 없지?”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난 그 말에 ‘아니야’라고 자신 있게 반박을 하지 못했다. 수중에 돈 한 푼 없는 11살 꼬마였고, 가족이 있지만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방치된 무기력한 존재일 뿐이었음을 들켜버린 것만 같았다. 모른 척하고 싶었던 나의 위치를 확인한 순간 난 그저 “으앙~” 울면서 “다시는 니네랑 안 놀아” 하고 그 집을 도망치듯 뛰쳐나왔다.
그다음 날부터는 다른 방향으로 전진하였다. 태양이 내리 째지만 습하지 않아 기분 좋게 따뜻했고 선선한 바람도 불어서 땀도 차지 않았다. 기분이 한결 청량해지면서 코스모스 가득 핀 들판을 따라 고추잠자리를 보며 걷는데 동화책의 마법의 성처럼 처음 보는 건물이 나타났다. ‘경축! 상주 어린이도서관 개관’
도서관은 뭘 하는 곳이지. 뭔가에 홀린 듯 도서관으로 들어섰다. 개관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오래간만에 제 발로 찾아온 고객님이 반가웠을까? 친절한 사서분이 도서관 시설물과 책을 읽는 방법 등을 알려주시며 도서관투어를 해주셨다. 그리고 전래동화를 읽어보라며 책 한 권을 꺼내주셨다. 그날부터였다. 이제 집을 나와서 어디를 가야 할지 고민하지 않게 된 건. 아침밥을 먹고 가을 들녘을 지나 개울가 초입에 새로 지어진 어린이도서관으로 곧장 들어가 아무도 읽지 않은 새 책을 한 권 한 권 정복해 가며 전진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성취감이라는 게 이런 것이겠지. 처음 느껴보는 내적 충만감. 밥을 먹지 않아도 배부르고 성장하는 이 뿌듯함에 중독된 나는 박혁거세 탄생설화, 김유신 설화, 선덕여왕 설화 등 전래동화, 설화, 민담을 거쳐 신데렐라, 백설공주, 장화 신은 고양이 등 서양 동화까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책들을 읽어나갔다.
‘아, 내일부터는 다른 벽면 쪽 책장을 정복해야지’하고 부푼 꿈을 안고 도서관을 향하는 매일이 너무나 행복했고, 그 행보는 내가 삶의 한계에 부딪쳐서 나만의 동굴로 숨고 싶을 때마다 이어졌다. 도서관은 내 삶의 든든한 방공호 인 셈이다.
얼마 전 내가 근무하는 고용센터에 청년 구직자들을 위한 고용센터 투어행사가 있었다. 투어를 진행하며 청년 구직자들에게 고용센터의 역할, 각 팀의 업무분장 및 기관시설을 소개하며 다음과 같이 말해보았다.
“청년 구직자님 여러분, 인생 선배로서 제 삶에서 제일 소중한 공간이 2군데 있었습니다. 청년이룸센터, 고용센터와 같이 삶에 도움을 주는 공공기관 그리고 도서관! 삶의 위기에 있을 때 혼자 방에서 고민하지 마시고, 공공시설을 두드리세요. 그리고 책을 많이 읽으세요. 분명 여러분의 인생에 든든한 힘이 되어 줄 것입니다.”
스산한 바람이 폐부를 아련하게 스치며 지나가는 이제 완연한 가을 날씨이다. 도서관 가기 딱 좋은 날씨이다. 체력이 안 된다면 걸어서 쉬이 발이 닿는 집 근처 도서관을, 좀 더 기운이 난다면 정독도서관같이 경치 좋고 색다른 먼 거리의 도서관도 찾아가 보길 바란다. 그 누구라도.